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어느 정도 자라기 전에는 엄마와 떨어지지 않으려 한다. 그야 뭐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다. 엄마 뱃속에서 열 달을 자랐으니, 엄마와 자신을 동일시한다거나 혹은 막연한 불안감을 해소할 때는 엄마만 한 존재가 없기 때문일 수도 있다. 곁에 있다가 엄마가 조금이라도 떨어지려 하면 엄마를 부르며 따라가기도 한다. 어떤 경우 엄마는 화장실도 마음대로 가지 못할 수도 있고, 식사도 제대로 못 할 때도 있다.
우리 손자는 지금까지 외가에서 엄마와 외할머니 손에 자랐다. 그러다가 갑자기 사는 환경도 바뀌고 매일 보는 사람도 바뀌었으니, 주위가 온통 어색한 사물과 사람뿐이었으리라. 그래서 첫 주에는 엄마를 유독 따라다녔다. 며느리가 조금 쉴 수 있도록 우리가 손자를 봐주려고 해도 도무지 우리 손에 오지 않아서 안타까웠는데, 확실히 어린아이는 적응력이 뛰어난 것 같다. 불과 보름 만에 자기가 먼저 할머니, 할아버지, 고모 하면서 온 집안을 찾아다니고 있다. 특히 고모는 이름을 지어주었기도 하지만, 유독 손자와 잘 놀아주는 까닭에 손자도 고모를 가장 따른다.
이제야 비로소 손자가 주위 사람들을 인식하고, 친근감을 느끼게 된 모양이다. 날이라도 풀려서 밖에 나가고, 어린이집도 가게 되면 더 많은 사람과 만날 것이고 그만큼 사회성도 좋아질 것으로 믿는다. 단, 손자가 과연 어린이집 앞에서 엄마와 할아버지에게 바이바이 하면서 어린이집 선생님과 함께 어린이집으로 들어갈 것인지가 우리의 최대 관심사이다. 주위 사람의 말을 들어 보면 어린이집 가서 일주일이면 적응한다고 하는데, 그래도 유독 엄마와의 유대가 깊었던 손자이니만큼 염려가 되는 것도 사실이긴 하다. 며느리도 그 시간에 한국어학당에 가야 하므로 만일 손자가 어린이집에 적응하지 못하고 조기에 귀가하고 싶어 한다면, 집으로 데려와도 며느리가 없으므로 혼란을 겪을지도 모른다. 엄마가 자기를 두고 어디론가 갔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은가?
아직 두 달이나 넘게 남은 시간이지만, 그래도 차분하게 준비하려 한다. 어제부터는 나도 밖에 나갈 때 손자에게 바이바이를 하고 나간다. 손자가 자기 눈앞에 있다가 사라지는 사람에게는 잘 가라고 인사하는 습관을 길러주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돌아와서는 항상 돌아왔다고 말해준다. 손자가 한국어를 잘하지는 못하지만, 듣는 것은 거의 알아듣는다. 그러니 나중에라도 엄마가 자기에게 어디 다녀올 곳이 있다고 말하면, 자기를 두고 어디론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고 믿도록 하기 위함이다.
나는 아직 적절한 유아 양육 방법을 모른다. 하지만 정설이 어디 있겠는가? 그저 손자가 원하는 것은 자기 의지대로 하게끔 놔두고, 대신 공공의 기준에서 하지 말아야 하는 행위만 자제하도록 할 생각이다. 아이도 자기의 생각이나 의지대로 활동할 권리가 있지 않은가? 그러니 최대한 아이의 자율성을 보장해 주고자 한다. 물론 아이가 한 명의 성숙한 인격이 아니므로 종종 시행착오도 있을 것이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서 손자가 더욱 세상을 배울 수 있게 된다면 손자에게도 좋은 길이 될 것이다.
손자는 요즘 하루에 몇 마디씩 한국어를 배운다. 우리가 무슨 말을 하면 꼭 따라 하면서 정확한 발음으로 한국어를 구사하기 시작했다. 언젠가 손자와 의사소통이 원활해지면, 지금 보다 많은 이야기를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러기 전에 며느리에게만 매달려 있지 않고, 며느리가 할 일이 있을 때는 스스로 며느리로부터 떨어지는 연습을 하는 것이 시급한 일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가족은 각자 자기만의 방법으로 손자와 같이 놀아주다가도 자리에서 일어서는 연습을 하고 있다. 그리고 손자는 그런 우리에게 바이바이 하는 방법을 배워가고 있다.
태어나서 처음 진심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이 가까운 주위 가족과 잠시 떨어지는 연습이라니…… 어린아이에게는 반가울 리 없는 상황일 테지만, 그래도 손자는 오늘도 잘 적응하며 받아들이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