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습,
그저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 소설인 금오신화의 작가로만 알고 있던 조선 초기 시인의 기념관이 강릉에 있었다. 처음 나들이를 계획할 때는 미처 몰랐었는데, 강릉의 김동명문학관을 계획에 넣으면서 함께 돌아볼 기회가 생겼다. 찾기는 쉬웠다. 마침 아는 지인의 소개로 들리려 한, 강릉에서 맛집으로 유명하다는 추어탕 집에서 차로 오 분 거리였다. 김삿갓문학관에서 출발하여 빗속 산길을 헤치고 강릉에 도착했지만, 추어탕 집의 브레이크타임에 걸리고 말았다. 원래의 계획은 추어탕으로 늦은 점심을 해결하고 매월당김시습기념관(이하 ‘기념관’)과 김동명문학관을 둘러보고는 양양의 숙소로 가는 일정이었는데, 그 일정이 어긋난 것이다. 하는 수 없이 우선 매월당김시습기념관을 먼저 관람하기로 했다.
기념관은 외양부터 남달랐다. 강릉에 들어서서 느낀 것은 강릉에 전통 한옥 형태의 건물이 많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기념관도 서울 같으면 고궁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단아한 한옥이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오른쪽을 보니 작은 대문이 보인다. 마치 한참 전에 다녀온 은평구 한옥마을의 ‘셋이서 문학관’ 입구처럼 생겼다. 마당에 들어서니 매월당의 유필(遺筆) 시석(詩石)이 눈에 띈다. 서예를 모르는 내 눈에도 명필이었다. 한문에 조예가 깊지 않아 아래의 해석을 보니 아마도 방랑 생활의 소회를 읊은 시인 듯 보였다. 궁금한 것은 원시는 다섯 자 여덟 행의 구조인데 일부러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시석의 시는 행의 구분 없이 내려쓰기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어져 있는 까닭에 읽으며 시의 행마다 끊어서 해석하기 불편할 것만 같아 보였다. 하긴 옛날의 상소문 같은 것도 그렇게 주욱 이어서 쓰지 않았던가?
매월당기념관이라는 현판 아래 문을 밀고 들어가면 아주 깨끗하게 정돈된 실내가 나온다. 기념관이라기에는 조금 간단한 구조이다. 크게 김시습이라는 인물에 관해 소개하는 공간과 금오신화 애니메이션 공간 그리고 이어지는 유물(주로 서책임) 전시실로 이루어져 있었다. 물론 입구 초입에 김시습의 서적 및 유물도 있었는데, 솔직히 모두 한자로 적힌 까닭에 직접 읽을 수는 없었다. 그래도 서적들이 갖는 의미는 설명표에 의해 알 수 있었다. 금오신화 영인본(1884, 일본 동경 발행판)이라든지 매월당집(1927, 후손 김봉기가 간행한 신 활자본), 매월당전과 같은 자료는 한눈에 보아도 귀중한 자료임을 알 수 있었다.
매월당 소개 공간에 들어서면 처음 보이는 것은 벽에 걸린 매월당의 모습이다. 사람의 형태를 음각으로 제작한 까닭에 보는 사람이 보는 각도를 옮겨도 매월당이 그 시선을 따라오는 것처럼 느끼게 제작한 점이 재미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매월당의 시 나의 삶(我生)이 눈에 띈다. 이 시는 원시 중에서 일부만, 다섯 자씩 네 행으로 이루어진 시인데, 그 짧은 시 안에 지신의 삶에 대한 회한이 절절하게 녹아 있었다. 김시습은 평생 원대한 포부를 품고 민생을 위해 살았지만, 결국 자기 이상을 현실 정치에 시험해 보지 못하고 생을 마쳤다. 아마도 그래서 이 시가 그에게는 더욱 자신의 생을 그리는 시로 남았는지 모른다.
“나 죽은 뒤 내 무덤에 표할 적에 꿈꾸다 죽은 늙은이라 써준다면 나의 마음을 잘 이해했다고 할 것이니 품은 뜻을 천 년 뒤에 알아주리”
자기의 뜻을 펴지 못한 마음이 얼마나 절절했는지 몇 자 안 되는 글에서도 감히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매월당에 관해 아는 것이 없으니 다른 문학관에서보다 연보를 볼 때 좀 더 집중해서 보았다. 그러다가 마치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화들짝 놀랐다. 오전에 다녀온 김삿갓문학관에서 김삿갓 이야기를 하던 도중에 천재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김삿갓은 천재다. 뭐 그렇게 말이다. 천재. 김삿갓은 분명 나의 기준에서는 천재가 맞다. 그런데 김시습은 또 이게 무슨 말이란 말인가? 태어난 지 여덟 달 만에 글을 읽고, 세 살에 유모가 맷돌에 보리를 가는 것을 보고 시를 짓고, 세종의 지시를 받은 승정원에서 김시습의 재주를 시험한 후 비단을 오십 필이나 하사했는데, 혼자 갖고 갈 수 있겠냐고 했더니 천연덕스럽게 비단을 훌훌 풀어 젖혀서 끝과 끝을 연결한 후, 한쪽 끝을 허리에 묶고 끌면서 집으로 돌아갔다느니 하는 이야기는 그냥 전설 속의 이야기로만 알았는데 그런 것이 아닌 것 같았다. 그 인물이 바로 김시습이었다. 김시습은 그 후부터 오세(五歲)라는 별명으로 불렸다고 한다. 말하자면 똘망똘망한 다섯 살 아이 정도로 해석해야 할까? 아무튼 그 이야기를 듣고 보니 김시습의 묘 앞에 쓰여 있던 “五歲金時習之墓”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혹시 궁금해하는 분이 있을지 몰라서 김시습이 3세에 지었다는 시를 적어 보겠다. 편의상 한자 원문을 건너뛰고 한글 의미만 적어 보겠다.
“비도 없이 천둥소리 어디서 나나
누런 구름 조각이 각 사방에 흩어지네.”
김시습도 김삿갓과 마찬가지로 방랑 시인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김시습은 사찰을 위주로 돌아다녔고, 김삿갓은 민가를 위주로 돌아다녔다는 점이다. 그리고 김삿갓은 집안의 문제가 처음 방랑을 시작한 계기였지만, 김시습은 왕실의 변란이 방랑의 계기였다. 김삿갓은 그다지 정치에 관심을 보인 것은 아니지만, 김시습은 암울하고 부당한 현실 정치에 관심을 많이 보였다는 점이 다른 것 같았다. 김시습이 현실 정치에 대한 안타까움을 품고 세상을 떠돌았다는 사실은 그가 불과 스물두 살에 불과한 나이로 단종이 물러나고 세조가 왕위에 등극하는 모습을 보고 이의 부당함을 주장하며 죽어간 사육신의 시신을 노량진 지금의 사육신묘 부근에 수습하여 묻고 작은 돌로 묘표(墓表)를 세웠다는 사실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른 인물은 자기의 뜻을 굳게 세우고 죽어가는데도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 안타까웠는지도 모른다.
김삿갓문학관과는 다르게 김시습기념관에는 서책 자료 이외의 한시 액자와 같은 작품과 관련한 자료도 몇 점 걸려 있었다. 정처 없이 떠도는 자기의 모습을 그리는 내용도 있고, 자연을 소재로 쓴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어쩔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자기의 무능력을 안타까워하기도 하고 세월의 무상함을 묵묵히 견뎌야만 하는 자기의 처지를 한탄하는 내용도 있다. 하지만 글과 현실은 냉정하게 보면 엄연히 다른 공간처럼 보인다. 아무리 탄식하고 애처롭게 바라보아도 어쩔 수 없는 것이 바로 현실이라는 사실이다.
전시실을 돌다 보니 갑자기 그림을 넣은 액자가 눈에 띈다. 자세히 보니 강릉미술협회 회원의 그림이다. 잔잔한 물 위의 연잎이 무념의 김시습이런가? 문인의 기념관에서 그림을 보고 반가운 마음이 드는 것은 나 역시 한국미술협회 회원이라서 그런가? 아무튼 색다른 전시물 기획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김삿갓이나 김시습처럼 우리와는 시대를 달리하고, 사용하는 문자도 다른 시인의 작품을 감상하면서 그 자리에서 그분들의 시 세계를 완벽하게 들여다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저 그분들에 대한 몰랐던 사실을 조금이라도 접하면서 그분들의 세계에 다가가 보려는 마음을 갖는 것만으로도 이런 문학관이나 기념관을 찾은 보람은 충분할 것이다. 생각해 보자. 두루마리처럼 둘둘 말린 자그마치 10미터에 이르는 글을 보았을 때,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할 것 같은가? 그 글의 내용은 차치하고라도 그렇게 문장의 이음 상, 숨 쉴 공간도 없이 써 내려간 그들의 필력에 어찌 감탄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시대를 건너뛰어 아무리 장시를 즐기던 현대의 시인이라 할지라도 그 정도로 시심을 가다듬어 글을 쓸 수 있었겠는가? 아마도 내 대답은 ‘아니다.’ 일 것이다.
그렇게 어설프게나마 김시습을 알현하고 돌아서서는, 다음 목적지인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노 저어 오오~”라고 노래했던 ‘초허 김동명문학관’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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