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맑게 갰던 하늘이 객주문학관을 나서니 다시 빗줄기를 뿌렸다. 아무래도 어제 내렸던 비가 남해안부터 그치기 시작한다더니, 우리가 올라오는 방향으로는 계속 비를 달고 달려야 할 것 같았다.
지훈문학관이 있는 곳은 주실마을이다. 주실마을이 있는 영양군은 경상북도 내에서도 해발이 가장 높은 곳이다. 주실마을은 풍수적으로 글이 마를 날이 없어 공부를 잘하는 학자가 많이 나온다고 한다. 특히 조지훈이 태어나고 자란 호은종택은 풍수적으로 길한 기운을 잘 갈무리하는 위치에 지어졌다고 하는데, 과연 그런 지기가 지훈이 뛰어난 시인으로 성장한 것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잠시 했다.
지훈문학관이 가까워질수록 비는 그칠 줄을 몰랐다. 내가 평소 비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운전에 신경이 많이 쓰였을 것 같기는 했다. 이윽고 저만치 앞에 주실마을이라고 쓰인 안내판이 보였다. 안내판을 따라 길에서 우회전하는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작은 내를 건너는 다리를 지나야 하는데, 그 다리가 너무 좁아서 맞은편에서 차가 다가오면 다리 앞에서 멈춰 기다렸다가 건너야 했다. 솔직히 마을 입구에서부터 약간 불편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다리를 건너니 마치 농로처럼 좁은 길이 계속 이어진다. 그 길을 지나면서 든 생각은, 다리도 새로 놓은 지 오래된 것 같지 않았는데 기왕 다리를 놓으려면 적어도 차량이 양방향으로 교행할 수 있을 정도의 넓이로 놓았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지훈문학관 앞마당에 도착했다. 입구에서 가까운 위치에 주차할 자리가 하나 남아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문학관은 입구에서부터 다른 문학관들과 비교가 되는 모습이었다. 일단 한옥의 외관과 구조를 그대로 살린 모습은 어딘가 모르게 경건하기도 하면서도 평온하고 안락한 느낌을 주었다. 입구 오른쪽 벽에는 때마침 진행되고 있던 제18회 조지훈예술제를 알리는 커다란 현수막이 걸려 있었고, 대문 위에는 특이하게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지훈문학관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한문 현판이 걸려 있었다. 입구 주차장 오른쪽에는 깎은 연필을 세워놓은 형상의 조각물이 설치된 photo spot과 어제 동리목월문학관에서도 보았던 느린 우체통이 설치되어 있었다. 밖에서 사진을 몇 장 찍고 대문 현관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은 특이하게 가운데 마당이 있는 “ㅁ”자 건물이었다. 입구에서부터 왼쪽으로 사무실과 화장실, 그리고 지금은 시인의 부인 김난희 여사의 작품이 전시된 시청각실이 있었고, 정면 중앙의 입구를 들어가서 오른쪽으로 돌다 보면 처음 들어온 현관 오른쪽 출구로 나오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나는 문학관에 와서야 조지훈 시인의 부인이 뛰어난 서화가라는 사실을 알았다. 마당 둘레에는 촘촘히 시화가 세워져 있었는데, 해설사가 없어서 설명을 듣지는 못했지만 아마 상설 전시작은 아닌 것처럼 보였고, 예술제 행사의 하나로 전시된 영양지역 문인의 작품 같았다.
전시실 입구를 들어서면 여느 문학관처럼 시인의 흉상이 관람객을 반긴다. 이어서 시인의 일생에 대한 간략한 안내가 있었다. 역시 몰랐던 사실은 한학자이던 시인의 할아버지 영향으로 일제의 교육에 반대하여 정규교육을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신 선대 가학(家學)을 이어 가문을 지키길 바랐던 뜻에 따라 마을의 월록서당에서 한학, 조선어, 역사 등의 과목을 수학했다고 한다. 그런 조지훈은 열한 살이 되던 해에 벌써 형과 <소년회>라는 단체를 조직하여 마을 소년을 중심으로 ⸢꽃탑⸥이라는 문집을 펴냈다.
조지훈은 일찍이 상경하여 시인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스무 살이 되던 해 정지용의 추천으로 문장 지에 작품을 발표하며 추천이 완료된다. 후에 박두진, 박목월과 함께 ⸢청록집⸥을 출간하면서 청록파 시인으로 불리게 된다. 사실 조지훈은 시인이기도 했지만, 학자이기도 했다. 조선어학회 큰사전 편찬에도 참여하고 한국학회 ⸢국어교본⸥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고려대학교 교수가 된 이후에는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초대 소장으로 취임하여 ⸢한국문화사대계⸥를 기획하고 ⸢한국민족운동사⸥를 집필하였다.
⸢승무⸥의 시인 문학관답게 전시실 벽면 곳곳이 승무 그림이 새겨있었고, 부인 김난희 여사의 조지훈 서화 작품도 걸려 있었다. 전시물 중에 나의 시선을 붙잡은 것은 조지훈의 초상화(?)였다. 연령대별 조지훈의 얼굴이 그려진 액자 맨 오른쪽에 색다른 필치로 그린 초상화가 있길래 자세히 들여다보고는 깜짝 놀랐다. 그 그림은 조지훈의 아들이 고등학교 시절 그린 것이라고 하는데, 그 그림에서 왜 어제 보고 온 아들 오윤 님이 제작한 오영수 선생의 흉상과 데스마스크가 떠올랐는지 모른다. 글을 쓰는 사람의 자녀는 문학적은 물론이겠지만 시각예술 부문의 자질까지 타고나는 것일까? 그런 자녀의 눈에 비친 아버지의 모습은 과연 어땠길래 그렇게 아버지의 생전 모습을 남기고 싶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전시물 중에는 조지훈의 문학 세계와 별도로 학문 연구의 시기를 일제 강점의 시대인 제1기, 그리고 해방 이후부터 고려대학교 국문학과 교수 부임 직전의 제2기, 마지막으로 고려대학교 교수로 부임한 후 임종까지의 제3기로 나누어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그 외에도 여러 자료에서 지훈의 역사의식이 담긴 시 세계에 대한 자세한 설명도 곁들여 있었으며, 특히 1950년대 말기 정치적, 사회적 혼란과 부정부패, 자유당의 반민주주의적 모습과 친일파들의 반성 없는 정치 참여 등, 신념이나 지조 없는 시대 상황을 조지훈은 ⸢지조론⸥을 통해 냉정하게 비판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조지훈이 살았던 시대와 지금의 시대는 수십 년의 간격이 존재하고 있음에도 어쩌면 그렇게 사회 혼란의 시기라는 측면에서는 한 톨의 차이도 없는지 정말 알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시실을 돌아보고 나와서 밖에 설치된 행사용 천막들을 돌아보았다. 행사는 거의 끝났는지라 대부분 천막에는 진행 요원들이 철수하고 없었다. 하긴 행사 끝물이고 비바람도 세찬 일기에 사람들이 일찌감치 철수했다고 해서 이상한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단지 승무관이라는 건물 안에만 사람들이 모여 있길래 물어보았더니 백일장을 포함하여 행사에 참여한 사람들에 대한 시상식을 하는 중이라고 했다. 행사장을 마지막으로 아내와 나는 다시 차에 올라 청량산 도립공원 길을 지나 이육사문학관으로 향했다. 이육사문학관은 오늘의 세 번째 문학관이자 지금까지 찾은 문학관으로는 서른 번째 문학관이다. 아마 다음 달 정도면 일차적으로 계획한 문학관은 모두 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조지훈이 시인의 삶을 걷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던 시를 한 편 소개하겠다. 조지훈은 이 시로 정지용의 추천을 받아 문장 지에 시를 실음으로써 첫 번째 추천을 완료한다. 그 후 ⸢승무⸥와 ⸢봉황수⸥가 추천되면서 총 3회의 추천을 완료하게 된다. 그 첫 번째 시가 바로 아래의 ⸢고풍의상⸥이다.
고풍의상
하늘로 날을듯이 길게 뽑은 부연끝 풍경이 운다
처마끝 곱게 놀이운 주렴에 반월(半月)이 숨어
아른 아른 봄밤이 두견이 소리처럼 깊어가는 밤
곱아라 고아라 진정 아름다운지고
파르란 구슬빛 바탕에 자주빛 호장을 받친 호장저고리
호장저고리 하얀 동정이 환하니 밝도소이다
살살이 퍼져나린 곧은 선이 스르르 돌아 곡선을 이루는 곳
열두폭 기인 치마가 사르르 물결을 친다
초마 끝에 곱게 감춘 운혜(雲鞋) 당혜(唐鞋)
발자취 소리도 없이 대청을 건너 살며시 문을 열고
그대는 어느 나라의 고전(古典)을 말하는 한 마리 호접(胡蝶)
호접인양 사푸시 춤을 추라 아미(蛾眉)를 숙이고
나는 이밤에 옛날에 살아 눈 감고 거문곳줄 골라보리니
가는 버들인양 가락에 맞추어 흰 손을 흔들어지이다.
⸢문장⸥ 3호 (1929)
다시 다른 시 한 편을 더 소개하겠다.
낙화落花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닥아서다.
촛불을 꺼야하리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어하노니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