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즉 이렇게 쓸 걸 그랬다.
아, 정말 인내심 테스트도 아니고, 이게 뭔 지랄인지 모르겠네. 매번 낙선을 거듭하는 공모전에 꾸준히 응모해 보지만, 내가 안 보는 곳에서 누군가가 저주의 주문을 읊는 것처럼 항상 아슬아슬하게 낙선을 거듭해 왔다. 역시 소설가의 길은 험난한 것 같아. 그래도 무슨 수가 있기는 할 텐데, 심사위원이라는 작자들 뇌 구조를 한 번 해부에서 살펴보고 싶다는 충동이 울컥 일었다. 그들에게 당선작이 될 만한 작품성이란 과연 무엇일까? 흔히 낙선을 거듭하는 작가의 유일한 변명이나 핑계는 자기 작품이 심사위원의 취향에 어울리지 않았을 뿐이지 문학적 작품성이 떨어지지는 않았으리라는 아전인수격 해석뿐이다. 그리고 그 원칙은 나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되었다.
처음 소설을 쓰면서 기대를 많이 했었다. 신춘문예나 메이저급 공모전에 당선되어 작품이 책으로 출간되면서 오프라인 서점 매대에도 깔리고, 점점 인지도도 높아지면 작가로서의 위상도 높아질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다. 그렇지만 번번이 기대는 빗나가기 일쑤였고, 낙방 횟수가 많아짐에 반비례해서 자존감은 낮아지고 당선의 희망도 형체 없이 희미해져만 갔다. 이런 모습이 내가 상상했던 작가의 모습인가 하는 자괴감마저 들 정도에 이르자, 뭔가 돌파구를 마련해 보고 그래도 안 되면 작가로서의 인생을 정리하는 편이 앞으로 남은 내 인생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어 따라오는 비참함은 그저 덤이었다.
도대체 당선작들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기 시작한 때가 바로 그즈음이었다. 내가 생각해도 어이없는 착상이지만, 더구나 문학 작품에 무슨 수학 문제처럼 딱 떨어지는 정답이 있을 리 없다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마지막으로 기대보고 싶었다. 기왕 마음먹은 김에 최근의 각종 공모전 수상작에 대한 나름의 철저한 분석에 돌입했다. 아무리 심사위원의 취향이니, 공모전 주최 측이 선호하는 작품의 결이 존재한다고 해도, 나의 철저한 분석의 틀을 빠져나갈 수 없으리라고 확신했다. 그렇게 분석해서 소설을 구상해 보면 뭔가 해답이 나오리라는 확신도 있었다. 사실 문학 작품을 그런 식으로 분석하려는 생각부터가 틀려먹었다는 죄의식은 있었지만, 그래도 내가 지금까지 투자한 시간을 헛되게 할 수 없었기에 모아 놓은 작품들을 읽고 분석에 돌입했다 이 분석만 성공하면, 나도 머지않아 제대로 된 공모전 당선자의 지위와 영예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수단이 치졸하면 어떤가? 일단 당선되고 난 후에 내가 정말 쓰고 싶은 소설을 쓰면 될 것이다. 지명도가 높아지면 출간작도 조금은 더 팔릴 것이고, 작가로서의 위상도 높아질 것 아닌가. 그렇게 될 것이라는 악마의 속삭임이 스물네 시간 종일 내 귓전에서 떠나지 않았다.
수집한 소설을 절반 정도 읽고 나니 눈앞에 뿌옇던 장막이 조금은 걷힌 것 같기도 했다. 확실히 당선작들의 주제나 소설 구조, 전개 방식 등 모두가 파격적이었다. 그에 반해 내 작품은 지극히 평범했다. 왜 나는 지금까지 이런 소설을 쓰지 못했을까? 다른 작가는 한마디로 독자의 눈치를 보지 않는 작품을 과감하게 썼다. 지금까지 내가 고수했던, 소설가든 시인이든 모든 문학가도 서비스업 종사자라는 나만의 철칙을 그들은 비웃듯이 깔끔하게 뭉개버렸다. 글을 쓰는 사람은 철저하게 글을 읽는 사람을 위한 양질의 문학 작품을 제공하는 서비스업 종사자이며, 그들이 작가로 불리게 된 것도 그들의 글을 사랑해 주는 독자에 의해서라는 나의 주장은 수많은 당선 작가에 의해 비참하리만치 찢겨나갔다. 그들이 독자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독자에 의한 작품 속 인물과 작가를 동일시하려는 경향 때문이었을 것이다. 보통 생각하기에 작가들 사이에서 불륜 소설을 쓴 작가는 분명히 불륜 경험이 있을 것이라든지, 동성애를 다룬 소설을 쓴 작가는 당연히 게이나 레즈비언이 분명하다든지 하는 독자의 섣부른 단정이 두려워서 그런 주제로 소설을 쓰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당선 작가들은 그런 소설도 거침없이 써재끼더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소설의 문체도 마찬가지다. 고상하고 순결한 문체는 소설의 당선과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여기에서도 그런 원칙은 똑같이 적용되었다. 소설 속 문체가 험하고 저속하다고 해서 작가가 저속한 사람일 것이라는 추측은 그들에게 아무런 망설임도 주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통속적인 잣대로 미루어 아주 점잖은 소설만 고집했기 때문에 공모전에서 잇단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만일 그런 느낌이 든 소설마저 탈락해서 그런 생각을 갖게 되었다면, 그것이야말로 오만의 대표적인 사고일 것이다. 내가 문학적으로 훌륭한 작품을 창작했음에도 심사위원들의 수준이 내 작품의 진가를 알아보기에 너무 부족해서 내 작품을 당선작으로 선정하지 못했을 거라는 착각에 가까운 오만한 자만심을 가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해 본다. 그 결과, 다행스럽게 나는 나 자신을 그 정도로 과대평가한 적은 없었다. 단지 하도 탈락을 거듭하다 보니 답답한 마음에 한 번 투덜대 본 정도로 받아들이면 된다. 그래서 당선작을 검토한 결과를 정리해서 출력한 후, 이번에는 반드시 걸출한 당선작을 배출하고야 말겠다는 각오로 서재 모니터 옆에 붙여 놓고 새로운 작품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작품의 소재는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소재의 특이성이냐? 아니면 인물의 특이성이냐? 물론 많은 당선작이 소재의 특이성을 택한 작품들이었으므로, 나도 그 방향에서 작품을 시작하는 것이 옳으리라 생각했지만, 의외로 평범한 소재에 등장하는 인물의 성격이나 심리 묘사에 대부분의 분량을 배분하는 소설도 쓰고 싶었다. 아울러 소재의 현실성 부분도 미리 설정해야 했다. 물론 약간 황당한 소재일 경우 판타지라는 훌륭한 가림막이 있기에 어느 정도는 그나마 우겨볼 수 있다. 그리고 혹시라도 경험담이냐고 묻는 독자에게는 사실과 상상의 경계에서 줄타기하는 중이라고 우기면 된다. 한마디로 소재의 제약은 거의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문제는 소설의 문체였다. 소설 속 인물들의 대화부터 시작해서 모든 상황 묘사에 이르기까지 지금까지는 내가 전혀 경험한 적도 없고, 상상해 본 적도 없는 표현으로 일관해야 하는데, 그 부분이 문제였다. 심하게 생각하다 보면 솔직히 무슨 정신병자의 세계를 주유하듯 남들은 알아듣지도 못할 말을 중얼거려야 할 텐데, 동시에 글 안에 무슨 심오한 정신세계를 그린 것처럼 그럴듯한 내용을 담아야 할 텐데, 도무지 어떻게 접근해야 좋을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일단 작품의 소재 부분부터 생각해 보기로 했다. 특이한 소재는 주로 경험에서 나온다. 그렇지 않다면, 타인의 경험을 전해 듣거나 혹은 실제 존재했던 사건이나 사고에서 영감을 받기도 한다. 결국 경험적 관점에서 찾지 못한다면, 일단 소재 채택이 불가능하다. 다음은 소재에 생명을 넣는 작업을 진행해야 한다. 이 단계에서는 나의 사고와 상상력을 철저히 무시하기로 했다. 평소의 나라면 절대 생각하지 않을 행동을 주인공에게 강요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통속적인 윤리성의 잣대는 필요하지 않았다. 아니, 차라리 그런 잣대를 대지 않는 편이 주인공의 행동에 제약을 없애는 방법인지도 모른다. 그런 잣대가 교묘하게 표현의 제한을 두기도 하니까. 소재가 로맨스일 경우 극단적인 근친 간의 사랑이라는 소재만 제외하면 된다. 간혹 등장시킬 성애 장면의 묘사는 거의 성인 소설급의 적나라한 표현을 늘어놓기로 한다. 어차피 포르노도 예술이라고 우기는 세상이 아닌가?
대략적인 소설의 얼개를 구성하고 나서 멀리 떨어져 바라보니 이건 글도 아니다. 소설의 전반을 아우르는 통일된 주제도 없고, 작가가 소설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전혀 짐작할 수 없었으며, 오직 의식의 흐름만을 강조한다는 그럴듯한 명제에만 충실한 글 덩어리가 되어 버렸다. 나 자신이 무슨 심리학자도 아니면서 말이다. 그런데, 또 다른 방향에서 바라보자니, 은근히 멋져 보이기도 했다. 뭔가 그럴듯한 작가적 세계관 같은 것이 있는 글처럼 보이기도 한다는 점이다. 아무리 다른 사람의 눈에는 예쁘게 보이지 않는 여자도, 한번 예쁘게 보기 시작하면 헤어나지 못하는 법이다. 글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이상하게 읽히더니, 자꾸 읽다 보니까 점점 좋게 느껴졌다. 아니, 그런 착각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드디어 공모전 당선 가능 작품을 쓴 것 같았고, 그렇게 완성한 작품을 공모전에 응모했다.
원래 공식적인 발표일 이전이라도 본심 진출작이나 당선 후보작의 작가에게는 전화가 간다고 들었기에, 발표일이 다가오면서 종일 휴대전화 화면만 바라보며 지냈다. 평소 같으면 피싱 전화나 텔레마케터 전화일지 몰라서 모르는 번호의 전화는 무조건 받지 않았는데, 어떤 번호든지 울리기만 하면 곧바로 받았다. 여보세요? 정 아무개 작가님 되시죠? 네. 그런데요? 드디어 걸려든 것 같았다. 내 전화로 작가님이라고 칭하면서 전화할 사람은 당연히 공모전 심사 관계자일 것이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그 전화는 공모전 당선 소식을 전하는 전화였고, 결국 나는 치밀한 기 당선작 분석의 효과를 보게 되었다. 아, 진즉 이렇게 작품을 썼어야 했는데 공연히 시간만 낭비한 셈이었지만, 그래도 늦게나마 공모전 당선자의 대열에 합류하게 된 것을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나를 또 한 번 놀라게 한 것은 심사위원의 심사평이었다. 응모한 많은 작품 중에서 보편적 인간의 잠재적 심리를 치밀하게 수면 위로 끌어냄으로써, 지금까지는 느낄 수 없었던 인간 내면의 솔직함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근래에 들어 보기 드문 역작이라는 평이 내 귀를 간지럽혔다. 꿈보다 해몽이라고 했듯이, 나는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부분을 심사위원들이 어떻게 기가 막히게 짚어냈는지 정말 신기할 정도였다. 아마 심사위원들은 작품의 질보다는 자신의 심사평에 더욱 신경을 쓰는 것처럼 보였다. 난해하고 난삽한 작품일수록 자신들의 작품 분석 능력을 발휘하기 좋은 작품으로 여기는 듯했고, 다행스럽게 내 작품이 그들에게 평론적 시각의 우월감을 즐길 기회를 제공한 것 같았다. 하긴 아무려면 어떤가. 어차피 그들은 내가 휘갈긴 작품 덕분에 심사위원으로서의 명성을 높일 수 있었을 것이고, 나는 그런 그들의 자만심에 편승해서 공모전 당선자의 지위를 누릴 수 있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 아닌가? 이럴 줄 알았다면 진즉에 이런 정신없는 소설을 쓸 걸 그랬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저 공연히 깊이 있고 심오한 작품을 쓴답시고 낭비했던 시간이 아까울 뿐이다.
그렇게 나도 유명 공모전의 당선자 행렬에 합류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