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시인 김동명

by 정이흔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노 저어 오오~”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 보았을 노래다. 이 노래는 김동명이 발표한 시에 후일 김동진이 곡을 입혀 가곡으로 널리 애창되었다. 나는 이 시를 어디에서 접했는지 솔직히 기억은 없다. 교과서에서였을까? 아니, 그보다는 ‘내 마음’보다 “조국을 언제 떠났노~”로 시작하는 시 ‘파초’가 좀 더 기억에 남는다. 특히 파초의 꿈은 가련하다는 그 행이 기억난다. 그 구절을 떠올리면 왜 나까지 가련하다는 생각이 드는 걸까?

김동명 문학관은 강릉에서 양양으로 가는 길에서 안쪽으로 조금 들어가서 있다. 처음 내비게이션을 따라 길에 들어설 때까지 이런 곳에 문학관이 있을까 싶었다. 띄엄띄엄 보이는 전통한과 간판만 우리를 맞이하는 것 같았다. 처음 나타난 간판을 보고 깜짝 놀랐다. 지금은 덜하지만 우리는 매년 한과를 주문해서 먹었는데, 바로 그 상호의 한과 판매장이 가장 먼저 우리를 반기는 것이 아닌가? 별것 아닌 일로도 잠깐의 반가움을 느꼈다. 그리고 나니 못해도 열 군데 이상의 한과 간판을 지난 후에 문학관 진입로가 나왔다.

문학관 진입로에 들어설 때까지도 인터넷에서 본 현대식 건물의 문학관이 있을 것 같지 않은 시골길이었는데, 모퉁이를 돌자 너른 대지 위에 문학관이 보였다. 문학관의 오른쪽에는 잘 단장된 김동명의 생가가 있었고, 왼쪽에는 약간 언덕진 곳에 높이 솟은 시비 탑이 보였다. 우리는 우선 차를 주차장에 세우고 생가인 초가집 쪽으로 발을 옮겼다. 생가터 확인 작업은 2004년부터 시작되었다는데, 문학관은 2013년에 이르러 세워졌다고 한다. 문학관의 외양은 그의 시 ‘내 마음’에 등장하는 호수와 돛단배를 형상화했다는 설명을 읽고 보니 정말 그렇게 보이는 것 같았다.

문학관 입구의 좌, 우 벽면에 크게 인쇄된 김동명의 시가 여러 편 걸려 있었는데, 사실 나는 ‘파초’를 제외하고는 처음 접하는 시들이었는데, 대부분 시의 소재는 라일락, 오동, 향나무, 라일락, 장미, 해당화, 백합화, 무궁화 등 식물을 소재로 지은 시들이었다. 잠시 서서 읽어 보니 어딘가 모르게 울적한 분위기의 시들처럼 느껴졌다. 아마 당시의 시대상 때문에 그렇게 느꼈는지도 모른다.

김동명의 시라고는 그저 두 편밖에 모르고 찾은 문학관이기에 오히려 다른 문학관에서보다는 더 많은 것을 접할 수 있었다. 실례로 김동명이 자연을 사랑한 시인이라는 사실 쯤이야 짐작할 수 있었다지만, 일제의 탄압이 극에 달했던 시기의 학생들에게 끊임없이 우리의 말과 글 속에 담긴 민족정신과 민족의 뿌리에 대해 가르침을 주었던 교육자로서의 김동명, 그리고 이후 대학 강단에서 시론을 강의하면서도 사회 현실에 대한 올바른 시각을 가르치던 교육자, 그리고 시대를 올곧게 바라보는 비판의식을 강조한 정치평론가이자 정치인 김동명에 관한 새로운 시선을 배울 수 있었다고나 할까? 그런 면에서 의미 있는 나들이였다. 문학관 내부는 전시실이 두 개 있었는데, 김동명의 생전 행적에 비해 전시물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도 나 개인적으로는 김동명의 시기별 대표적 시 각 세 편씩을 크게 인쇄하여 걸어 놓은 점이 마음에 들었다. 사실 문학관에 가 보면 시인의 시 보다는 다른 자료로 공간을 채운 곳도 많았는데, 내가 관람자의 시각에서 바라볼 때 시인의 시 세계를 이해하는 데에는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 않는 곳도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김동명은 얼마 전 다녀온 신석정과 마찬가지로 초기에는 전원파 시인이라 불리기도 했다지만, 결국 자연만을 읊으며 지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 시대 시인들의 화두는 일제에 대한 저항 의식이었을 것인 고로, 각자 자신만의 방식으로 일제의 강압적 탄압에 저항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을 것이다. 이후 시인으로서의 절정의 시기였던 중기에는 정제된 언어와 형식, 적절한 이미지와 비유 등으로 자연을 노래하면서도 이를 조국애로 승화시킨 작품들을 발표한다. 일제 강점기 후기에 이르러서는 김동명은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1942년부터 해방이 될 때까지 식민 지배에 대한 치욕과 분노로 절필을 선언하기도 했다. 이후 후기에 가면 해방 이후 급격하게 전개되는 역사의 격류를 몸소 체험하고, 그 경험을 담아 시를 쓰게 된다. 북한 지역에서의 경험이나 일제 패망과 해방 공간의 시대상, 다시 서울의 풍속과 시대상, 한국전쟁 당시의 비극적 사회상을 시로 기록하는 느낌으로 노래하였다.

문학관에 걸린 김동명의 시를 보면, 자연을 그리는 듯 보이면서도 대부분 망국, 실향, 서러움, 희망 등 모든 면에서 김동명이 보아온 사회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사실 부인할 수 없는 것은 그 당시 거의 모든 시인이 일시적 현실 도피, 현실 탈출을 노래하였듯이 김동명도 잠시 허무, 퇴폐적 언어의 유희에 빠진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해방 이후에는 철저하게 현실 참여적 시각으로 사회를 바라보고 정치를 비판하는 행보를 보이기도 한다. 김동명에게 있어서 정치 평론은 하나의 시였다. 조국과 겨레에게 보내는 김동명만의 시였다. ‘정치는 제2의 시’라고 역설한 김동명은 행동하는 시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했는지도 모른다.

문학관을 다니며 느낀 것 중 하나는 시인이든 소설가든 문학관을 지어 기리는 인물들은 정말 다재다능한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시인이라고 시만 쓰라는 법 없었고, 소설가라고 해서 시를 쓰지 말라는 법도 없었다. 연극과 영화에까지 손을 뻗었다. 번역은 많은 문인의 밥벌이 수단이기도 했다. 변영로는 심지어 문학의 범주가 아닌 미술 평론의 세계에도 손을 대어 근대 미술 평론의 효시라는 평가까지 받는다. 그러다가 이제는 정치 평론까지 왔다. 다양한 문학적 범주 이외에 정치 영역까지다. 그러니 김동명도 다재다능한 문인이라 할 수 있겠다.

전시실 앞의 공간은 현재 서가와 세미나실로 이용되고 있었지만, 언젠가 시인의 자료가 많아지면 그곳 역시 전시실로서 기능을 수행할 것이다. 세미나 및 다른 문학 활동을 지원하는 공간은 별관 정도로 신축하든지 하면 될 것이고…


문학관을 나오면 왼쪽으로 낮은 언덕이 있고 그곳에는 높은 시비 탑이 있으며, 그 탑의 좌우에 시비가 하나씩 서 있다. ‘내 마음’과 ‘파초’가 새겨진 시비이다. 시비 탑 왼쪽으로는 ‘김동명 묘소 가는 길’이라는 표지가 세워져 있었는데, 그곳까지는 언덕길로 400여 미터라고 했다. 무릎이 아파서 차 안에 있는 아내를 두고 다녀오기에는 마음에 걸려서 그냥 나도 차로 돌아왔다. 혹시라도 아내의 무릎이 좋아지면 동해안이야 언제라도 올 수 있는 곳이므로 나중에 들러도 되니 말이다. 내가 ‘내 마음’보다 더 좋아하는 시 ‘파초’를 여기에 한 번 적어보겠다.


파초 (芭蕉)

祖國을 언제 떠났노.

芭蕉의 꿈은 가련하다.

南國을 向한 불타는 향수

네의 넋은 修女보다도 더욱 외롭구나.

소낙비를 그리는 너는 情熱의 女人,

나는 샘물을 길어 네 발등에 붓는다.

이제 밤이 차다.

나는 또 너를 내 머리마테 있게하마.

나는 즐겨 너를 위해 종이 되리니,

네의 그 드리운 치마짜락으로 우리의 겨울을 가리우자.

- 시집〈파초〉1938년 -


이제 오늘의 일정을 마치고 양양의 숙소로 가는 일만 남았다. 이로써 사십여 군데의 문학관 나들이가 마무리되었다. 물론 나중에 더 다녀올 곳이 있겠지만, 처음 계획했던 문학관은 모두 다녀온 셈이다. 햇수로 삼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처음에는 몇 달에 한군데 다니다가, 점점 찾는 기간이 짧아지더니 올해 들어서는 벌써 1박 2일 나들이가 네 번째이다. 그동안 함께 다니느라 고생한 아내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이제 잠시 휴식을 취하다가 다른 문학관을 또 찾아볼 계획이다. 문학관이 끝나면 미술관도 다니고, 박물관도 다닐 생각이다. 시간이 나는 대로, 나와 아내의 나들이는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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