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시간 2
지난주 토요일 아들이 한국을 떠났다.
서울에서 대학 1학년 1학기를 보내던 아들은 주말마다 내려왔다. "뭐하고 지냈니?" 하고 물으면 기숙사에서, 커피숍에서 인터넷으로 강의를 듣고 과제를 냈단다. 그러곤 "이어폰 전문 매장에 갔어요. 서울은 전문 매장에 정말 좋은 음향시설을 갖춰놓고 있더라고요. 가서 음악 들어요. 다양한 이어폰, 헤드폰, 스피커들이 있거든요. 소리가 너무 좋아요"라고 말이다. 아들방 서랍에는 수많은 이어폰과 헤드폰이 꼭꼭 숨어있다. 클래식과 게임음악을 좋아하는 아들은 좋은 소리를 찾아, 좋은 소리를 들려주는 기계를 찾아 오랜 시간 정성과 시간을 들였었다. 남편이 앰프를 만들고서도 소리의 퀄리티는 아들에게 품평받으니 남다른 귀를 갖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니 서울서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좋은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전문 매장을 가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이었겠는가?
가끔 아들은 저녁 산책을 하며 서울의 노을 사진을 보내줬다. 그것 말고는 헬스장에 가서 개인 피티를 하고 소소한 일상을 보내며 기숙사 룸메이트와 아주 가끔 밥을 사 먹는다 했다. 뭐 하는 게 별로 없었다. 동아리 모임도, 학과 동기 모임도, 학과 선후배 모임도, 교수와의 만남도 없었다. 모든 게 화상으로 진행되니 굳이 서울에 있어야 할 이유도 없지만 그래도 기숙사에서 지냈다.
아들이 기숙사에서 지낸 이유야 자식이 스무 살이 넘어 성인이 되면 집안을 떠나 자신의 독자적인 영역을 만들어야 한다는 남편과 내 생각 때문이었다. 스무 살이면 생각도 많아지고, 친구도 많아지고, 활동의 범위도 넓어져야 하니 말이다. 그 긴 시간을 아들이 어찌 활용하고 채우는지는 궁금하지만 부모가 상관할 바는 아니다. 토요일에 집을 온 아들은 친구들을 종종 만나거나 친구 같은 영어 선생님을 만나거나 게임을 하곤 일요일 저녁이면 간단한 짐을 챙겨 고속버스를 타고 올라갔다. 그렇게 몇 개월 지내는 중 아들은 홀로 미국의 대학에 지원하곤 나와 남편에게 합격을 했으니 미국에 가겠다 했다. 아들은 전자공학부를 다니고 있었고 미국 대학도 같은 전자공학부를 지원하여 합격했다.
아들이 대입 준비를 하며 지나가듯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한국에선 너무 어렵게 살아요. 희망고문이 너무 심해요." 그리 유별나지 않은 아들이지만 한국의 경쟁, 특히 대입 경쟁이 만만치 않음을, 대학을 들어가면 바로 취업준비에 들어가는 현실을, 취업문은 너무 좁음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진로 선생님께, 담임 선생님께 듣고 있었다.
그때 내가 아들에게 말했었다. "희망고문이 심하지 않은 나라가 어디 있니? 사람 사는 곳이 다 거기서 거기지. 어느 수준에선 모두 좁은 문 앞에 서게 돼 있어. 피라미드 꼭대기는 어느 곳이나 좁아. 그리고 그 좁은 문앞에 서지 않아도 돼. 꼭 그곳에 설 필요는 없어. 자기 분수에 맞게 살면되지."했을 때 아들은 "중간도 좁다면 그건 문제죠"했었다.
아들이 느끼는 사회가 내가 느끼는 사화와 다르구나 싶었다. 직장을 갖고, 한 가정을 이루고 사는 나와 이제 모든 것을 이뤄나가야 하는 아들이 보는 사회는 너무도 차이가 컸다. 그리고 중간도 좁다면, 그건 아들만의 문제가 아닌 그렇게 많든 어른의 책임이었다. 그래 서였나보다. 아들은 최소한 다른 세계를 보고 다른 세계에서의 교육과 시간을 갖고자 결심했다. 아들이 무엇을 선택하던 그건 아들 몫이다.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고 싶다기에 우리 부부는 딱히 반대도 찬성도 아닌 대답을 했다. "가고 싶으면 네가 준비하렴. 뭐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고" 했다. 아들은 혼자 준비했다.
비자를 신청하고, 학교의 오리엔테이션을 화상으로 진행한 후, 비자를 받고, 기숙사를 확정 짓고는 출국 비행기 티켓을 끊고 우리 부부에게 일정을 알려줬다. 그러곤 8월 14일 오전 10시 40분 시카고행 비행기를 타겠다 말한 게 두 달 반 전이다. 아들이 알아보고 아들이 진행하여 아들이 떠났다. 코로나 검사를 8월 12일 하고 13일 음성 확인서를 받고 유학생 해외계좌를 만들고 카드를 받는 소소한 일들을 아들은 운전면허를 3주 전에 따고서는 혼자 차를 몰고 다니며 하나씩 퀘스트를 해결하듯 처리해 나갔다.
아는 지인의 아들이 미국 유학을 가기 전 백신 1차를 접종하고 간다기에 남편에게 아들도 백신을 맞도록 해야 하는 게 아니냐고 하니 남편은 가서 맞으면 될 것을 뭘 그러냐 했다. 내가 아들에게 잔여백신이나 노쇼백신을 알아보라 하니 아들은 한 이틀 핸드폰을 쳐다보다 어느 날 저녁을 먹으며 잔잔하게 말했다.
"학교에서 백신 신청을 받더라고요. 8월 17일 오전에 백신 신청을 했어요. 미국 가서 맞으면 되죠. 백신이 남아도는 나라라 쉽네요. 걱정 마세요. 가서 맞을게요."
엄마의 걱정을 알아챈 아들이 백신 일정까지 잡아놓고는 걱정하지 말란다. 혹여 접종 후 아플까 걱정이 됐지만 수많은 유학생들이 그리 지낼 것이니 걱정을 접었다.
아들이 남편에게 "유심칩을 사 갈까요?" 물은 게 화근이었다. 남편이 "공항에 내려서 사면되지 뭘 사 가지고 가니?" 했다. 아들은 "그러죠" 하고 출국한 아들은 시카고 공항에서 카톡 전화로 "이곳 공항에선 살곳이 전혀 없어요. 공항이라 와이파이가 돼서 연락해요. 사 가지고 올걸 그랬어요" 했다. 잘 알지 못하는 남편의 판단이 아들을 곤혹스럽게 한 듯했다. 그러곤 하루가 지나고도 연락이 없었다. 기숙사에 잘 들어갔는지 말이다.
하루가 지나 내가 카톡 전화로 연락을 했지만 받지 않았다. 남편이 잘못한 것도 아닌데 남편에게 화가 났다. 너무 미웠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참견했다고 남편은 내 눈총을 하루 종일 받았다. 남편은 한참 핸드폰으로 유심칩 관련 정도를 검색하더니 "한국에서 사가야 하네" 했다. 기가 막혔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척한 결과가 아들과의 연락 차단이었다. 남편은 그렇게 말하면서 말끝에 "그런 걸 자기가 알아서 해야지 왜 나한테 물어?" 했고 내가 "미국 연수 갈 때도 당신이 미국에서 산다고 할 때 내가 여기서 사 가지고 가야 편하다고 주장해서 몇 날 나랑 그것 같고 티격태격한 것도 모자라서.... 타국에 도착해서 여러 일을 하는 게 그리 쉬운 줄 알아?" 하며 정말 화가 났다. "당신은 사 갖고 가고선 아들 보고 왜 거기서 사라고 했어? 참 이상한 사람이야" 했다. 아들은 없는데, 아들과 연락이 닿지 않으니 우리 부부가 다퉜다.
다음날 늦은 저녁 아들과 통화가 됐다.
"엄마 피곤해서 잤어요. 기숙사에 도착해 바로 시카고 시내를 나가 유심칩을 샀어요. 그래서 피곤했어요. 가게 점원이 한국에서 오늘 도착해 바로 유심칩 사러 여길 왔다니 놀라더라고요."
"엄마가 아빠 구박했어. 그냥 편하게 사가게 두지 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체했다고 말이야. 다행이다. 그냥 며칠 쉬어라."
"알았어요. 걱정 마시고 쉬세요. 살 것도 있어서 마트도 가야 하고 은행도 가고 해야죠."
"알았다. 잘 먹고, 잘 지내라. 사랑한다 아들!"
전화를 끊고 나니 숨이 쉬어졌다. 하루 종일 답답했는데 아들 얼굴과 목소리를 들으니 좋았다. 남편이 옆에 있다 어깨를 펴며 말했다.
"거봐 잘 지내고 있네. 뭔 걱정을 쓸데없이 해. 얼마나 좋아. 도착하자마자 시내를 뒤져서 유심칩도 사고, 그게 다 교육이지 뭐."
남편도 내 구박을 받으며 마음에 걱정이 있었겠지만 잘 가서 하나씩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니 다행이다 했다. 2002년 8월 혼자 밀라노에 도착해 그 모든 일을 하나씩 해결하던 내 과거의 스트레스가 한가득 몰려왔다. 아들도 그런 시간을 보내고 있으리라 생각하니 슬프기도 하면서 기뻤다. 그게 모두 성장하는 과정이니 말이다. 사랑하는 아들이 건강하고 행복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