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육사문학관은 마치 이병주문학관처럼 주변에 인적이라곤 없는 산길에 세워져 있었다. 지훈문학관을 출발하여, 한 시간 남짓 산길을 돌다 보니 평평한 바위에 앉아 먼 곳을 응시하는 이육사 동상을 볼 수 있었다. 문학관 건물은 외양부터 특이했다. 처음에는 도로에 접한 1층에 입구가 있는 줄 알고 차를 길 건너 아래에 조성된 주차장에 세우고 올라오려고 했는데, 막상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보니 수십 단의 계단을 오를 생각에 아내는 걱정부터 앞선다.
그래서 생각해 낸 방법이 일단 다시 차에 올라 아내를 문학관 입구에 내려주고 내가 다시 차를 주차장으로 갖고 내려오는 방법이었다. 그런데 정작 차를 몰고 다시 올라가니 이육사 동상 위로 산길에서 문학관 안쪽으로 들어가는 블록으로 포장된 길이 보였고, 때마침 산길을 내려오던 승합차 한 대가 그 길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우리도 곧장 그 차를 따라 들어가 보았다. 그 안은 비교적 약간 넓은 공간에 차량이 몇 대 주차된 간이 주차장이었다. 물론 문학관 입구도 그곳에 있었다. 차를 갖고 올라온 바람에 아내가 다행히도 계단을 걷지 않아도 되었다. 혹시라도 이 글을 읽고 문학관을 찾는 분이 있다면, 우리처럼 이육사 동상을 끼고 우측으로 들어가서 주차할 것을 권한다. 무릎이 편치 않은 분이라면 더욱 권하고 싶다.
이육사문학관은 이층으로 이루어졌다. 산길 쪽에서 본 층이 일 층이고, 우리가 들어간 입구가 있는 층이 이 층으로, 관람 동선은 당연히 이 층에서 일 층으로 내려가면서 관람할 수 있는 구조이다. 관람료는 있었지만, 우리는 무료입장이었다.
문학관 안으로 들어서면 가장 왼쪽에는 사무실이 있고, 그 옆에 세미나실이 있는데, 마침 단체로 관람을 온 여고생들이 그 안에서 시청각 자료를 시청하고 있기에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그리고 오른쪽부터는 전시실의 시작이었다. 전시실을 본 첫 느낌은 아주 단아하고 깨끗했다. 이육사의 마음처럼 희고 깨끗한 벽에는 시들이 적혀 있었고, 그 공간을 지나면 이육사라는 필명을 낳은 “수감번호 264, 이원록(이육사의 본명은 이원록이다)”, 그리고 이육사의 유학 생활을 보여주는 간단한 자료가 부착된 공간이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그 벽면이 형무소 철창을 연상하게 만드는 철골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것도 전시실 기획 의도가 아닌가 싶었다. 그 옆에는 이육사의 고향마을 전경을 바라보면서 휴식을 취하거나 이육사 관련 기념품을 구입할 수 있는 노랑나븨라는 문학 카페가 있었다. 요즘은 어느 문학관에 가든 볼 수 있는 공간이었다.
이육사의 생은 수감과 투쟁의 삶이었다. 40여 년 동안 총 17차례 감옥을 드나들었고, 끝내 북경 일본총영사관 감옥에서 숨을 거두었다. 수많은 수감생활마다 이육사는 일본 경찰의 모진 고문을 감당해야 했다. 그때마다 이육사는 “너희들이 나를 고문해서 나의 육체를 으스러뜨릴 수 있을지라도 내 정신만은 어쩌지 못할 것이다.”라고 외쳤다고 한다. 실로 굽히지 않는 굳은 정신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이육사의 인생을 따라가 보면 시인의 삶보다는 독립운동가의 삶이 더욱 조명받는 일이 지극히 자연스럽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렇게 이육사는 자신의 작품세계와 살아온 행적이 일치하는 몇 안 되는 애국지사 문인 중의 한 분이라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열렬한 독립운동가로, 위대한 시인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한 이상을 실천하며 살다 가신 분이 바로 이육사이다.
이육사의 생애는 친가와 외가의 항일 민족정신을 바탕으로 자연스럽게 독립운동 대열에 참여하게 됨으로써 시작된다. 장진홍의 의거에 연루되어 4형제 모두 옥고를 치른 일부터 대구 격문 사건,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입교와 활동, 문학 활동으로 일제에 저항하다가 끝내 무기 반입을 위한 북경행 도중 모친과 형의 소상(小祥)에 참여하기 위해 귀국했다가 검거되어 생을 마쳤다.
2층 전시관에서 계단을 따라 아래로 내려오면 본격적으로 이육사의 행적과 작품세계에 대한 자료를 볼 수 있다. 문학관을 다니면서 항상 하는 생각은 아내가 계단을 오르내리기 힘들어하는 까닭에 엘리베이터의 설치 여부를 확인하곤 하는데, 이곳도 처음 보아서는 엘리베이터가 눈에 띄지 않길래 계단을 내려갔는데 나중에 보니 전시실 한쪽에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혹시라도 무릎이 편치 않은 관람객이라면, 더군다나 입구 앞에 주차한 관람객이라면 가급적 엘리베이터 이용을 권하고 싶다.
1층의 마지막은 감옥의 수감체험을 위한 공간이다. 실제 감방처럼 꾸며진 공간에서 안에 들어가 봄으로써 잠시나마 이육사의 수감생활을 떠올려 보자는 취지에서 만든 공간이었는데, 실지 크기로 재현한 감방 안을 들어가 보니 공연히 마음이 숙연해졌다. 이런 곳을 이육사는 평생 열일곱 번이나 들락거렸다는 것이지 않은가?
벽에 부착된 이육사 연보를 보고 놀란 것은 그렇게 독립운동가의 행적이 돋보이는 인물이었음에도 시와 소설 그리고 수필을 남긴 것도 모자라서 시조, 한시, 비평, 번역에 걸치는 다양한 갈래의 글을 남겼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당시에는 새로운 예술이었던 영화와 시나리오에 관한 글도 남겼을 뿐 아니라 직접 영화예술(1938년) 동인으로도 참여했다는 사실이다. 이렇듯 이육사를 우리가 옛날 학교에서 배웠던 저항시인, 청포도, 광야, 절정 등의 대표적인 시를 지은 시인, 문학적 작품을 통하여 일본의 식민지 통치에 저항하며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온몸을 불사른 시인 등으로만 기억해서는 안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육사는 퇴계 이황의 14대 후손이다. 사실 전시실의 관람 소회와는 큰 관련은 없지만 내가 이육사의 사진 자료를 보고 느낀 첫 소감은 그의 인상에서 풍기는 단호함이었다. 그런 느낌이 어디에서 온 것인가 했는데, 알고 보니 대쪽 같은 한학자였던 그의 선조 이황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아닐까? 하고 잠시 생각해 보았다. 왜 그렇지 않은가? 더군다나 그의 트레이드 마크와 같은 둥근 테 안경이 그를 더욱 완고하고 신념에 찬 인물로 그려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문인으로서의 자긍심 이전에 조국의 백성으로서의 지조 있는 인생철학은 시대적 배경이 다르긴 하지만 방금 전 보고 왔던 조지훈의 지조론을 떠올리게 하기도 했다.
그렇게 비 오는 날의 문학관 나들이가 끝나가고 있었다. 이육사의 문학 초기 시절의 작품을 소개하겠다. 초기의 시는 침울한 정신세계를 추상적인 말로 표현한 것들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황혼(黃昏)
내 골방의 커-텐을 걷고
정성된 맘으로 황혼(黃昏)을 맞이하노니
바다의 흰 갈매기들 같아도
인간(人間)은 얼마나 외로운 것이냐
황혼(黃昏)아 네 부드러운 손을 힘껏 내밀라
네 뜨거운 입술을 맘대로 맞추어 보련다
그리고 네 품안에 안긴 모-든 것에
나의 입술을 보내게 해다오
교목(喬木)
푸른 하늘에 닿을 듯이
세월에 불타고 우뚝 남아서
차라리 봄도 꽃피진 말아라
낡은 거미집 휘두르고
끝없이 꿈길을 혼자 설레이는
마음은 아예 뉘우침 아니리
검은 그림자 쓸쓸하면
마침내 호수(湖水) 속 깊이 거꾸러져
차마 바람도 흔들진 못해라
오늘의 마지막 행선지인 보은의 오장환문학관으로 전화를 걸었다. 보통 문학관 관람시간은 오후 6시까지지만 그래도 여유있게 관람하려면 5시 이전에 도착하는 것이 좋다. 전화를 받은 직원이 언제든 관람이 가능하니까 오라고 하는 말을 듣고 나는 또 다시 빗속에 고속도로를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