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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이흔 Oct 09. 2024

갈증

이렇게 가면 결국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가는 거네? 


그는 혼자 중얼거리며 앞에 놓인 술잔을 만지작거렸다. 눈앞에는 짙은 어둠만이 조용히 그의 눈을 응시하며 도사리고 있었고, 길을 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간이 늦은 탓도 있겠지만, 원래부터 이 지역은 늦은 시간에 배회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듯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가 장소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고른 것 같았다. 이런 곳이라야 그나마 그의 행적을 감추고 다른 사람들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고, 그가 다녀간 그 어떤 흔적이라도 남기지 않을 것이다. 하긴 흔적을 남긴다는 말도 그에게는 별다른 의미가 없다. 그가 흔적을 남겨도, 그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그렇듯 인생에 있어 성공의 척도는 돈이다. 돈을 많이 벌어서 부유한 생활을 누린다면, 그것이 곧 행복이라고 믿는 사람들 부류에 그도 속해 있었지만, 인생의 절반도 넘게 지난 지금에 와서는 그것이 잘못된 기준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돈을 버는 행위 이외의 일상에는 거의 마음을 두지 않고 살았고, 만나도 돈이 안 되는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멀리하는 사이, 돌아보니 어느새 그 혼자만 외딴 콘크리트 숲 속 어딘가에 던져졌다. 곁에는 아무도 없었고, 사랑하는 가족이라고 믿고 싶었던 몇 명의 사람들도 이제는 그에게 관심조차 주질 않았다. 물론 그에게는 행복의 척도였던 그 많은 돈은 이미 그들의 손에 넘어간 지 한참 되었다는 사실도 이즈음에 알게 되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런 데다가 그들은 이제 그에게는 마지막 남은 목숨까지 원한다. 물론 그에게 직접적인 위해를 가하거나, 혹은 사람을 청부해서 가족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상황으로 그를 몰지도 않았지만, 그는 그들의 강압적 요구를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스스로 행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은 분명 그들이 그의 앞에 던져 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그가 험한 사회생활을 거치며 길러 온 그의 직감은 그렇게 말하고 있다. 더욱 안타까운 점은 그의 직감이 틀린 적은 거의 없다는 사실이며, 그 사실이 그를 더욱 슬프고 외롭게 만든다는 것이다.  

   

솔직히 아까울 것 없는 육신이다. 어차피 지금까지 많이 부려 먹었기 때문에, 이제 포기한다고 한들 그 포기의 대가가 육신의 유지에 대한 대가에 비하여 생각보다 몇 배는 크다는 사실이 그를 슬프게 할 뿐이다. 인생과 행복의 척도가 돈이었던 것처럼, 남은 육신의 존재가치에도 척도는 역시 돈이다. 아마 이 콘크리트 숲에서 발바닥이 까지고 손바닥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버텨서 얻을 수 있는 가치보다는 그냥 포기의 대가로 얻어지는 가치가 상상할 수 없는 정도로 클 것이다. 그리고 그 대가는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그의 손에는 쥐어지지도 않고 그들이라 불리는 사람들의 손에 들어갈 것이다. 그에게 남은 마지막 자산까지 팔아치우는 셈이다. 인생 폐업이라고나 할까? 지금 그 폐업신고서를 바로 눈앞에 놓고 있다. 그리고 그 신고서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고도 곧 처리될 것이다. 

    

술잔에 담긴 술이 유난히도 맑다고 느꼈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그의 혼탁하고 어두웠던 인생에도 이렇게 맑은 시기가 있었는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흔히 무색이라고 한다. 무색을 바라보면 무념무상의 경지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 같다. 그 무색의 술을 목으로 넘기기만 하면, 그렇게 될 것이다. 목이 타는 듯한 갈증이 몰려온다. 그저 몇 잔의 술로는 달랠 수도 없는 갈증이다. 갈증은 아직도 그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 해주는 신의 선물일지도 모르지만, 결코 받고 싶지 않은 선물이기도 하다. 술잔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응시하던 그는 천천히 술잔을 들어 입에 대더니, 담긴 술로 목을 태우던 갈증을 밀어 넣는다. 


술잔을 비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때까지 그를 노려보던 어둠 속으로 끌려 들어가기라도 하는 듯 사라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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