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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바라보는 마음이란?

정이흔의 시 "이만하면 겨울인 거다'

by 정이흔

이 글은 바로 앞의 시에 대한 시작노트 정도의 글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만하면 겨울인 거다 / 정이흔



실핏줄 불거진 손등처럼

푸석하게 말라버린

나뭇잎은 초겨울 바람에 휩쓸려

거리를 뒹굴고 있고



화사하던 혈색 잃은

국화꽃은 길가 손수레 위에

후끈거리는 열기熱氣 가득한

황달 걸린 얼굴로 피어오른다



저 멀리 잘린 밑동만

군기 바짝 든 훈련병처럼 도열堵列한

연병장 같은 논바닥에 스며든 겨울이

어느새 거실 창을 두드릴 때면



요양원에 계신 어머니에게

겨울옷과 겨울 이불을

가져다 드릴 계절이 다가온 거다

이만하면 충분히 겨울인 거다




‘이만하면 충분히 겨울인 거다.’ 이 한 줄에 시인의 마음이 오롯이 담겨 있는 글이다. 계절이 오고 감은 늘 있는 일이다. 사람이 태어나서 한평생 살다가 떠나는 일도 마찬가지다. 어찌 보면 뻔한 결구 같기도 한 마지막 한 줄이다.



늦가을 길바닥을 뒹구는 낙엽을 보면, 마치 사람의 손등을 보는 듯하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혈관과 힘줄처럼 나뭇잎의 엷은 잎맥이 그나마 말라서 부서지기 일보 직전인 엽신葉身을 움켜쥐고 있다. 시인은 그 모습에서 나이 들어 쭈글쭈글해진 노모의 손등을 떠올린다. 이어지는 2연과 3연도 마찬가지다. 의도적으로 초겨울 풍경에서 노인의 모습을 떠올릴 만한 구석을 끼워서 맞춘다. 언뜻 읽으면 멋대가리라고는 하나도 없는 노골적인 비유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시’ 안에 반드시 남들이 잘 알지 못하는 어려운 비유법을 동원할 필요는 없다. 그런다고 시인의 품격이 높아지고, 시의 문학적 가치가 올라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럴수록 시에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 하는 독자에게 방해만 될 뿐이다. 그냥 누가 읽어도 뻔하게 보이는 시라고 해서 무시당해야 마땅한 글은 아니다. 그냥 시를 지을 당시 시인의 마음을 시 안에서 읽을 수 있게 되기만 한다면, 한 편의 시로서 충분한 존재 가치를 지닐 수 있는 법이다.



가을이 깊어지면 우리의 곁을 떠나는 대표적 자연이 나무와 꽃이다. 그렇다면 하필 왜 국화꽃일까? 나뭇잎은 어느 나무의 잎이라도 상관없는데 말이다. 꽃은 시들고 꽃잎이 마르면 부서져 바닥으로 떨어진다. 원래 그러려니 하고 생각하면서 지나치던 길가의 손수레에서 국화빵을 굽는 노점상을 보는 순간, 그냥 하릴없이 길가에 떨어져 부서지고 날리는 것이 꽃잎의 운명이라는 생각을 바꾼다. 사람에게 죽음 이후의 내세가 있고 환생이 일반적이라고 생각한다면, 국화빵의 전생은 과연 국화꽃이었을까? 터무니없는 상상이지만, 시 안에서만큼은 단연코 아니다. 그런데 전생에는 곱고 예쁜 색의 꽃이었던 국화가 노점상의 빵틀 안에서는 그저 누런색의 무늬만 빵으로 환생했다. 혈색이 불그레하고 젊었던 어머니 얼굴에서 점차 핏기가 옅어지면서 황달 걸린 환자 같은 누리끼리한 모습으로 변해가는 모습이 국화빵과 겹쳐 보인다. 정말 엉뚱한 착상이긴 하다.



그런 시각으로 시를 바라본다면, 3연의 갈라진 논바닥은 노년의 피부가 될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간혹 패인 시커먼 자국은 검버섯쯤 될까? 아무튼 무엇을 상상하든 간에 이 시의 전반에 걸친 노년의 쓸쓸함을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왜 하필 이런 대상을 찾아 시의 소재로 동원했을까? 시를 처음 쓰는 사람들이 흔히 떠올릴 수 있는 만만한 소재라서 그럴지도 모르지만, 마지막 연을 읽다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게 된다. ‘겨울옷’과 ‘겨울 이불’은 단지 추워지는 실내의 공기를 차단하기 위한 장치는 아니다. 인생의 겨울은 죽음이 임박해 오는 노년의 끝으로 갈수록 점점 매서운 추위를 동반한다. 이 정도는 누구나 상상할 수 있는 시의 소재이다. 지금까지 수많은 시인이 읊어댄 시의 소재가 늙고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는 인생을 땅에서 태어나 자라다가 소명을 다하고 메말라 땅으로 돌아가는 식물에 비유했다. 그렇기에 이런 종류의 시를 읽다 보면 첫 연과 두 번째 연 정도까지 읽고는 그냥 시집의 페이지를 넘겨 버린다. 하지만 시인은 그런 독자의 감상 패턴을 알고 있으면서도 굳이 초등학생 같은 소재를 초등학생 같은 필력을 동원해서 그리고 있다. 무슨 이유라도 있는 것일까? 해답은 마지막 행에 담겨 있다.



“이만하면 ‘충분히’ 겨울인 거다.”



겨울이면 겨울이지 ‘충분히’라는 시어가 왜 필요했을까? 노모가 이제 사실만큼 살았으니 ‘충분히’ 살았다는 뜻일까? 그러니 이제는 그만 저세상에 먼저 가신 아버지에게 가셨으면 좋겠다는 불효막심한 바람을 표현한 것일까? 글쎄? 만일 그렇다면 아무리 문학 작품에서는 부모건 형제건 몇 번씩이나 죽인다는 작가의 면죄부가 일반적인 것이 문학계의 풍조라고 한다지만, 그래도 노골적으로 아직은 살아 계신 늙은 어머니에게 어서 빨리 돌아가시라고 ‘시’ 안에서 고사라도 지낼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역설적으로 ‘충분히’에는 어머니에 대한 안타까움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야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나이가 많은 노인이라도 건강하게 살다가 고통 없이 떠나는 모습은 누구나 꿈꾸는 자신의 말년일 것이다. 그렇지 않기에 오랜 투병 생활 끝에 세상을 떠나는 사람의 장례식에서 ‘호상好喪’이라는 말이 고인을 욕보이지 않는 단어가 된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후손들이 그렇게 불러준다고 해도 죽음을 앞둔 노인의 생에 대한 애착은 살아 있는 사람으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하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즉, 호상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스스로 세상을 떠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다는 말이다. 요양원에 계신다는 부분에서 아마도 어머니의 말년이 그다지 좋지 않을 것이라는 추측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래서 ‘충분히’라는 말이 어머니의 생에 끼어들 여지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시를 읽을 때, ‘충분히’라는 부분에서 한 호흡 쉬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어머니가 살아온 시간만 해도 충분하다는 의미로 읽을 것이 아니라 위의 연에서 낙엽이나 국화빵이나 잘린 벼 밑동을 접하는 것만으로도 깊어 가는 겨울을 느끼기에 충분하다는 것처럼, 겨울옷이나 겨울 이불만 있어도 어머니의 겨울을 지켜 드리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충분한’ 계절이 다가왔다는 의미로 읽는 것이 올바른 해석일 것이다. 어머니는 자연의 사계 중에서 겨울 같은 시기의 인생을 보내고 있다. 자연이라면 겨울은 이듬해 봄을 낳지만, 사람의 겨울은 어찌 될지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시인은 답답하기만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어머니의 겨울을 지킬 뾰족한 방법도 없다. 그저 겨울옷과 겨울 이불을 챙겨 드리는 것 이외에는 없다. 마지막 행 위의 ‘계절’은 자연의 계절인 ‘겨울’을 뜻한다. 반면에 마지막 행의 ‘겨울’은 어머니의 노년이다. 어찌 보면 억지 같은 비유일 수도 있지만, 아무튼 시인으로서는 시어를 비틀지 않고도 읽는 사람이 마음대로 자기만의 화면을 그릴 수 있는 여지를 주고 있다. ‘충분한 겨울’이라는 것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쯤에서 이야기를 마무리하자. 그 한 행을 두고 다양한 해석이 분분할 수도 있지만, 다른 사람이 어떻게 느끼는지 눈치를 볼 필요는 없다. ‘겨울’을 단순한 겨울로 바라보든지, 읽는 사람만의 겨울로 받아들이든지는 읽는 독자의 선택이다.



시인은 원래 읽기 쉬운 시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는 시인이다. 읽기 힘들고 무언가 양파처럼 몇 겹의 껍질을 벗겨야 겨우 시인의 생각에 도달할 수 있는 시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게 시인의 마음에 도달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 시인은 또 그렇게 독자를 유혹해서 얻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결국 시인의 손을 떠난 시는 오롯이 각자 읽는 사람만의 사유의 놀이터라는 신념으로 시를 쓰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위의 시는 아주 세속적이라 할 만큼 별것 없어 보이는 비유를 동원했지만, 오히려 그런 시를 쓰는 것이 용기 있는 시인의 태도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그런 시인의 詩作 의도를 염두에 두고 시를 읽는다면, 의외로 이 시에서 독자는 자신만의 상상을 펼쳐볼 수 있는 재미를 느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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