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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에서 TV 소리가 사라졌다.

by 정이흔

거실에서 TV 소리가 사라졌다. 지금까지는 그래도 하루에 TV 시청 시간이 한, 두 시간은 되었는데, 벌써 보름이 넘게 TV는 침묵 중이다. 손자가 귀국하고 난 다음부터이다.



처음에는 우리가 TV를 켜지 않고 지내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TV 없이도 살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우리가 의도적으로 TV를 켜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냥 자연스럽게 TV 켜는 것을 잊은 것처럼 그렇게 되었을 뿐이다.



손자가 오고 나서는 많이 바빠졌다. 아침부터 저녁에 손자가 잠들 때까지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한국어를 거의 하지 못하는 며느리는 아들이 출국하고 난 이후부터 우리와 번역기와 짧은 영어, 그리고 중국어로 대화한다. 가끔은 일본어 단어도 나온다. 다국적 가족이다. 처음에는 통역하던 아들이 출국하면 어느 정도 혼란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지나다 보니 전혀 불편함이 없다. 어떻게 해서든 의사소통은 이루어졌다. 중국어만 하던 손자도 이제는 할아버지, 할머니, 고모부터 시작해서 한국어 단어를 익히는 중이다. 그런 손자와 놀고 있으려니 당연히 TV를 시청할 시간이 없다. 생각건대 아마 TV는 앞으로도 계속 침묵을 지킬 것 같다.



사실 거실에 TV를 놓지 않으면 가족끼리의 대화가 한층 더 무르익는다. TV뿐 아니다. 휴대전화도 마찬가지다. 우리 가족은 파파고 번역기를 소환할 때 이외에는 휴대전화도 잘 들여다보지 않는다. 말이 되건 안 되건 계속 대화를 시도하는 중이다. 그러니 가족의 대화에 TV가 끼어들 틈이 있을 리가 없다. 그냥 한쪽에 묵묵히 자리만 지키고 있을 뿐이다. 그 대신 거실 옆에 놓은 손자 책꽂이와 손자용 책상이 TV의 시간을 대신하고 있다.



이제 새해가 되면 손자는 어린이집에 갈 것이다. 며느리도 한국어학당에 다니게 되면 나는 더욱 바빠질 것이다. 아침에 며느리와 손자를 태우고 어린이집에 들러서 손자를 내려준 후 며느리를 한국어학당에 데려다주고 돌아온다. 그리고 학당이 끝나는 시간에는 다시 며느리를 데리러 가야 한다. 집에 와서 조금 쉬다 보면 어린이집에 손자를 데리러 가야 할 시간이 된다. 시립 어린이집이므로 버스 운행을 안 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래저래 바빠질 것이다.



그래도 아들의 어린 시절을 빼다 박은 손자를 돌보는 일은 지금까지 나의 일상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새로운 즐거움이다. 매일 엄마만 찾던 손자가 오늘 처음으로 나들이에서 내 손을 잡고 나에게 안겨서 돌아다녔다. 대견하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아이가 엄마에게서 떨어지기 시작하니까 며느리도 한국어 공부할 시간이 생겼다. 하루가 다르게 집안 분위기가 안정되어 가는 중이다. 이 상태로 아들이 아주 귀국하는 내년 여름까지 지내야 한다.



오늘은 모처럼 몸살 약을 먹었다. 아닌 것 같으면서도 피곤했던 모양이다. 내가 있어도 그런데, 아내를 혼자 두고 나는 계속 일을 다녔더라면 집안이 엉망이 되었을 것 같다. 아들 말을 듣고 아예 일을 그만두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일을 그만둠으로써 줄어든 수입은 아들이 책임지기로 했기에 후련하게 일을 그만둘 수 있었기는 하지만 말이다.



내일은 대부도나 다녀와야 하겠다. 가서 백합 칼국수도 먹고, 회전 전망대 카페도 올라갔다가 오면 손자와 며느리도 덜 답답해할 것이다.



오늘도 거실 TV의 영면을 기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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