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의 끝_1
가만히 생각해 보면 한 사람의 일생은 정말 정해진 것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진수가 주혁이 되고, 회사원이 작가가 되고, 이제 또 앞으로 남은 인생이 어떻게 펼쳐질 것인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지 않은가? 이렇게 하루하루가 예측 불가의 삶을 사는 것도, 결코 안 좋은 삶은 아닌 것 같았다. 매일 아침에 눈을 뜨면 시작되는 하루에 기대를 품는 것도 즐겁고 재미있는 일이다. 진수를 이런 생의 한가운데에 던진 라이터에 대한 증오는 이미 진수 자신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봄날 눈 녹듯 사라져서 흔적도 남지 않게 되었고, 상황이 그렇다 보니 진수도 서재에 있는 라이터에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지가 벌써 몇 달째인지 몰랐다. 그리고 진수가 그렇게 생활하다 보니 현아의 불안감도 점차 가라앉아서, 이제는 아주 평범한 보통의 부부가 되었다. 진수는 자기에게 다가온 이런 삶이 자기에게는 축복이며 기쁨이었듯, 현아에게도 똑같은 기쁨을 안겨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둘이 영원히 함께 살고 싶었다.
주혁의 품에 안긴 현아는 지난 일 년을 돌아보며 많은 생각을 떠올렸다. 아침에 기억 읽은 주혁을 데리러 갔던 일부터 시작해서 이번 출간에 이르기까지 정말 많은 일을 겪었다. 처음 주혁이 기억을 잠시 잃은 것 같다고 생각했을 때만 해도 이렇게까지 자기 인생에 있어서 많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지금은 오히려 이런 생활을 즐기고 있지 않은가? 지금 자신을 꼭 안고 있는 이 남자가 주혁이 아닌 진수라 하더라도 지난 일 년의 생활을 돌이키고 싶지는 않았다. 이 남자가 자기에게 온 이유가 있듯이, 자기도 이 남자와 이렇게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을 것만 같았다. 확실히 정신이 온전한, 그리고 자기가 십일 년을 함께 지냈던 주혁과 살던 시기와 비교해도 지금의 삶이 결코 안타깝고 아쉬운 삶은 아니었다. 오히려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은 또 이 남자와 어떤 일을 하게 될지 하는 궁금증과 기대감을 동시에 느낄 때도 많았다. 이제는 어떤 삶이 자기 앞에 기다리든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주혁이 진수라고 우기면서 매일 라이터만 바라보고 산다고 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런 것들이 진수의 말처럼 라이터의 의지에 달린 일이기 때문이었다. 현아 자신은 물론, 진수까지도 그들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지 않은가? 그저 지금 진수가 주혁이고, 주혁이 진수인 상태로라도 행복하게 잘 살 수만 있다면 앞으로는 쓸데없이 라이터에 신경을 쓰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주혁의 소설은 책으로 출간되었고, 의외로 다양한 찬사를 들으며 판매량이 치솟기 시작했다. 이 정도까지는 진수나 현아도 기대하지 않았는데,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를 동경하듯 수많은 웹소설과 장르문학 작품들이 유행하는 가운데, 순수 로맨스 소설 경향의 작품이 독자의 시선을 끌었다는 증거였다. 주위에서 전화로 축하한다는 말도 많이 들었다. 멀리 계시는 부모님도 출간 소식을 듣고 전화로 축하해 주셨다. 물론 현아가 먼저 전화를 받아서 부모님과 통화하고 나서 나중에 진수를 바꿔주었기 때문에, 부모님은 진수가 주혁 행세를 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눈치채지 못하고 계셨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진수는 갈수록 믿지 못할 일이 전개되는 것을 보면서, 과연 라이터가 무슨 의도로 수많은 사람 중에 주혁의 몸에 자신을 넣어 놓았는지 궁금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과연 언제까지 이렇게 주혁으로 살 수 있는 것인 지의 여부였다. 이러다가 갑자기 이전의 생활로 돌아가기라도 한다면, 그때는 정말 현실에 적응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평범한 회사원에서 이름난 작가의 모습으로 변모한 일련의 사건들이 어쩌면 이미 자기 인생에서 계획된 부분일지도 모른다는 혼란이 종종 머리를 아프게 했다. 그때마다 현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진수 곁에 있어 주었다. 이제 주혁이니 진수니 하는 문제는 현아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냥 보이는 대로, 느끼는 대로, 마음이 가는 대로 행동할 뿐이었고, 어느새 라이터와 관련된 기억도 현아의 뇌리에서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진수는 그저 현아 곁에 있는 유일한 남자일 뿐이었다. 예상보다 더한 독자의 반응에 고무된 김 대표는 주혁과 독자가 만나 이야기도 나누고 그럴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하겠다고 했다. 추리 소설 작가였던 사람이 로맨스 소설을 쓴다는 사실은 확실히 이야깃거리가 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주혁은 언제든지 좋으니 김 대표가 알아서 추진하되, 최종적으로는 사전에 일정을 조율하기로 했다. 이야기를 들은 현아도 기쁘게 생각했다. 처음 소설이 대성공이었을 때까지도, 그런 독자와의 만남과 같은 이벤트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제야말로 작가로서 주혁의 인지도도 한 단계 올라서고 있었다.
출간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한 달 정도 지난 것 같았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현아와 같이 소파에 앉아서 쉬고 있을 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태준이었다. 진수가 전화기를 현아에게 보여주자, 현아가 말했다. “이제 네가 받아 볼래? 태준이 누구인지 알잖아. 별 이야기 없을 거야. 어차피 앞으로도 계속 볼 친구니까 네가 알아서 통화해.” 현아가 볼 때, 이제 진수가 태준을 비롯한 주혁 주위의 사람들과 접촉한다고 해도 별로 큰 실수나 오해가 일어나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진수가 전화를 받았다.
“나다. 태준이. 잘 지냈어?” “어, 그래 오랜만이다. 넌 어때? 잘 지내고 있지? 제수씨도.” 진수는 태연하게 주혁의 흉내를 내고 있었다. “그렇지 뭐. 현아도 잘 지내지?” “야. 현아가 뭐냐? 형수님이지. 하하하.” 이런 말투 역시 평소 주혁의 말투였고, 현아가 주도면밀하게 심어 놓은 주혁의 기억 덕분에 진수의 입에서도 어느새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었다. “아, 진짜 이 자식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 너랑 결혼하기 전부터 친구였는데 무슨 형수냐? 한다는 소리 하고는. 아무튼 실없는 이야기 그만하고. 너희 이번 토요일에 시간 좀 되냐?” “왜? 무슨 일 있어?” “얘들이 너희 좀 보잔다. 아무리 작가님께서 집필하시느라 두문불출이라고 하지만, 너무 비싸게 굴지 말란다. 얼굴 좀 보자면서 말이지. 이번 출간작도 평이 좋다는데 말이야. 하하하.” “토요일? 글쎄, 현아한테 한번 물어보고.” 옆에서 통화 내용을 듣고 있던 현아가 손으로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아, 그래. 별일 없다고 그러네. 그럼, 그날 현아랑 같이 나갈게. 오랜만에 얼굴들이나 보자.” “알았어. 그럼, 얘들에게도 이야기해 둔다. 알았지?” “그래, 나중에 약속 시간이랑 장소는 문자로 보내라. 참, 얘들 많이 온대냐?” “그래, 얘들이랑 정해지면 문자 보낼게. 얘들은 많아야 대여섯 일 거야. 거기에 너랑 현아까지 나오면, 그래봐야 한 열 명도 안 될 거야. 아무튼 나중에 보자.” “그래, 나중에 봐.”
전화를 끊고 나니 옆에서 현아가 물었다. “왜? 언제 만나재?” “응, 애들 뭐 한 대여섯 명 정도 보자고 그러네? 우리는 같이 나오란다.” “나도 나오래? 얘들도 마누라 동반인가?” “몰라 그 이야기는 안 했어. 하지만 뭐 아무려면 어때? 너는 다른 얘들 마누라랑은 다르잖아. 우리 동창이고 말이야. 안 그래? 그냥 동창회라고 해도 너는 나가야 할 텐데.” “하긴 그렇지 뭐. 오랜만에 얘들 얼굴 좀 보겠네?” 사실 남자끼리만 보자고 해도 현아는 진수와 함께 나가려고 생각했다. 혹시라도 진수가 주혁의 친구들을 만난 자리에서 무슨 착오라도 생길지 모르니까 자기가 함께 가서 지켜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은 진수도 어디든지 혼자 다니기를 꺼렸지만, 현아도 진수를 혼자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솔직히 진수를 혼자 보내기에는 약간 불안하기도 했지만, 언제부터인지 혼자 외출했다가는 주혁이 기억을 잃었을 때처럼 혹시라도 갑자기 주혁이 진수가 되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쓸데없는 걱정이 현아를 불안하게 하곤 했기 때문이었다. 그럴 때마다 항상 함께 집 안에 있을 때라도 방마다 주혁을 따라다니며 얼굴을 보아야 안심이 되었다. 그런 모습이 지난 일 년의 시간을 보내고 난 현아에게 생긴 새로운 습관이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났다.
잠에서 깨어난 진수는 손을 뻗어서 울리고 있는 휴대전화를 당겨서 화면을 바라보았다. 태준의 메시지였다. 아마 친구들 모임 장소가 결정된 모양이었다. 옆에 누워 있는 현아가 진수의 얼굴 가까이 자기 얼굴을 들이대며 물었다. “왜? 장소 정했대?” “응, 7월 20일이 이번 주말이 맞지? 우리 가끔 만났던 그 집에서 저녁 여섯 시에 만나잔다.” “나도 같이 가는 거 확실하지?” “당연하지. 먼저 통화할 때 너도 같이 갈 거라고 했잖아. 왜? 너 무슨 일 생겼어?” 현아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말했다. “아냐. 일이 하나 생기기는 했는데, 그냥 취소하거나 미루어도 되는 일이야. 그러니까 같이 나가자. 너 혼자 보내면 내가 불안해서 다른 일을 보겠니? 내가 곁에 있어야지. 그래야 네가 술도 덜 마시고 그러지 않겠어?” “알았어. 그러면 너랑 함께 참석한다고 회신해 둔다?” “응. 그래.” 진수는 간단하게 “오케이. 현아랑 같이 참석한다.”라고 회신을 보낸 후, 휴대전화를 머리 위로 던져놓고는 몸을 돌려서 현아를 끌어당겨 꼭 안았다. 진수는 하루 중 아침에 침대에서 눈을 뜨는 이 시간을 가장 좋아했다. 그건 현아도 그랬다. 지난 수개월 동안 현아에게 들어서 얼굴은 많이 익혀 두었지만, 아무래도 실제 얼굴을 마주하고 만나면 친구들 사이에 어떤 반응이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그저 평범한 친구들 사이의 대화 화제라면 즉흥적으로 대응해도 되는 경우가 많겠지만, 무엇 하나에 꽂힌 친구가 이상한 이야기를 화제로 끌어내거나 하면, 역시 현아의 도움이 없으면 자연스럽게 넘기기 어려울 것이다. 생각해 보면, 그래서 현아와 동행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책을 출간한 후부터 오늘까지 한 달 정도의 시간은 진수에게 있어서 지금까지 살아온 이십육 년의 세월과는 전혀 다른 시간이었다. 물론 현아를 만난 사실도 그렇지만, 생각지도 못했던 작가로서의 인생을 살아가게 될 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는데, 모두가 라이터 덕분이었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진수 자신만 지금의 시간대에서 살고 싶을 경우, 언제까지나 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진수의 의지에 달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라이터의 의지, 혹은 라이터의 의도에 따라 살아가게 되는 것이 라이터를 손에 쥔 사람의 운명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어쩌다 한 번씩 간간이 떠오르는 불안감의 근원이 무엇인지 그동안 궁금했는데, 바로 라이터였다. 진수는 곰곰이 꿈속의 남자가 한 말을 생각해 보았다. 라이터가 스스로 떠난다는 말은 라이터에 발이라도 달려서 진수로부터 떠난다는 그런 단순한 말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혹시 이전의 자기처럼 진수에게 담뱃불을 빌리려는 사람이 나타났을 때, 진수의 손에서 그 사람의 손으로 옮겨가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어떤 순간에 어떤 장소에서든 어떤 사람이 진수에게 담뱃불을 빌리러 나타난다는 것은 진수의 의지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지 않은가? 그런 상황을 라이터가 스스로 떠난다고 표현했을까?
그렇다면 또 한 가지 궁금한 점이 떠올랐다. 만일 라이터를 갖고 있는 사람이 라이터를 어디에라도 버린다든지 하면, 그것으로 라이터의 술수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어차피 버렸는데, 발도 없는 라이터가 다시 진수에게 돌아올 리는 없지 않은가. 그렇게 라이터에서 벗어나면, 그 이후로는 진수 자신의 의지 대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왜 자기는 지금까지 라이터를 버릴 생각을 하지 못했는지 몰랐다. 그렇게 간단한 방법이 있는데 말이다. 진수는 한 번 시험해 보고 싶었다. 물론 그렇게 일을 저지르기 이전에 확실히 해둬야 할 일이 있었다. 그 일은 바로 자기가 영원히 이전으로 되돌아가지 않아도 과연 남은 인생 내내 후회 없이 살 자신이 있느냐는 거였다. 라이터에서 벗어날 확실한 방법을 찾았다고 해도 그 점이 항상 최후의 고민거리였다. 다른 주변의 사람들과 헤어지는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어차피 넓지 않은 인간관계였으므로 아무 상관은 없는데, 부모님이 문제였다. 그렇게 되면 영영 뵙지 못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진수가 돌아갈 방법을 찾는 데 열심이었냐 하면, 솔직히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런 사실을 보면 진수도 지금 마음이 반반인 것 같았다.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절반에, 현아와 살고 싶은 마음이 나머지 절반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시간이 갈수록 현아와 살고 싶은 쪽으로 마음이 기우는 것을 진수 자신도 어찌하지 못하고 있었다. 더구나 현아는 이제 거의 자기가 주혁임을 의심치 않는다. 설혹 진수인 것처럼 보이는 행동을 한다고 해도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진수와 주혁을 동시에 인정하고 있는 것 같았기에 진수의 마음이 더욱 흔들렸던 것이므로, 라이터를 버리는 문제는 오롯이 진수의 결심에 따를 일이었다.
며칠 뒤, 진수는 현아가 모르게 라이터를 종량제 쓰레기봉투에 깊이 넣어서 집 밖에 내다 버렸다. 아무래도 현아를 떠나서는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부모님 생각을 하면 차마 못 할 일이지만, 자기가 실종된 후로 벌써 일 년도 훨씬 지난 지금에 와서 다시 돌아간들 그 시간대에 적응할 자신이 없었다. 다행스럽게 부모님 곁에는 동생이 있으므로, 세월이 흐르다 보면 자기에 대한 마음이 아물 것으로 믿었다. 그렇게 라이터를 버리고 나니 나중이야 어떻게 되든, 일단은 속이 후련했다. 항상 보이지 않는 끈에 묶여서 무엇엔가 조종당하고 있는 것처럼 느꼈던 느낌을 떨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지금까지 보다 더욱 주혁의 삶에 충실해야 하겠다는 각오도 솟았다. 더 이상 돌아갈 길이 없지 않은가? 이제 앞으로만 나아갈 뿐이다.
진수가 서재를 나오면서 현아를 불렀다. “현아야, 어디에 있어?” “나, 안방에 있어. 왜?” 안방에 잠시 누웠던 현아는 진수가 부르는 소리에 그냥 침대에 누운 채 얼굴만 빼꼼 내밀며 대답했다. “특별 과외 해야지.” “아, 뭔 과외?” “아니 토요일에 얘들 만나기로 했잖아. 걔들은 실제로 대면하는 것이 이번이 처음인데, 나에게 좀 미리 해줄 이야기 없어?” 주혁으로 열심히 살아가기로 하고 라이터를 버린 진수가 가장 먼저 생각한 일은 바로 친구 모임이었다. 현아 가족과는 이제 큰 문제는 없을 것 같고, 그다음이 바로 이번에 만나게 될 친구들이었기 때문이다. 현아의 말에 의하면 부모님과는 통화만 할 뿐 거의 찾아뵙지 않고 지내왔기 때문에 직접 뵙더라도 별다른 문제는 없을 것으로 믿었다. 주혁이 대학 시절 자취할 때부터 솔직히 부모님 얼굴을 본 적이 몇 번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부모님께서 가끔 집에 들르라고 말은 하셨다는데, 자취할 때도 그랬지만 결혼하고는 거의 찾아뵙지 못했다고 했다. 이제 본격적인 겨울이 오기 전에 한 번 뵈러 갈 생각이었지만, 지금은 일단 친구들과의 만남이 더 중요했다.
현아가 일어나 서재에 가서 친구들 사진이 있는 앨범을 하나 골라 왔다. 둘은 침대 위에 엎드려서 앨범을 보면서 친구들 이야기를 했다. 거의 속성 과외였지만, 이미 주혁으로 각성한 진수에게는 기억에 담기 쉬운 이야기들이었다. 그저 만일의 경우 과외수업 내용 중에는 없던 이야기가 나오면, 그것은 현아가 알아서 적당히 둘러대기로 입을 맞추고 과외를 끝냈다. 이제 남은 것은 실전뿐이었다. 하지만 진수는 걱정하지 않았다.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친구들과의 모임도 순조롭게 잘 넘어갈 것으로 확신했다. 옆에 현아가 있지 않은가? 그냥 현아만 옆에 있으면, 주혁으로서의 진수 인생에는 아무런 거칠 것이 없을 것이다. 앨범을 들고 서재로 돌아온 진수는 앨범을 원래의 자리에 꽂아 놓고 나가려다가 잠시 라이터가 있던 자리를 돌아보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었는데, 역시 라이터는 보이지 않았다. 확실히 내버린 것이다. 진수는 서재 문을 닫고 거실로 나왔다.
술집 문을 열고 들어서니 안쪽 테이블에 앉아 있던 친구들이 둘을 반겼다. 진수야 당연히 처음 보는 친구들이었지만, 그들에게는 아주 오랜만에 보는 주혁과 현아였다. 주혁이 결혼 직후, 첫 소설을 출간하고 잠깐 얼굴을 본 적이 있으니까, 아마 이 년도 훨씬 넘게 얼굴을 못 보았던 것 같았다. 진수는 자연스럽게 현아의 어깨를 감싸고 들어와서 자리에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