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짓기 11: 집 짓던 시기 잠시 머물던 곳
너무 오래전 같다. 두 아이와 스페인을 다녀온 것이. 2017년 여름이었으니.. 지난주에 스페인 집 구경 당시 내 집이 지어진다며 짓고 있던 집 사진을 올렸는데 내가 좋아하는 작가님이 댓글에 "가우디 건축 대신 작가님 집을 한참 구경하네요. 정말 멋진 집입니다."라고 쓰셔 이참에 잠시 묵었던 집들 사진을 공유해야겠구나 싶었다. 가우디 건축이야 네이버, 구글에 이름만 넣어도 폭포수 쏟아지듯 사진이 넘치니 아이들과 머물던 일반 집을 소개하는 게 좋겠다 싶었다. 막상 스페인에 묵던 집들 사진을 찾아보니 많지는 않았다. 집 사진은 없고 얘들 사진만 가득했다. 그나마 있는 몇 사진을 정리하다 보니 여러 생각이 들었다.
마드리드 숙소는 정말 주택가 한가운데에 위치해 조용했다. 오후 4시경이던가? 도착했을 때는 돌아다니는 주민은 볼 수 없었고 뜨거운 열기가 계속 올라오고 있었다. 도착해 대문 앞에서 집주인이 올 때까지 10분여간 기다렸다. 집을 쉽게 찾아 뜨거운 열기 속에도 기쁜 마음으로 호스트(Carlos란 남자 호스트 였는데...)를 기다렸는데 젊고 예쁜 아가씨가 씩씩하게 와서는 내 짐을 번쩍 들고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갔더랬다.
계단을 밟을 때마다 삐그덕 대는 소리가 났는데 듣기에 거북한 소리라기보다 건물의 나이 듦을 느끼게 했다. 건물 내부는 중앙 계단을 두고 양편에 입구가 있는 형태였는데 하얀 벽에 빨간 문이 달려있어 깔끔하면서도 예뻤다. 빙글빙글 중앙계단을 올라 4층 숙소에 들어갔다. 에어비엔비(Airbnb) 사이트서 계약할 땐 남자 집주인이었는데 마중 나온 아가씨는 가볍게 방과 숙소 이용 방법을 알려주곤 씩씩하게 내려갔다. 딸과 내가 함께 머무를 방과 아들방, 화장실을 살펴봤는데 모든 방 천장에 작은 유리창이 달려 있어 불을 켜지 않아도 채광이 좋았다. 온 집이 밤 9시에도 고즈넉한 빛이 들어와 분위기가 그리 좋을 수 없었다. 심지어 화장실까지 말이다.
깔끔하고 조용해서 좋았다. 최소 물품으로 정리된 소박한 공간에 있으면 마음이 가벼워진다. 공간의 여백이 말을 거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모두들 여백이 있는 공간으로 여행을 가고 싶어 하는지도... 여행이란 남이 정리해놓은 집에서 쉬며, 좋은 것만 보고, 가볍게 해 먹고, 즐길 준비로 가득 찬 마음을 갖고 있으니 그 자체로 좋은 것 같다. 뭘 해 먹을까 걱정할 것도 없이 말이다. 딱 정해진 것 없는, 선택이 자유로운, 열린 마음만 가득하니 여행은 자유다. 스페인에 머무르는 모든 숙소에서 자유롭게 지냈다. 큰 틀의 갈곳만 정하곤 걷다 지치면 집에 들어와 쉬고, 걷다 더우면 카페에 들리고, 모자가 필요하면 모자를 샀다. 달리의 늘어진 시계처럼 시간을 스페인 열기에 길게 길게 늘여 썼다.
숙소에서 몇 분 걸어가다 찍은 사진인데 3층 집들의 테라스는 화분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어 태양빛에 초록의 화초들이 뜨거운 숨을 내쉬며 살고 있었다. 집과 화분의 공생이 좋았다.
저녁나절 플라멩코 공연을 보기에 앞서 근처 식당에서 맥주 한잔 하려 들어갔는데 장난꾸러기 같은 두 분이 검투사 모자를 쓰고는 우리 식탁에 와서 포즈를 취했다. 찍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분들은 우리 국적을 묻지도 않고 "안녕하세요." 했다. 한국 관광객이 스페인을 온통 휘젓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2017년 7월 13일에서 17일까지 마드리드에 머물다 세비야로 이동했다.
세비야 기차역에서 내려 택시를 타니 기사분이 집주소를 보곤 웃었다. 세비야 대성당이 엎어지면 코 닿을 중심 거리에 숙소가 있었기 때문에 '차가 들어가는데 조금 복잡할 수 있다.' 했다. 아닌 게 아니라 좁은 골목길로 들어서니 관광객이 가득했다. 문 앞에서 호스트(전형적인 우아한 스페인 아주머니 Maria)에게 전화를 하니 아직 청소 중이라며 한 시간 가량 기다려 달라 했다. 반가운 소리였다. 바로 옆 건물 레스토랑에 들어가 시원한 맥주와 점심을 먹었다.
오후 1시가 넘은 상태라 배가 고팠다. 식당에 들어서니 서빙하는 남자분이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했다. 그리곤 "너희 옆집에서 묵을 예정이니?" 하고 물어 "그렇다." 하니 정말 좋은 곳이라며 엄지손가락을 추켜올렸다. 간단하게 밥을 먹고 쉬고 있을 즈음 호스트로부터 전화가 왔다. 대문 앞에 청소를 끝낸 분들이 키를 가지고 있으니 그분들 안내를 받아 일단 짐을 풀라는 것이었다. 맛난 밥을 먹고 문 앞에 가니 청소일을 막 끝낸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해맑게 웃고 있었다.
법 없이도 살듯한 아저씨가 안내해 주셨다. 청소일을 하시던 두 분은 스페인 사람이 아닌 라틴아메리카에서 일하러 오신 분들 같았다. 생김새와 표정이 옛날 밀라노에서 함께 이태리 언어(25세 이상 무료 이태리 수업시간)를 공부하다 만난 페루 아주머니와 너무 흡사했기 때문이었다. '이 집을 통해 대륙이 다른 사람들이 잠시 한자리에 모였구나.' 했다. 바깥은 정말 시끄러웠는데 건물 안에 들어오니 조용하고 시원했다. 3층 숙소는 시원하고 깔끔했다.
인상 깊은 것은 흰 벽에 청색톤의 소파와 쿠션, 아이보리 톤의 침대 시트와 아트월이 인상적이었다. 작은 소품들은 일관성 있는 색상이었고 청량감 있는 분위기였다. 공간은 넓지 않았지만 참 편안하다는 느낌이었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집주인인 60대 여성과 그녀의 딸이 게스트 확인차 왔다. 그 당시 20대 초반이었던 딸보다 나이가 많은 집주인의 딸(26세라고 말해줬더랬다.)은 우리 얘들을 보곤 너무 반가워하면서도 수줍어했다. 한국 아이돌을 좋아한다는 그 집 딸은 코리아를 동경하는 스페인 처자였는데 코리아의 위상이 새삼 느껴졌었다.
이 숙소를 고른 이유 중 하나는 옥상 테라스였는데 생각보다 좋았다. 3일 머무르는 동안 아침은 옥상에서 먹었는데 선선한 아침에 대성당 종탑에서 종이 치는 소리를 들으면 상쾌했다.
아이들이 싫다 하면 그릇 들고 옥상을 오르락내리락 하지 못했겠지만 이른 아침 옥상에서 먹는 식사는 쉽게 할 수 없는 경험이니 두 아이들이 콩알처럼 움직여 아침을 챙겨 먹었더랬다.
늦은 밤 나와 딸은 샤워를 하고 옥상 테라스에 올라 별을 봤다. 딸은 머리를 말리며 지금 사위인 남자 친구와 카톡을 했고 나는 누워 밤하늘을 바라봤다. 늦은 밤 옥상 선배드에 누워 낯선 스페인의 하루를 보내는 시간은 감사했다.
세비야에 머무르며 코르도바를 다녀왔는데 사진을 찾아보니 알카사르 정원을 찍은 동영상이 남아 있었다. 세비야 숙소는 2017년 7월 17일에서 7월 20일까지 3일을 머물다 그라나다로 이동했다.
세비야에서 그라나다까지는 기차를 타기로 되어 있었는데 철로 공사를 하여 버스 편으로 이동했다. 기차표를 예매했는데 기차역에 가니 안내원이 사람들을 모아 그라나다행 버스 편에 우리를 태웠더랬다. 도착시간이 예상 시간과 달라 조금 걱정을 하며 그라나다 숙소 주인(젊은 여자 호스트: M Jesus) 에게 메시지를 보내니 걱정 말고 조심히 오라는 답 메시지를 바로 보내줬더랬다. 우린 긴 시간 동안 졸다 깨다를 반복했다. 그라나다 기차역에 내린 우린 바로 택시를 타고 숙소로 향했는데 워낙 숙소가 도심 한복판이라 기사분이 걱정을 했다. 택시 기사분은 숙소까지 택시가 들어가지 않으니 가장 가까운 큰 도로에 우릴 내려주고는 찾아갈 수 있겠냐는 듯 찾아가는 방법을 천천히 설명해줬는데 다행히도 우린 눈이 여섯이어서 설렁설렁 잘도 찾아갔다.
그라나다 숙소는 정갈하고 도회적이었다. 개수대에는 설거지와 재료를 손질만 하고 현관을 살짝 돌아 들어간 공간에서 요리를 하도록 구성돼 있었다. 철저히 혼자 요리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공간은 협소했다. 그라나다에서 3일 머무르는 동안 스테이크, 파스타, 스파게티를 해 먹었는데 모두 기대 이상으로 맛있었다. 적당히 부족한 식탁이 맛을 불러온 게 아닐까 한다.
딸과 함께 사용한 안쪽 침실 사진에 프랑스의 샤르트르 대성당 그림과 이태리의 피렌체 베키오 다리 그림이 걸려 있었다. 주인이 여행객들에게 많은 여행지를 상상하게 하고 싶어 이런 그림을 걸어놨나? 했다. 사실 가운데 그림은 익숙한 듯 낯설었는데 이태리 코모 호수의 팔라조인지 어디일까? 궁금했다. 침실로 가는 거실 벽에는 프라하의 올드 타운 브리지(old town bridge) 사진이 걸려있어 집주인이 유럽 유명 여행지를 좋아하는구나 했다.
그라나다는 2017년 7월 20부터 7월 23일까지 4일을 머무르고 우린 비행기를 타고 바르셀로나로 이동했다. 바르셀로나 호텔에서 4박을 하며 사방을 헤집고 돌아다녔다. 가우디 건축물을 보고 싶다던 아들은 만족해했고 시각디자인을 전공한 딸도 재미있게 구경해서 그 어느 때보다 즐거운 여행이었다.
내가 잠시 빌려 사용했던 집들은 대 저택도 아니고 넓은 맨션아파트도 아닌 그냥 그곳 주민들이 사는 작은 집들이 었다. 혼자 살거나, 둘이 사는 공간이었는데 간이침대를 거실에 놓고 세명의 게스트를 받는 슈퍼 호스트의 공간들이었다. 호스트들과 사전에 메시지를 주고받고, 도착하여 호스트를 만나고, 체크 아웃한 후엔 메시지로 그 집들을 가볍게 평가하였는데 그 과정이 좋았다. 번거롭다면 번거로울 수 있는 호스트와의 연락이, 집을 찾아가는 일이, 잠시 호스트를 기다리는 일이 좋았고 스페인 도시들에 살고 있는 평범한 일반인을 만날 수 있어서 좋았다.
생각해보면 과거 수많은 여행지의 호텔 리셉션 장소에도 늘 상냥한 사람들이 내게 말을 걸고, 정보를 알려주고, 미소를 지었지만 그중 그 누구도 기억이 없는데 반해 이상하게도 에어비엔비 숙소의 호스트는 모두 기억이 난다. 많은 말을 하거나 밥을 먹거나 차를 마시거나 하지 않았는데, 단지 그들의 집을 빌려 며칠 머물렀던 기억밖에 없지만 그들의 얼굴이 이 글을 쓰면서도 생각나는 것을 보며 신기할 지경이다. 왜 그들은 기억 날까? 하고 말이다. 그건 모르는 공간이 주는 긴장감과 그 공간을 책임지는 사람에 대한 궁금함이 함께 뭉쳐져 내 감성과 기억의 공간에 인상 깊은 자국을 남겨서 그런 게 아닐까 싶다. 관계의 개별성, 사적 거래의 책임감이 불러오는 효과가 아닌가 한다.
추신: 더 많은 사진이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스페인의 세 도시에 머무르던 공간을 잠시 공유해 보았습니다. 이상 꽃뜰님의 전편 가우디 건축 구경 댓글에 대한 스페인 가정집이란 다른 답글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