기억 심기_1
그날부터 진수는 라이터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남자의 말 중에서 “라이터가 스스로”라는 부분이 키워드인 것 같았지만, 그 의미가 쉽사리 다가오지 않았다. 그래도 진수는 포기하지 않았다. 이전으로 돌아갈 방법이 있다는데 포기할 이유가 없었다. 이런 진수를 지켜보는 현아는 점점 불안한 마음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제 겨우 주혁이 기억을 찾아가며 둘만의 생활이 다시 시작되었는데, 이 시점에 무슨 이유에서인지 다시 라이터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현아는 주혁의 속마음을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어떨 때는 영락없는 주혁이지만, 또 어떨 때는 정말 주혁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때도 있었다. 지금처럼 라이터에 집착할 때가 그랬다. 라이터가 주혁에게 진수라는 존재의 끝을 이어주고 있는 것만 같았고, 결국 라이터가 눈앞에서 사라져야 그 끈도 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만일 그렇지 않고 지금의 주혁을 그대로 지켜보기만 한다면, 주혁 스스로는 그 끈을 끊을 수 없을 것이다. 생각이 거기에까지 이르자 현아는 차라리 자기라도 라이터를 주혁의 시야에서 사라지게 하고 싶었다. 물론 그런 상황에 대해 주혁과 의논해 볼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한창 라이터에 몰입된 주혁이 그렇게 쉽게 동의하지는 않을 것 같았기에, 그냥 현아가 주혁 모르게 라이터를 내다 버리는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진수는 아무리 생각해도 라이터의 비밀을 알아낼 수 없었다. 그래서 다시 한번 라이터가 자기 손에 들어오게 된 과정을 처음부터 곰곰이 되짚어 보았다. 그날의 상황은 간단했다. 길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남자를 발견하고, 그에게 담뱃불을 빌려달라고 했으며, 그가 건네준 라이터로 담배에 불을 붙인 것이 전부였다. 그 과정에서 도대체 무엇을 놓친 것일까? 그렇게 몇 날 며칠을 고민하던 진수는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처음에도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보통은 불을 빌려달라고 하면 라이터로 상대방의 담배에 직접 불을 켜주는데 그 남자는 라이터를 아예 통째로 진수에게 주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렇다면 혹시 불을 빌려달라는 사람이 직접 라이터로 불을 켜게 만들면 되는 것일까? 그렇게 하는 것이 라이터가 스스로 진수의 손을 떠나게 하는 것일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스스로’라는 말에는 설명이 부족하긴 했다. 자발적 의지력이 없는 라이터가 어떻게 ‘스스로’ 행동할 수 있단 말인가. 진수의 추리는 거기에서 일단 막혀버렸다. 진수는 안타까웠다. 만일 자기의 추리력이 주혁의 그것만큼 되었더라도 쉽게 추론할 수 있을 만한 문제라고 생각했다. 왜 하필 육체만 주혁이고, 추리력은 진수인지 안타까웠다. 어쩌면 이런 상황을 스스로 해결해 보라고, 라이터가 진수를 그 많은 사람 중에 추리 작가 주혁의 몸으로 깨어나게 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보기도 했다.
현아는 그날부터 기회를 엿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워낙 집에서 둘이 붙어 지내는 사이인 데다가,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둘 중의 한 명만 따로 외출하거나 해서 자리를 비우는 일이 없는 그들인지라 쉽게 기회를 만들 수가 없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고, 마침 현아 어머니 생일 축하를 빙자해서 현아의 친정 식구들과 밖에서 식사할 기회가 생겼다. 현아는 차라리 함께 외출하는 것이 더 좋은 기회처럼 생각되었다. 함께 나가기 바로 전에 주혁 모르게 라이터를 갖고 나갔다가 적당한 장소에 버리고 돌아오면, 나중에 테이블 위에 있던 라이터가 없어졌다고 해서 주혁이 특별히 현아를 의심하지는 못할 것 같았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현아는 오늘 당장 계획을 실행해야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현아는 외출 준비를 마치고 서재로 들어갔다. 주혁은 그때까지 의자에 앉아서 자기 책들을 읽고 있었다. “주혁아, 너도 그만 책 읽고 방에 가서 옷 갈아입고 나갈 준비 해. 내가 옷은 꺼내 놨으니까 그 옷으로 입어. 엄마 기다리시겠다. 얼른 가자.” “그래, 알았어.” 현아를 쳐다본 진수는 그렇게 말하면서 의자에서 일어나 책을 덮고 서재에서 나갔다. 현아는 뒤따라 나오면서 얼른 라이터를 챙겨 주머니에 넣었다.
서재를 나와 안방으로 가니 주혁이 마지막 겉옷을 입고 있었다. “오, 역시 멋진데? 하하하. 다 입었으면 휴대전화 잊지 말고 꼭 챙기고 출발하자.” 현아는 주혁을 잔뜩 추켜세우며 함께 주차장으로 내려가서, 운전석 문을 열고 자리에 올랐다. “내가 운전할까?” “아냐, 내가 할게.” 진수가 습관처럼 물었고, 현아도 습관처럼 대답하고는 시동을 걸었다. 그날, 아침에 주혁을 데리고 온 날 이후로, 현아는 항상 함께 외출할 때 자기가 운전석에 앉았다. 차는 주차장을 빠져나와 큰길로 접어들었다. 모처럼의 외출이라 그런지, 아니면 계절 탓인지 차창 밖 풍경이 변해 보였다. 새삼스럽게 현아를 처음 만난 날이 떠올랐다. 그날도 지금처럼 현아가 운전하는 차의 조수석에 앉아서 어리바리한 사람처럼 차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랬던 자신이 지금은 원래부터 주혁이었던 것처럼 주혁의 역할을 능숙하게 해 나가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물론 지금은 이제 잠시 후에 함께 식사하게 될 현아의 부모님이나 여동생도 진수가 주혁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렇게 주혁이 되어가고 있었다.
예약한 식당에 도착해서 들어가 보니 아직 현아의 친정 식구들은 도착 전이었다. 예약한 자리를 확인하고 계산대에 도착해 있던, 미리 주문한 꽃바구니를 식탁 한가운데에 올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꽃바구니에 두른 리본에는 양쪽으로 “윤희숙 여사님의 생신을 축하합니다.” “주혁이랑 현아가”라고 적혀있었다. 현아의 집에서는 주혁이도, 이 서방이 아닌 주혁이었다. 워낙 대학 시절 함께 다닐 때부터 주혁이라고 불러왔기 때문에 지금도 현아의 부모님은 이 서방보다 주혁을 더 편하게 생각하셨다. 단지 여동생만 주혁을 ‘형부’라고 불렀다. 잠시 기다리니 입구를 들어서는 세 사람이 보였고, 직원의 안내를 받아 현아와 주혁이 있는 자리로 오는 것을 보고 둘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세 사람을 맞았다.
“어머니 아버지 어서 오세요. 현주도 오랜만이야.” 주혁은 처제에게 처제라고 부르지 않고 이름을 불렀다. “어, 그래. 너희들이 먼저 왔구나. 잘들 지내고 있지?” “그럼요. 아주 잘 지내고 있어요. 자리에 앉으세요.” “그래 다들 앉자. 그런데 이건 웬 꽃이야?” “엄마, 주혁이가 엄마 생일 축하한다고 산 거야. 예쁘지?” “아, 그래? 정말 예쁘네. 주혁이가 어릴 적부터 감각이 너보단 나았지. 고맙다. 주혁아. 하하하.” 희숙이 현아를 놀리며 웃었다. “나도 형부가 골랐다. 에 한 표.” 옆에서 현주도 주혁의 편을 들었다. “그런 게 아니야. 돈만 주혁이가 낸 거야. 꽃은 내가 골랐단 말이야.” 현아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그게 어떻게 너 혼자 고른 거야? 같이 골랐지. 어머니, 현아랑 같이 골랐어요. 생일 축하합니다.” 그렇게 몇 마디 말이 오가는 동안, 미리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엄마, 아빠 맛있게 드세요. 큰딸이 사드리는 거니까 마음껏 드세요. 하하.” “그래, 고맙다. 잘 먹을게.” 말 없던 상철도 입을 열었다. “나는 형부한테 고맙다고 할 거야. 형부, 잘 먹을게.” 현주는 항상 주혁 편이었다. 언제나 그랬다. 주혁이 현아와 사귀기 시작한 대학 신입생 시절에 현주는 중학생이었다. 주혁이 현주를 많이 예뻐해 주었고, 그때부터 현주도 주혁을 잘 따랐다. 그랬던 현주가 이제 어느덧 이십 대 중반을 넘어선 나이가 되었지만, 주혁에게는 여전히 어린 꼬마 숙녀였고, 현주에게 주혁은 여전히 멋진 대학생이자 문학청년이었다. 주혁이 현아의 집안과 스스럼없이 가깝게 지낼 수 있었던 이유는 이렇게 단출한 가족이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아들은 없이 딸만 둘을 키우는 상철과 희숙에게 주혁은 마치 아들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주혁도 나름대로 현아의 집안일이라면 두 팔 걷고 나서서 도와주었고, 그런 주혁에게 든든함을 느낀 상철과 희숙도 현아와의 결혼을 적극 지원하였으며, 영원한 주혁 바라기였던 현주도 열렬히 환영했음은 물론이었다.
식사를 시작한 지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서 이제 음식은 거의 다 먹고 일어설 시간이 되었다. 일행은 가까운 곳에 있는 카페로 자리를 옮겨서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좀 더 하기로 했다. 현아는 자리를 옮기기 전에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현아의 주머니에는 집에서 들고 나온 주혁의 라이터가 들어있었다. 화장실에 들어가서 문을 잠근 현아는 옆 칸에서 소리가 들리지 않게 조용히 변기 뒤의 수조를 열고 그 안에 라이터를 넣은 후, 뚜껑을 닫았다. 화장실에서 나온 현아는 잠시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이내 손을 씻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자리로 돌아갔다. 일행은 일어나서 현아를 기다리고 있었고, 주혁은 입구로 나가서 식대를 결재하고 있었다. 카페는 바로 옆 건물에 있었기에 일행은 차를 식당 주차장에 놓고 걸어가기로 했다. 모녀는 모녀끼리, 주혁은 상철과 함께 나란히 걸었다. 상철은 주혁이 살갑게 굴어도 말이 별로 없는 스타일이었다. 그렇다고 주혁을 좋아하지 않은 것은 아니고, 단지 자기의 마음을 주위 사람에게 표현하는 방법을 잘 모르는 사람일 뿐이었다. 그렇지만 상철도 술을 좋아해서, 술만 마시면 말이 술술 나왔다. 그런 점이 그나마 주혁에게는 다행이었다.
카페에서의 시간도 그다지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상철과 희숙은 부부끼리만 다른 일정이 있다면서 일어섰다. “나도 재호랑 만나기로 했어. 이제 대충 시간도 다 되어가니까 지금 같이 일어날래.” “재호?” 진수의 말에 현주가 웃으면서 형부를 살짝 흘겼다. “재호 몰라? 형부한테 동서가 될 사람인데.” “아, 알지 내가 재호를 왜 몰라. 그냥 너는 가족 모임 하는 날도 남자친구랑 겹치기 약속을 하는구나, 해서 물어본 거지.” 진수가 얼버무리며 둘러댔다. “그래. 가서 잘 놀아. 나중에 또 보자.” 진수도 현아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카페 입구에서 인사를 하고 헤어진 진수는 주차장으로 가면서 현아에게 말했다. “어때? 점점 자연스럽지? 집에는 내가 또 정신 잃었었다는 말 안 했지?” “응. 그런데 역시 눈치를 못 채던데? 하하하. 나는 사실 엄마랑 아빠보다는 현주를 더 걱정했거든. 걔가 너를 좀 따랐니? 아마 내가 모르는 부분 중에는 현주만 아는 너의 모습이 있을지도 몰라. 그런데도 전혀 모르잖아. 이제 우리 쪽 식구들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어.” “아, 진짜 아까 실수할 뻔했다. 재호 이야기를 왜 내가 까먹었는지 모르겠네. 하하” “아냐, 그 정도면 자연스럽게 잘 대답한 거야.” 현아는 비로소 무슨 시험이라도 통과하듯이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하지만 진수는 점점 주혁으로 지내는 시간이 늘어갈수록, 정말 자신이 기억을 잃었다가 다시 기억을 찾아가는 주혁은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진 것만 같았다.
지금의 현실에서 라이터의 도움으로 이 상황을 벗어난다면, 꿈속의 남자 말대로 진수가 주혁이 되기 바로 전 그날 아침으로 돌아갈 것이다. 결국 이곳에서 아무리 오래 살다가 돌아가더라도 진수의 세상에서는 그야말로 찰나의 시간일 뿐이다. 그렇다면 오히려 현아가 굳게 믿고 있듯이 자신이 주혁인 것이 맞고, 어떤 이유에서든 진수의 시절로 갔다가 다시 돌아온 것이 진실이라면, 진수로 살아온 이십육 년 가까운 시간도 이곳에서는 주혁이 정신을 잃었던 그 찰나의 시간일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어떤 경우일지라도 진수는 왜 자기의 인생에 이런 일이 발생해야 했는지 원망스러웠다. 아무튼 그래도 현아에게만큼은 주혁으로 남고 싶었다. 이곳에 온 지 팔 개월이 다 되어가는 시간을 함께 지내다 보니, 자신이 진수든 주혁이든 여부는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현아를 사랑하는 마음이 새록새록 솟아나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런 감정을 과연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진수도 장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알고 지냈던 그 어느 여자보다도 현아는 진수의 마음속 깊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아니, 정말 자신이 주혁이었던 것만 같았다.
집에 도착하니, 진수는 쌓였던 긴장이 풀어지면서 몸에서 기운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아마 앞으로도 주혁과 알던 사람들을 만나고 돌아오면 항상 이럴 것만 같았다. 물론 갈수록 점점 익숙해지겠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주혁 흉내가 먹혀들지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항상 긴장의 끈을 놓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현아도 주혁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평소에는 조금이라도 주혁이 불안한 기색을 보이면 습관처럼 주혁을 침대로 데리고 가곤 했다. 현아는 주혁의 몸이 기억하는 주혁의 기억을 되살려서 주혁에게 안정을 주려고 했고, 진수도 현아와 함께 있을 때만큼은 완벽한 주혁이 되었다. 심지어는 기억을 잠시 잃은 적조차 없는 주혁 그 자체였다. 어떻게 보면, 자기가 진수였다는 주혁의 말이 진실이었고 결혼하지 않았다는 말도 사실이라면, 주혁이 아닌 진수는 그렇게 시도 때도 없이 침대로 이끄는 현아를 부담스럽게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현아가 침대로 이끌 때마다 진수는 망설이거나 거부한 적이 없었다. 그런 것을 보면 현아에게 진수는 섹스할 때만큼은 완벽한 주혁이었다. 현아는 그 정도로 주혁과의 육체관계에 집착했다. 그렇게 둘은 계속하여 이전의 기억을 끌어내고 있었다.
라이터를 들고나갔던 현아는 잠시 초조한 기분이 되었다. 만일 주혁이 서재에서 라이터가 없어진 것을 알게 되면, 어떤 식으로 나올지가 궁금했다. 어차피 집에는 둘 뿐이므로 당연히 자신에게 물어볼 것이다. 그때 과연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그냥 모른다고 하는 것도 사실 말은 안 된다. 그렇다고 솔직하게 말할 수도 없고 아무튼 일단 일을 저지르기는 했지만, 속으로는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그저 아무런 대책은 없었지만, 주혁이 라이터가 없어진 사실을 조금이라도 늦게 눈치채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다행스럽게 오늘은 주혁이 서재로 들어가지 않고 안방 욕실로 먼저 들어갔다. 피곤했는지 쉬려는 것 같았다. 나중에는 어떻게 되더라도 지금은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현아도 안방으로 따라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거실로 나왔다.
욕실 샤워 꼭지 아래에서 쏟아지는 물을 맞으며 진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라이터의 비밀을 알게 되면, 그래서 다시 이전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아마 현아에게는 아무런 말도 없이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것일까? 그렇다면, 아침에 자기 방에 들어왔다가 아들이 사라진 사실을 확인하고 망연자실했을 부모님의 처지와 다를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고 해도, 그렇게 가는 것이 올바른 일일까? 그리고 찾아낸 방법이 효력이 있는 방법인지는 시험해 보아야 확인할 수 있을 텐데, 그렇게 시험을 하겠다고 불쑥 일을 저질렀다가는 순식간에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놓이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섰다. 그러다가도 진수 자신이 이전으로 돌아간다면, 그 순간 지금의 이 육체만 주혁인 자신이 다시 온전한 주혁으로 돌아가는 것일까? 그리고 그 주혁은 진수가 주혁이었던 동안의 일을 모두 기억하게 될까? 그런 의문도 들었다. 그렇다 보니 막상 돌아갈 기회를 잡았다고 해도, 이곳 생활을 단칼에 무 자르듯 미련 없이 자르고 갈 수 있다고는 진수도 장담할 수 없었다. 혼란스러운 마음이야 진수도 이해하지만, 라이터를 통해서 이전으로 되돌아갈 방법을 찾아내는 일과는 별개로, 현아와의 인생에 대해서도 깊이 고민해야 할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때 욕실 문이 열리면서 옷을 벗은 현아가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