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영월 김삿갓면까지 세 시간 넘게 걸리는 가까운 거리가 아니다. 그런 데다가 비까지 쏟아붓는 굽이굽이 산과 강을 낀 길은 운전하기에 그리 만만치 않은 길이다. 일단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한 차례 잠깐의 휴식을 취하고 다시 출발해서 제천 요금소로 나갔다. 고속도로를 나섰지만 그래도 일반도로까지는 그다지 운전에 신경 쓸 일은 없었다. 그러다가 경사가 심한 고갯길로 이루어진 김삿갓 계곡 안내문 이후부터는 조금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하긴 그래 봐야 시간만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걱정할 일은 없었다. 그냥 천천히 가면 될 일이므로 말이다.
문학관 나들이를 계획하면서 대부분 시인이나 문인은 일제 강점기 이후의 인물을 위주로 문학관을 선정했다. 물론 방문 순서는 집에서 가까운 순서였는데, 그러다가 지난번 이육사문학관을 다녀오던 길에 비가 너무 심하게 내리는 바람에 방문을 포기하고 오장환문학관으로 순서를 변경한 곳이 바로 김삿갓문학관이었다. 빗길에 계곡 길을 가기보다 비교적 운전에 신경이 덜 쓰이는 곳으로 바꾼다고 급하게 찾은 곳이 오장환문학관이었는데, 그날 비를 피한다고 피해서 잡은 오늘도 비가 올 줄은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어차피 이곳은 비를 맞으며 찾았어야 하는 곳인 듯싶었다.
김삿갓 계곡 안내를 지나니 조금씩 관광 시설들이 보였다. 그 시설들을 지나쳐 조금 더 들어가니 왼쪽에 마포천 위로 노루목교를 가로질러 김삿갓문학관 주차장에 들어설 수 있었다. 비가 와서 그런지 주차장은 썰렁하리만치 한산했다. 문학관에 가까운 버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문학관으로 향했다. 계단이다. 계단을 오르지 않으려면 옆길로 돌아서 올라가면 되는데, 계단 바로 위에 동상이 하나 보이길래 그냥 아내의 팔을 붙잡고 계단으로 올랐다. 동상은 김삿갓과 한 여인이 서로 반대 방향을 바라보고 서 있는 모습이었고, 그 둘을 이어주는 휘장 같은 옷깃에는 시가 한 편 새겨 있었다.
계단 왼편에는 김삿갓이 웬 스님과 서로 합장하고 인사하는 듯한 모습의 동상이 있었고, 두 사람 사이에는 한자로 새겨진 시가 한 편 있었는데, 나의 좁은 식견으로 즉석에서 해석은 불가했기에 그냥 씁쓸한 마음으로 문학관 입구에 들어섰다.
문학관은 정면에서 보면 지붕이 삿갓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오는 길에 다른 건물의 지붕이나 조형물에도 삿갓이 많이 보였던 기억이 났다. 김삿갓은 백 년도 훨씬 지난 사후의 사람들이 이렇듯 자기를 기억해 줄 줄 알았을까? 궁금하긴 했다. 그저 당대에는 많은 사람에게 알려진 인물이었지만, 그런 그의 명성이 과연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지는 아마도 몰랐을 것이다. 그것도 본명인 ‘김병연’이나 ‘난고’라는 호보다는 방랑할 때 사용한 ‘笠, 또는 삿갓’이라는 이름으로 남을 줄을 말이다.
김삿갓이 일생을 방랑으로 일관하던 사유는 이미 널리 알려진 바이므로, 나까지 이곳에 언급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그저 문학관을 돌아본 소회와 김삿갓의 작품에 대하여 내가 느낀 느낌을 적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더욱이 잘 알지도 못하는 한자를 끄적거린다는 것은 오히려 김삿갓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기에 가급적 쓰지 않기로 했다.
문학관은 관람료가 있었지만, 우리는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신분증만 보여주고 들어갔다. 정면의 김삿갓 동상 옆 포토존에 앉은 나를 아내가 찍어주려 하자 사무실에서 나온 직원분이 아내에게 함께 앉으라고 하신다. 사진을 찍고 나니 오른쪽 다목적실 관람을 먼저 권하신다. 그곳에서는 영월난고선양회가 기획한 김삿갓을 기리는 특별전 ‘詩와 書와 刻의 만남展’이 열리고 있었다. 참여 시인의 작품을 書刻 화가가 나무에 새기고 깎아서 書刻 작품으로 만든 것을 전시하고 있었다. 소재는 영월 10 경이라고 하는 명소들이다. 김삿갓, 어라연, 법흥사, 청령포, 고씨굴 등을 소재로 지은 시가 많았다. 이런 행사를 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상당히 의미가 있어 보였다. 그 지방의 자연 문화에 관한 관심도 집중시키면서, 지역 문인의 창작 발표의 장으로서도 좋은 행사인 듯했다. 건너편 전시실에 들어서니 그곳부터 김삿갓 관련 자료였다. 김삿갓이 한평생을 돌아보며 지은 시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김삿갓의 시는 파격적인 느낌을 준다. 원래 한시가 지극히 정형에 치우친 문예사조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는데, 김삿갓이 떠돌면서 지은 시들을 보면 아마도 일반 서민 백성들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내용으로 짓기 위하여 그들이 흔히 볼 수 있는 사물과 입에 올리는 용어를 활용해서 지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결국 한시라는 형식의 시문학 대중화에 어느 정도는 이바지한 면은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후세의 사람들이 분석한 김삿갓의 시의 다섯 가지 유형에 따르면, 당시의 한시를 즐기던 유학자들은 결코 생각하지 못했던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시를 지었다고 한다. 특히 한자와 한글을 혼용한 시라든지 이두처럼 한문의 훈(訓)을 다시 글의 뜻에 맞게 풀이하는 방법은 김삿갓이 아니고는 결코 생각할 수 없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간혹 풍자 시의 경우에는 음이 같은 한자 간의 서로 다른 뜻을 활용한 언어유희적인 시도 즐겼다. 주로 못된 양반들을 비웃을 때 활용한 방법이긴 하지만 말이다.
전시실을 나와 왼쪽으로 돌아서니 벽에 커다란 판화 작품이 걸려 있었는데, 작가 이름을 보고 깜짝 놀랐다. 판화가 이철수 님의 판화가 아닌가? 문학관을 다니면서 오영수문학관에서 본 판화가 오윤 님의 작품 다음으로 이철수 님의 판화까지 감상하게 된 것이다. “대동강 흐르는 물 위로 새들 가고 오고, 바람 따라 나그네도 떠나거니…”라는 글귀 옆에 삿갓을 쓰고 죽장을 짚은 김삿갓의 모습이 새겨 있었는데, 그 모습이 왜 그렇게 짠하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전시된 김삿갓의 자료들과 너무 어울리는 판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판화를 감상하다 보니 옆에 밖으로 향하는 작은 문이 있었고, 문밖으로 시비처럼 보이는 입석(立石)들이 늘어서 있었다. 원래 문학관 정면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던 공간이었다. 우산을 쓰고 내려가서 보니 시비 공원이 맞았다. 생각보다는 큰 돌에 새겨진 시들은 김삿갓 문학상 수상 작품들이었고, 그중에는 나태주, 김남주, 유안진 같은 낯익은 이름들도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 반가운 이름도 있었다. ‘오탁번’, 그 이름을 보고는 원서문학관을 떠올렸다. 2023년 작고하시기 전까지 문학관을 지키며 방문객들과의 만남을 계속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비록 사후이긴 하지만 문학관을 찾고 싶어서 인터넷을 뒤졌는데, 지금도 개방 운영 중인지 아닌지를 알 수 없어서 방문을 포기한 문학관이 바로 원서문학관이었다. 만일 운영 중이었다면 이곳 김삿갓문학관을 찾기 전에 먼저 방문했을 것이다. 집에서 이곳으로 오는 길목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이번 나들이의 첫 번째 방문지로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비들의 시를 읽다가 나도 언젠가는 멋진 시를 써서 문학상에 도전해 보고 싶다는 열의가 솟았다. 물론 어림도 없는 상상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그런 의욕이 나의 필력을 좀 더 높여줄지 누가 알겠는가? 상상은 자유이고, 상상 속의 내 모습을 그리는 즐거움은 누구도 막을 수 없을 테니 말이다.
시비 공원을 돌아보고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에도 전시실이 두 개 있었는데, 각각 전시실 명칭이 ‘민중시인 김삿갓’과 ‘김삿갓 프로젝트’였다. 사실 김삿갓 프로젝트라는 공간의 전시물은 나에게 크게 와닿은 것은 없었다. 단지 설명에 의하면 김삿갓이라는 상징적 의미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현재의 시각으로 재구성한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공간 안에는 희한하게 순수 자연석임에도 그 안에 김삿갓의 모습이 새겨진 수석이 전시되고 있었다.
제2전시실에서 김삿갓을 민중 시인이라는 현대의 언어로 묘사한 부분은 조금 격이 맞지 않는 느낌을 받았다. 민중 시인의 정의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부터 애매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물론 김삿갓이 지은 시의 대부분이 민중(아마도 그 시대의 용어로는 그냥 백성이든 평민 정도로 하면 될까?)의 삶과 애환을 해학적으로 그리고 있기는 하지만, 그는 시를 통하여 거창한 사회 격변을 시도하거나 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였다. 김삿갓의 시가 지금까지 현존할 수 있는 까닭은 누군가가 기록을 보존하고 후대에 전했기 때문이리라는 생각을 할 수 있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과연 누가 그렇게 김삿갓의 시를 보존했을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밥 한술에도 시를 지어 답례하고 했던 경우에 과연 김삿갓에게 베풀었던 사람이 그 시를 애지중지 보관했을까? 아, 갑자기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진다.
요즘 많은 분야에서 천재성을 운운하는 인물들을 볼 수 있다. 너무 천재가 많아서 듣는 사람도 헷갈릴 지경이기는 하다. 물론 시 분야에서도 그렇다. 하지만 나는 이곳을 돌아보면서 어쩌면 한시에 통달한 사람이야말로 천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시는 형식이 있는 문예사조이고, 그 형식을 지키려면 많은 한자의 음과 훈을 모두 알고 있어야 한다. 또한 시도 즉석에서 지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가? 술 한잔에 시 한 수라니 하는 말이 공연히 생긴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즉석에서 시적 감흥과 시상을 끌어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정말 천재라는 말을 들어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김삿갓은 진정 방랑 시인이나 민중 시인 이전에 천재 시인이라고 불려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냥 한 번 생각해 보았다.
문학관을 돌아보고 내려오는 길에 왼쪽으로 동상과 시석이 몇 개 있었다. 김삿갓 혼자만의 동상에는 “까마귀 쪼는 소리같이 진종일 떨어지더니” 하는 ‘낙엽 2’라는 시가 새겨진 시비가 있었고, 옆으로 비스듬히 누운 시석 위에는 “정처 없이 떠도는 내 삿갓 마치 빈 배와 같이”로 시작하는 ‘삿갓의 노래’가 새겨 있었다. 시를 읽다 보니 머릿속으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김삿갓의 모습이 절로 그려졌다. 시석(詩石)은 모두 한자 원문이었고, 그 옆 있는 시판(詩板)에는 원문을 한글로 위에 적고 아래에 그 뜻을 한글로 풀어서 썼다. 이렇게 쓴 이유는 관람객이 읽기 편하게 하려는 배려인 것 같았다.
문학관 앞의 정원까지 모두 돌아보고 차를 세워둔 곳으로 갔다. 사실 문학관에 처음 들어갈 때보다는 약간 전시물이 나의 기대에 못 미친다고 생각했다. 혹시라도 구할 수 있다면 김삿갓의 친필 시 같은 자료가 벽에 걸려 있지는 않을까? 하고 기대했던 것도 사실이었는데, 그런 자료는 볼 수 없었다. 후원의 문학상 수상작 시비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공간이 있다면 차라리 김삿갓의 시를 새긴 시비를 세웠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무튼 비는 그때까지도 그치지 않고 있었다. 이제 이 비를 헤치고 다시 구불구불 산길을 돌아 태백산맥을 넘어 강릉으로 가야 하는 일정이다. 그저 비가 더 심하게 오지 않기만을 바라는 마음으로 천천히 김삿갓문학관 주차장을 출발해서 오던 길을 되돌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