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자연을 사랑한 작가 오영수

빗속을 뚧고 달렸다.

by 정이흔

지난번 1박 2일의 문학관 나들이를 다녀오고 나서 새로운 재미를 붙였나 보다. 물론 서울에서 먼 거리에 있는 문학관들인지라 한 곳만 다녀와도 하루가 휙 지나는 까닭에 오고 가는 시간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기는 했다. 그래서 이번에도 지난번과 비슷한 거리를 돌아 한 번에 여러 곳의 문학관을 찾아볼 계획을 세웠고, 첫 번째로 향한 곳이 울산의 오영수문학관이었다.

어제까지 말짱했던 날씨가 우리가 출발하는 오늘 아침부터 빗줄기가 들썩거리는 날씨로 바뀌더니만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더욱 거센 빗발이 운전석 차창을 두드렸다. 시야는 조금 방해가 될 정도였지만 기분만은 더없이 좋았다. 내가 워낙 비를 좋아하는 이유도 있지만, 더운 날씨에 운전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오영수는 울주(울산)가 낳은 천재적인 작가라고 했다. 사실 나는 생전에 이백여 편이나 남겼다는 오영수의 소설을 제대로 읽은 적이 없다. 단지 어느 공모전 사이트에서 오영수 문학상 공고를 보고 알았을 뿐이다. 그냥 오영수라는 소설가가 있었구나, 했던 생각은 문학관에 도착하고 나서 민망스러울 정도로 오영수 작가에게 죄송스러운 마음으로 바뀌었다.

문학관은 화장산 숲 속의 나지막한 언덕 위에 있었다. 문학관이 있음을 알리는 입간판을 끼고 언덕을 오르는 길은 보행도와 차도가 잘 정돈되어 있어서 상쾌한 기분마저 들 정도였다. 조금 가파른 언덕을 올라가면 작은 주차 공간이 있고, 옆으로 돌아서 올라가면 문학관 바로 앞마당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우리도 그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혹시라도 이 글을 읽고 문학관을 찾는 사람이 있다면, 특히 우리처럼 나이가 있고 무릎이 성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꼭 차를 문학관 정문까지 올라가서 주차하기를 권하고 싶다.

차에서 내려 바라본 문학관은 작년에 개관한 문학관답게 아주 깨끗한 외관을 자랑하고 있었다. 우리가 방문한 날은 마침 오영수 선생(작가라는 호칭을 그곳 천막의 플래카드에 쓰여 있던 선생이라는 호칭으로 바꾸기로 했다.)의 46주기 추모행사 준비로 문학관 왼쪽에 커다란 야외 천막 설치가 한창이었다. 빗속에 치러질 행사 걱정이 잠깐 들었지만, 다행스럽게 일기예보에서는 내일(10일) 남해안부터 비가 그친다고 했으니, 행사에 큰 지장은 없을 것으로 생각하면서 문학관 안으로 들어섰다. 우산을 문밖 우산꽂이에 꽂고 들어서는 우리를 안내데스크에 있던 안내사가 활짝 웃는 얼굴로 반겨주셨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그분은 이곳에 다녀가셨다가 이곳이 너무 좋아서 정식으로 시험을 치르고 안내사로 채용되셨다고 했다.

내가 문학관 입구 정면에 세워진 오영수 선생의 흉상을 보고 있자니 안내사가 자연스럽게 다가와서 안내를 자청했다. 나와 아내는 고마운 마음으로 안내사의 뒤를 따랐다. 그런데 설명을 듣자마자 나는 낯익은 이름을 하나 더 발견했다. ‘오윤’, 그 이름은 나의 대학 시절에 들었던, 그리고 많은 민중 예술인들이 열광했던 그 ‘오윤’이었다. 오윤은 당시의 판화가 ‘이철수’와 함께 대학생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져 있었으며 그들의 영향으로 각 대학의 미술 서클이나 소위 운동권 학생 그룹에서 판화가 유행하기도 했는데, 실제로 내가 다녔던 대학의 미술 서클에도 판화를 공부하는 소모임이 있었을 정도였다. 그런 오윤의 이름을 그곳에서 보다니 믿어지지 않았지만 이내 그 이름을 문학관에서 볼 수 있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오윤은 판화가로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처음 시작은 조각가였고 입구의 흉상이 바로 오윤의 작품이라고 했다. 오영수 선생과 오윤이 부자지간이었다.

문학관은 이제 개관 초기인 만큼 아주 많은 자료가 있는 것은 아니었고, 전시 공간 기획도 아주 깔끔했다. 특별히 관람 동선을 고민할 필요도 없이 세 개로 나뉜 공간마다 그냥 중앙의 선 자리에서 한 번씩 돌아보면 다 볼 수 있을 정도였다. 본격적으로 전시장에 들어서면 오영수의 숨결이 깃든 기록물과 미디어로 보는 삶의 흔적을 관람할 수 있다, 그리고 앞으로 더 들어가면 오영수와 오윤 부자의 공간이다. 그곳에서 오랜만에 접하는 오윤의 작품을 볼 수 있었다. 마지막 공간은 오영수의 작품세계를 볼 수 있는 자료들이 있었다. 특히 영화화한 작품(갯마을)을 감상할 수 있었고, 역대 ‘오영수 문학상’ 수상작이 한쪽 벽을 장식하고 있었는데, 마지막에는 지금까지 다녔던 모든 문학관에서는 볼 수 없었던 전시물이 내 가슴을 울렸다. 데스마스크, 실제 오영수 사망 직후 아들 오윤에 의해 제작된 데스마스크 속의 눈을 감은 평온한 표정이 관람객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조각가 아들을 둔 작가다웠다.

전시관은 이층으로 이루어졌다. 계단을 오르며 보니 계단 벽에 다양한 자료 사진이 걸려 있었고, 이층에 오르니 그곳에 영상자료실 겸 세미나실과 많은 서적과 편히 앉아서 책을 읽을 수 있는 책상과 의자를 갖춘 독서실이 있었다. 독서실 창밖에 내리는 비를 바라보면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문학관을 돌아다니면서 가장 좋아했던 공간이었다. 그렇게 문학관 관람을 끝냈다.

오영수는 30여 년 동안 200여 편의 단편소설을 남겼다. 주로 서정적인 소설을 쓴 향토색 짙은 대표적 작가라고 했다. 후에 현대문학(지금 미래엔 빌딩에 있는 그 현대문학이다)을 창간하면서 초대 편집장을 맡기도 했는데, 오영수의 작품은 서민층 생활의 애환을 사실적 경험을 토대로 녹여내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고 했다. 특히 현대 사회에서 상실되어 가는 인간성 회복을 제시하면서 토속적 정취와 서정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했다. 김동리의 추천으로 ‘신천지’에 소설 ‘남이와 엿장수’를 발표하면서 소설가로서의 생을 시작했다.

문학관을 나오기 전에 나는 입구에서 오영수 선생의 작품집을 한 권 살 수 있는지 안내사에게 물어보려 했는데, 마침 안내사가 우리에게 선물을 주겠다고 했다. 나는 설마 했는데, 책을 두 권 꺼내서 보여주었다. 오영수 전집의 1권과 5권. 이 책을 그냥 줘도 되겠냐고 묻는 우리의 얼굴을 보더니, 문학관을 찾는 사람에게 한 권씩 증정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멀리서 왔으니(새벽부터 서울에서 빗길에 운전하고 왔다고 말했었다.) 특별히 한 권을 더 주겠다고 하면서 전집 10권을 한 권 더 꺼내주셨다. 문학관을 다니면서 처음 하는 경험이었다. 고마워 어쩔 줄 모르는 우리에게 비도 오는데 운전 조심해서 가라는 안내사의 말이 더욱 고맙고 정겹게 들렸다. 우리에게 다음 목적지가 있냐고 하길래 동리목월문학관에 갈 예정이라고 하자, 혹시 휴관 기간이지 않냐고 하면서 미리 전화를 걸어서 확인하고 가는 것이 좋겠다는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차에 올라 동리목월문학관에 전화를 걸었다. 다행스럽게 휴관은 아니라는 대답을 듣고 우리는 오영수문학관 언덕을 조심스럽게 내려왔다. 내려오는 길 초입의 커다란 나무 아래 벤치에 오영수 선생이 앉아서 우리를 보며 조심해서 가라고 이야기하고 계셨다. 비만 아니면 내려서 옆에 앉아 사진이라도 찍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기에 운전석 창을 내리고 아쉬운 마음에 사진만 몇 장 남겼다. 그렇게 오영수문학관을 나와 다음 목적지인 경주의 동리목월문학관으로 향했다. 이번 여행의 첫 번째 일정이 마무리되는 순간이었다. 비는 여전히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미리 써 본 『작가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