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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의 한국어 익히기

by 정이흔

손자는 태어나서 23개월이 될 때까지 중국에 있는 외할머니와 며느리 손에 자랐다. 그렇다 보니 주위에서 들리는 중국어에 귀가 먼저 열렸고, 입으로는 중국어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아이가 언어를 습득하는 과정은 모두 마찬가지다. 물론 중국어를 먼저 익혔다고 해서 중국어로 자기의 생각이나 요구를 완벽하게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며느리와 이야기한다고 해서 손자가 며느리의 말을 잘 듣는 것도 아니다. 단지 한국어보다는 중국어가 조금 더 익숙한 상태일 뿐이었다.



하지만 아이가 말하지 못한다고 해서 주위에서 말하는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손자는 중국어든 한국어든 본능적으로 주위에서 하는 말을 표정이나 몸짓이나 분위기를 총동원해서 어느 정도 이해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상은 내가 느낀 점이다.



아무튼 말이라고는 중국어밖에 모르던 손자가 한국어를 익히기 시작했다. 일단 호칭부터 배우기 시작했는데, 특이한 것은 중국어로 말할 때와 한국어로 말할 때가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며느리를 부를 때는 무조건 마마(妈妈)이다. 그리고 할머니와 할아버지, 고모를 부를 때는 필요에 따라 다르다. 평상시라면 나이나이(奶奶)、 예예(爷爷)、꾸구(姑姑)라고 부르지만, 무엇인가 부탁하거나 요구하고 싶을 때는 할머니, 할버지(할아버지는 조금 긴 모양이다), 고모라고 정확한 발음으로 부른다. 그래서 우리는 손자가 왜 부르는 것인지 금방 알 수 있다.



손자는 과일을 좋아한다. 식사 후에는 딸기나 포도, 블루베리와 같은 후식을 먹는데, 그중 딸기를 가장 좋아한다. 보통은 며느리에게 챠오메이(草莓)라고 중국어로 요구하지만, 다급해지면 할머니에게 한국어로 “딸기. 딸기”라고 요구한다. 그렇게 한국어 단어를 하나씩 익혀가고 있는데, 확실히 어린 나이라서 그런지 익히는 속도도 빠르고 기억력도 좋아서 한번 들은 단어는 어지간하면 잊지 않는다.



손자는 딸을 가장 좋아한다. 우리는 그 이유가 아마도 엄마(며느리)와 같은 연령대의 젊은 여자라서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했는데,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사실 손자의 이름을 지어준 사람이 딸이다 보니, 딸은 말하지 않아도 손자를 정말 아낀다. 아마 그런 사실을 손자도 아는 것만 같다. 그리고 놀아줄 때의 딸은 리액션이 좋다. 마치 어린이집 선생님처럼 말이다. 그러니 손자는 딸과 노는 시간을 가장 좋아한다. 그런 손자가 딸에게 한국어로 ‘고모’라고 하는 때는 정해져 있다. 놀자고 부를 때이다. 멀리 거실에 앉아 놀다가도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면 꾸구(姑姑)를 반복한다. 고모가 왔다는 이야기다.



간혹 딸도 할 일이 있어서 책상 앞에 앉아 있을 때가 있다. 그러면 책상 옆에 와서 꾸구(姑姑)를 불러댄다. 고모가 그냥 의자에 앉은 채 “꾸구망(姑姑忙)”하면, 애처로운 눈빛으로 딸의 얼굴을 바라보며 손으로는 딸의 옷을 살며시 잡고 한국어로 “고모.” 한다. 그러면 결국 딸이 따라 나온다. 손자의 한국어에 넘어가지 않을 가족이 없다.



그러니 손자가 한국어 단어를 익히는 데에 가장 일조하는 사람도 당연히 딸이다. 고모가 한글로 이름이 적힌 그림 카드를 들고 불러주면 손자가 아주 정확한 발음으로 따라 한다. 그리고 나중에 다시 그림을 보여주면 기억했던 이름을 부른다. 가끔은 "우유"라고 하면서 중국어로 "요나이(牛奶)라고 덧붙인다. 그야말로 동시 번역이다. 아무튼 손자는 우리에게 들은 한국어 단어의 의미를 잘 모르더라도 일단 정확히 발음하면서 기억해 둔다. 그런 면을 보면 손자가 한국어를 익히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한마디 한마디 익히다 보면 어린이집에 갈 때가 될 것이고, 어린이집에서 한국어로 하는 이야기에 많이 노출되다 보면 집에 와서도 그날 배운 한국어를 자랑할 날이 올 것으로 믿는다. 그 시기에 며느리도 한국어학당에서 한국어를 배울 계획이므로 아마 아들이 귀국하는 내년 여름 정도면 모두 모여서 한국어로 이야기를 나누는 날이 올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집안에서 중국어 대화가 아주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며느리와 손자에게 중국어를 배우고 있을 것이고, 사돈이 방문하면 우리도 서툰 중국어일망정 몇 마디는 나눌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사돈 간에 오랜만에 만나서 소주도 한 잔 마시고 그래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손자는 오늘도 열심히 한국어와 중국어를 넘나들면서 가족에게 기쁨과 웃음을 안겨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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