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송의 객주문학관을 찾아서
지난 나들이 때 통영 강구항의 숙소가 좁아서 불편했던 것에 비하여, 이번 숙소는 아주 만족스러웠다. 단, 경주의 모든 호텔이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지하 주차장이 없었던 까닭에 어제처럼 비가 내리는 날은 차를 내리고 타기 조금은 불편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아마 경주도 이탈리아의 로마처럼 땅을 파기만 하면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지하의 고대 유물이 훼손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아예 건축 허가를 내줄 때부터 지하를 깊이 파지 못하도록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제법 일리 있는 추측을 해 보았다.
아침은 호텔 방에서 우리가 집에서 갖고 온 과일과 파이, 커피로 간단하게 해결하고 일찍 호텔을 나섰다. 그렇게 일정대로 이동하다가 도로변에 적당한 식당이 보이면 그곳에서 아침 식사를 해결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차는 경주를 벗어나고 포항 시내로 접어들었지만, 생각처럼 적당한 식당을 발견할 수 없었기에 그냥 첫 번째 목적지인 지훈문학관까지 가기로 했다.
당진영덕고속도로 청송 IC를 나와 삼거리에서 좌회전을 기다리고 있는데 눈앞의 안내 조형물에 적힌 “객주문학관 10km”라는 글귀가 보였다. 10km라고? 그리 먼 길이 아니다. 더군다나 원래의 계획대로 지훈문학관으로 가는 방향이라니 더욱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어서 급히 내비게이션에 객주문학관을 쳤다. 예상대로 지훈문학관 가는 길에서 도중에 잠깐 옆으로 들어갔다가 나오면 되는 위치에 문학관이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예전에 객주문학관을 찾아볼 생각을 했을 때는 객주문학관 한 군데만 방문하려고 서울에서 먼 길을 내려와야 하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렸던 적이 있었다. 그렇게 생각지도 않게 첫 번째 목적지가 지훈문학관에서 졸지에 객주문학관으로 바뀌었다.
객주문학관은 생각보다 훨씬 멋진 문학관이었다. 우선 넓은 주차장과 건물 앞의 잘 가꾸어진 정원이 문학관을 찾는 관람객의 가슴을 시원하게 해 주었다. 아마 지금까지 돌아본 문학관 중에서 크기로만 보면 거의 최상위급이 아닌가 싶었다. 건물은 정면에 문학관이 있었고 그 우측에 연수관이라고 하는 건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연수관 1층에는 객주문학관 사무실과 문인협회 사무실이 있었고 2층과 3층은 연수실(객실)로 이루어져 있었다. 일단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문학관으로 향하면 정면에 등짐을 진 ‘부상’과 머리에 짐을 이은 의 ‘보상’ 조각이 관람객을 반긴다. 전시관의 좌측에는 청송민속관과 창작관이 있었다. 청송민속관에서는 세시 월령별 영농 일정에 맞추어 각종 농기구와 농민의 생활상을 볼 수 있었고, 창작관은 입주 문인의 창작 공간인 것 같았다.
문학관 주위를 돌아보고 나서 객주문학관 입구로 들어섰다. 문학관은 총 3층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관람 동선은 일단 3층에서 시작되었다. 엘리베이터가 있으므로 무릎이 불편한 관람객은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면 편하게 3층으로 올라갈 수 있다.
사실 나는 김주영 작가의 객주 전 편을 읽은 적은 없다. 물론 객주뿐 아니라 원래 분량이 긴 작품은 선호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다녔던 문학관의 작가가 쓴 작품 중 조정래의 ⸢아리랑⸥이나 김홍신의 ⸢대발해⸥와 같은 작품이 그랬다. 언제부터 그랬는지는 모른다. 그런 작품을 읽는 것에 표현할 수 없는 부담을 느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마치 기계 부품처럼 연결된 많은 서사와 대발해처럼 수백 명의 등장인물에 처음부터 기가 죽었는지도 모른다. 아마 ⸢객주⸥라는 작품을 접했어도 그랬을 것이다. 그렇지만 기왕 문학관을 찾았으니, 우선 전시물을 통해서라도 김주영이라는 작가에 가까이 가보고 싶었다.
3층은 김주영 작가실이다. 작가의 일생과 집필실 모형, 그리고 ⸢객주⸥ 집필을 위해 수집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자료 취재 노트와 카메라 그리고 직접 찍은 사진은 김주영에게 가장 소중한 자산이었다. 객주는 1979년부터 1984년까지 4년 9개월간 1,465회에 걸쳐 서울신문에 연재된 소설이다. 집필을 시작하기 전 5년 동안 전국의 200여 개 시골 장터를 모두 돌아다녔으며, 연재하는 5년 동안에는 집에 한 달에 열흘도 머무르지 못하고 노트를 가지고 다니며 현장에서 글을 썼다고 한다. 그 덕에 김주영은 “길 위의 작가”라는 호칭을 얻었다.
사실 김주영은 시를 쓰고 싶어 하는 문학도였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소설로 방향을 틀었다.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에 입학해 장학생으로 학교에 다니던 시절, 김주영은 직접 창작한 시 열 편을 당시 교수였던 박목월에게 보여주면서 읽어봐 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박목월은 시를 다 읽고 나서 김주영에게 말했다. “자네는 운문에 소질이 없는 것 같아.” 이 한마디 말이 김주영에게 계속 시를 쓸 용기를 빼앗아 버렸다고 한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또 그 한마디로 인해 김주영이 ⸢객주⸥라는 대작을 집필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렇게 김주영은 소설가로서의 길을 걷게 되었다.
2층으로 내려오면 전 층이 소설 객주실로 꾸며져 있다. 마치 소설 ⸢객주⸥ 속으로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소설 속의 주요 장면들을 재현한 조형물들을 볼 수 있고, ⸢객주⸥의 주인공 격인 보부상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산가지를 이용한 계산법이라든지 ‘보상’과 ‘부상’의 당시 사회 속에서의 모습과 생활상 등을 볼 수 있다. 객주실을 나오면 기획 전시를 주로 하는 ‘스페이스 객주’ 공간이 있는데, 지금은 선죽교, 을밀대, 금강산 절경 등 북한의 역사적 유적과 자연의 사진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마지막 1층은 도서관과 안내데스크, 수석 전시대, 창작관 입주 작가들의 저서 등이 진열된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렇게 간단히 돌아본 것으로는 김주영이라는 작가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는 없었다. 그저 ⸢작가는 오직 작품으로 말한다⸥는 김주영의 작가관을 겨우 엿볼 수 있었을 뿐이다. 객주문학관은 폐교된 진보 제일고 건물을 증‧개축한 건물로, 특정 인물이나 작품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고 보관, 전시하는 기본적 기능 이외에 지역사회의 문화와 예술환경 조성에 이바지하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청송 유일의 문학관이다.
작가로서의 김주영이 있게 한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해, 전시물을 통해 들려주는 작가의 말을 전하면서 문학관 나들이를 마친다.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이곳 산골마을에서 보고 듣는 것들은 언제나 변함이 없었으므로 내 일상은 따분하고 지루했다. 그래서 하루의 대부분을 낯선 풍경과 낯선 사람들을 구경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아다니는 데 소비했다. 바깥세상에 대한 그러한 호기심과 상상력은 오늘날 나를 구성하는 데 크나큰 영향력을 미쳤다. 산골마을에서 태어난 것은 그래서 행운이었다.”
그렇게 객주문학관 나들이를 마치고, 나는 다시 오던 길을 돌아 나가면서 원래의 계획대로 지훈문학관을 향해 차를 몰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