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는 잠자는 이불속 공주(부크크)>의 발문
발문(跋文) - 아내의 변(辨)
어느 날 문득 남편이 뜬금없이 내 이야기를 글로 쓰고 싶다고 했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가 했다. 갑자기 내 이야기를 글로 쓰겠다니, 지금까지 그런 일은 없었지 않은가? 그런데 무슨 바람이 불어서 그런 글을 쓰겠다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 원래 집 밖에서 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우리 가족에게 절대 금기이다. 교사도 공인이라면 공인인데, 공인의 사생활을 함부로 들추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남편은 물론이고 아들이나 딸도 나의 정체를 까발리는 일을 허락한 적이 없다. 그런데 이번에는 책이라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왜 그런지 이번에는 반대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남편이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승낙하고 말았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쓰려고 하는 건지 궁금하기도 했고 말이다. 이렇게 쉽게 승낙하는 것을 보니 나도 나이가 든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남편의 말을 듣고 단번에 승낙한 까닭은 나도 남편이 구상하는 글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남편과는 벌써 삼십오 년이라는 시간을 함께 보냈다. 과연 그 시간 동안 남편은 나에게서 무엇을 보았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그래, 무슨 할 이야기가 그렇게 많아서 글로 쓸 생각을 했는지 어디 한 번 두고 보자.라는 심산이었다. 그런데 남편이 쓴 글을 몇 꼭지 읽고 나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내가 이랬었나? 이런 적이 있었나? 끊임없이 기억을 되살려 보았다.
남편과 나는 동갑내기다. 그것도 내가 다섯 달 빠른 누나다. 하지만 대학교 학번은 같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 마치 미팅이라도 하는 기분처럼 편했다. 그리고 결혼해서 삼십오 년째 함께 살아가고 있다. 때로는 친구처럼, 때로는 동업자처럼, 때로는 격렬한 전장의 동료처럼 그렇게 살아왔다. 아무리 서로를 이해하며 살아왔다고는 하지만, 어찌 의견충돌이 없었을까? 없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다 잊고 살아왔는데, 남편은 어쩌면 그렇게 바로 어제 있었던 일처럼 기억하고 글을 쓸 수 있는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그만큼 남편의 글은 생생했다. 자신은 기억하지 못하는 일을 누군가가 기억하고 있다가 자기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을 때의 기분은 어떻겠는가? 아마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만큼 남편의 글은 나를 그 시절로 되돌려 주었고, 그런 이야기 속에서 나는 남편이라는 사람을 다시 보게 되었다.
남편의 글을 읽으며 좋았던 점은, 한마디로 나 자신을 되찾은 기분이었다고 해야 할까? 그런 느낌을 받았다. 나조차도 몰랐던 내 내면의 이야기들이 한 치의 주저함 없이 고스란히 글로 표현되어 있었다. 그와 동시에 나와 남편, 그리고 아들과 딸까지 모든 우리 가족 이야기가 이렇게 글로 남을 수 있다는 사실에 새삼 남편의 치밀할 정도의 세심함과 가족 사랑에 감동했다. 아마 이런 기분은 나와 함께 글을 읽었던 딸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남편은 글재주뿐 아니라 말재주도 뛰어나다. 하긴 그 말주변에 넘어가서 결혼한 사람이 나였으니, 두말해서 무엇하리오. 처음 남편이 내 이야기를 글로 쓰겠다고 했을 때, 잠시 망설였다. 이대로 환갑도 넘게 유지한 신비주의를 이제 포기해야 하는 것인가? 그런 생각도 했다. 그런데 능변의 예술가다운 남편의 한마디에 그냥 넘어가 버렸다. 남편은 나중에 내 이야기로 출간한 책이 베스트셀러라도 된다면 인세 또한 무지막지할 텐데, 그렇게 되면 나에게도 인세의 일정 부분을 주겠다고 했다. 그러니 득이 아니겠냐고. 물론 남편이 그렇게 이야기한다고 해서 내가 속물처럼 금전의 유혹에 넘어간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남편이 돈을 벌면 혼자 다 쓸 사람이 아니라는 점은 이미 알고 있다. 남편은 자기를 위해서는 동전 한 닢 멋대로 쓰는 사람은 아니다. 먹는 것, 입는 것 모두 특별히 선호하는 것이 없다. 그런 사람이 언감생심 떼돈이 들어온다고 해도 설마 나나 가족에게 국물도 없으리라는 상황은 상상도 안 된다. 그러니 남편이 그렇게 입에 발린 약속을 들먹였기 때문에, 내 이야기를 글로 쓰라고 승낙했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아무튼 나는 남편이 이 글을 쓰게 된 경위를 잘 알고 있다. 남편이 어느 공모전에 응모하기 위해 글을 썼는데, 공교롭게도 그 이야기가 나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렇게 내 이야기를 쓰다 보니, 생각보다 나를 주인공으로 쓸 이야깃거리가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뿐이었다. 그러니 간혹 글 안에 남편이 나를 생각하고, 사랑한다는 이야기가 담긴 부분은 곧이곧대로 믿을만한 이야기들은 아니다. 물론 그런 점을 고려해도, 나는 이렇게라도 내 이야기를 글로 남겨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남편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세상의 어느 남편이 그렇게 아내의 일거수일투족을 들여다보며, 눈에 보이는 것을 마음에 담는 남편이 얼마나 되겠는가? 나는 세상의 그 많은 남편 중에 지금 내 남편을 만난 것에 한없는 감사를 느낀다.
이 책의 글은 어떻게 보면 노년에 접어드는 많은 남편과 아내가 읽어도 좋으리라 생각되는 글모음이다. 많은 남편은 아내와 가까워지기를 바라면서도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지 몰라 주저하기도 한다. 반대로 많은 아내는 다른 남편이 아내를 어떻게 생각하고 사랑해 주는지 궁금한 경우가 많다. 나는 그런 남편과 아내들이 이 글을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년의 사랑이 뭐 별것이겠는가? 그저 자기만을 내세우지 않고 말 한마디라도 상대의 말을 들어주는 마음가짐으로 충분할 것 같다. 그렇게 세상을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자, 이제 세상의 모든 남편과 아내들이여, 다른 부부의 살아가는 이야기를 엿보러 오지 않겠는가? 오겠다고만 하면 언제든 환영이다.
아내 정세흔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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