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사를 꽤 많이 했다. 이사를 많이 했다는 말은 우리 가족 소유의 집이 없었고, 타인 소유의 집에 세를 들어 살았다는 뜻이다.
어린 시절 나는 아버지 회사의 관사에서 생활했다. 물론 당시에는 관사라는 의미도 몰랐으니, 그 집이 관사였는지는 당연히 몰랐다. 단지 조금 더 크고 나서 알게 된 사실이었다. 그곳에서 아마 일곱 살까지 살았던 것 같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살고 계신 서울 집으로 이사한 것을 시작으로 정말 이사를 많이 다녔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처음 이사 간 집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집은 말 그대로 단칸 셋방이었다. 예전에 흔히 보았던 방 한 칸에 제대로 된 부엌조차 없는 그런 셋방이었다. 지금 같으면 나이가 어린아이조차 각자 자기 방이 있는 가정이 많지만, 그 당시에는 우리 집 같은 가정이 많았기에 유난히 불편하다거나 하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좋은 말로는 옹기종기, 듣기 싫은 말로는 덕지덕지 붙어살았다. 이사 또한 별거 없었다. 쌀 짐이라고 해봐야 옷가지, 이불 몇 개 그리고 간단한 주방 기구 정도였을 것이다. 변변한 책상조차 하나 없던 살림살이였기에, 그리고 가끔은 옆에서 옆으로 이사를 했던 까닭에, 이사하는 일도 별로 힘들지 않았다. 아예 처음부터 지금의 이사와는 전혀 다른 수준이었다.
가을 논에서 이리저리 옮겨 앉는 메뚜기인 양 옮겨 다니던 이사는 내가 군에 입대함으로써 일단 끝났다. 서울에서 학교에 다니던 내가 입대하자, 어머니는 더 이상 서울에서 생활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길로 곧바로 아버지가 머물던 울산으로 내려간 어머니는 그곳에서 채 육 개월도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다. 내가 입대를 서둘렀거나, 졸업까지 미루었다면 그 결과가 달라졌을까? 어머니가 지금까지 살아 계셨을까? 그것은 모를 일이다. 어머니의 환송을 받고 입대한 나는 제대할 때 아버지와 여동생이 사는 집이 어디쯤 인지도 모른 채 부대를 떠났다. 제대는 했지만, 돌아갈 곳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여동생을 만나야 함께 집에 갈 수 있었으며, 당시 여동생은 남산 드라마센터에서 공연 중이었기에 나는 어찌어찌 물어서 공연장으로 찾아갔다. 그렇게 여동생과 함께 돌아간 집은 내가 입대하기 전과는 전혀 다른 집이었다. 어설픈 주방 시설조차 없던 단칸 셋방이 작기는 하지만 그래도 방과 거실, 주방과 실내에 있는 화장실(입대 전까지는 공동 화장실)까지 갖춘 연립이었는데, 무엇보다 그 집이 다른 사람의 소유가 아니라 아버지의 소유라는 사실에 나는 놀랐다. 집이 아버지 소유라는 말은 예전처럼 다달이 월세를 내야 한다든지, 아니면 조금 살다가 다시 다른 곳으로 이사해야 한다든지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집이 아버지의 소유가 된 과정에는 내가 모르는 진실이 따로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서류상으로만 아버지의 집일 뿐, 여전히 다른 사람의 집이나 마찬가지였다. 단지 집은 그 다른 사람이 돌아가신 엄마의 빈자리를 채우는 과정에 얻은 부산물과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하지만 사정이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집주인으로서의 혜택을 누릴 수 없던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다시는 타의로 이사할 필요가 없었고, 매월 일정한 날이 되면 월세 마련을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결국 계획된 절차에 따라 실질적 집주인은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가족에 본격적으로 합류했고, 내가 결혼하여 그 집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하면서 내 손으로 구청에 아버지와 실질적 집주인의 혼인신고서를 제출하기에 이르렀으며, 우리 남매에게는 어머니로, 아내에게는 어머님으로 또 아이들에게는 할머니로 불리다가, 지금은 요양원에서 어르신으로 불리고 있다. 그러니 그것도 정말 묘한 인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를 낳아준 어머니와는 불과 스무 해를 함께 살았을 뿐인데, 지금의 어머니와는 사십 년 가까운 세월을 함께 지냈으니, 그것도 아버지를 먼저 보낸 후 이십 년을 보냈으니 어찌 묘한 인연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으랴. 아무튼 잦은 이사는 내 집인 듯 내 집 아닌 그 집 덕분에 당분간 끝이었다. 그리고 집을 재건축하느라 잠시 나가 살던 시기를 제외하고는 다른 사람 소유의 집에서 살아 본 적은 없었는데, 이번에 집을 팔고 사면서 이사하는 과정에 시간이 맞지 않아 부득이하게 잠시 월셋집에서 지내다가 이번 이사로 지금의 집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렇게 우여곡절을 겪고 나서 어머니까지 요양원에 계신 차에 오롯이 나와 아내 그리고 딸 셋만 이사 온 집이다 보니, 아무래도 지금까지 살았던 집과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 이제야 내 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나 할까? 아무튼 말로 설명하기에는 적절한 표현을 찾을 수 없지만, 우리에게는 새집인 셈이다. 그리고 조금 있으면 외국에 있던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손자까지 귀국해서 함께 생활할 집이다. 아마 특별한 사정이 생기지 않는 한 이 집에서 떠나지 않을 것이며, 결혼해 나갈 딸에게는 친정집이 될 것이고, 언젠가는 분가할 아들 가족에게도 본가가 될 것이다. 손자들에게는 시골집은 아니지만 고향이 될 것이고, 나와 아내가 함께 노년을 보낼 집이며, 결혼한 누나와 여동생에게는 지금까지 생각지도 못했던 친정이 되어줄 것이다. 그렇게 다양한 의미를 간직한 집이 될 것이다.
지금은 새삼 집을 정리하고 각자 방을 꾸미는 재미에 폭 빠져 지낸다. 거실에는 커다란 테이블을 놓고 의자에 앉아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밖의 경치를 즐기거나 하고 싶었고, 거실의 한쪽 벽은 책장으로 채우고 싶었다. 집이 넓다 보니 청소도 로봇 청소기에 맡기기로 했고, 겨울에도 차가운 음료를 마시는 나를 위해서 제빙기도 들여놓았다. 엘리베이터에 음식물 쓰레기를 들고 다니지 않도록 음식물 처리기도 샀으며 딸이 애지중지하는 피규어를 전시할 장식장도 들여놓았다. 전에는 늘어놓을 곳이 없어서 그냥 쌓아 두었던 화구도 언제든지 꺼내어 쓸 수 있도록 차분하게 정리해 두었다. 이제 곧 귀국할 손자를 위해 유아용 책장도 들여놓았고, 아들 가족을 위한 침대까지 마련했다. 넓어 보이던 집안이 차곡차곡 채워져 가는 것을 보면서 아내는 흐뭇한 표정을 짓는다.
늦은 밤 거실 테이블에 앉아 밖을 내다보면서 한잔 술을 즐겼다. 창밖에는 어제부터 그치지 않고 비가 내린다. 내리는 김에 나의 지난 기억까지 쓸어내렸으면 좋겠다. 좋지 않았던 이사에 관한 기억들 말이다. 남들은 몇 날 며칠 이삿짐을 정리한다지만, 우리는 불과 열흘 남짓 만에 모두 정리한 것 같다. 이제는 더 이상 이삿짐을 쌀 일도, 이삿짐을 풀 일도 없기만을 바란다. 이 비 그치면 아내와 가벼운 마음으로 나들이를 다녀오기로 했다. 아내도 근 삼 년에 걸친 문학관 나들이가 끝난 후, 몸이 근질거렸던 모양이다. 이제 집 정리도 끝났겠다, 바쁠 일도 없으니 바람 쐬러 다녀옴 직도 하지 않은가? 덕분에 바깥 경치도 즐기고 한동안 쉬었던 글감 수집도 잔뜩 해와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