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시카고에 간 뒤 처음 한 달 걱정이 넘쳤다. 몇 개월이 지나니 걱정은 생활이 됐다. 자식 걱정도 일상이 되면 평범해진다. 모든 부모가 그렇다. 걱정을 뒤꿈치에 달고 산다. 부모가 감내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아들이 유학 가기 전 내게 한 말이 맴돌았다.
작년 여름 아들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힘들다는 고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을 맞아 1주 정도 집에 있었다. 기숙사에서 짐을 한가득 챙겨 온 아들은 아침부터 밤까지 공부를 했다. 고3이라고 해야 부모가 해줄 일이 없다. 밥을 챙겨주는 일 말고 뭐 별다른 일이 있겠는가? 나는 이층 서재에서 여섯 번째 전공책 초안을 작업하고 있었다. 초안을 잘 잡아야 작업이 수월하니 어깨에 힘을 주고 작업 중이었다. 오래된 선풍기가 건들거리며 미풍을 내게 보내고 있을 때아들이 다가와서 "뭐하세요?" 했다. 3차원 가상착의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을 돌리며 이것저것 구상을 하고 있던 찰나였다. 아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오~~. 옷이 정말 멋있네요. 진짜 같아요. 엄마가 작업한 거죠?" 했다. 등짝에 땀이 흘렀지만 아들 말이 얼마나 시원했는지....
똑같은 작업을 하고 있어도 남편은 쳐다보는 둥 마는 둥 하며 짧게 "좋네" 하지만 아들은 귀엽고 깜찍한 모습으로 내 작업을 평하니 여름 한낮 계곡물에 발을 담그듯 지친 마음이 좋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니? 엄마가 심혈을 기울여서 만든 패턴인데, 어때? 옷이 괜찮지? 이 패턴으로 가상착의 관련 교재를 작성 중이야. 여성복, 남성복, 스포츠웨어 섹션으로 나눠하려고. 어때 학생들이 관심 있어할 것 같니?" 하고 물으니 아들은 "저라면 이 수업은 꼭 들을 것 같아요. 일단 있어 보이잖아요!" 하며 함박 웃었다. 인생의 달콤함! 별것 없다. 힘이 절로 났다. "3차원 프로그램은 마우스 작업이 많아서 어영부영 앉아 있다 보면 세 시간이 훌쩍 간다니까. 아이고 죽겠다. 여하간 네가 좋다 하니 힘이 난다. 힘이." 아들은 밝게 웃으며 내게 말했다. "엄마! 너무 애쓰지 마세요. 힘들어요." 고3 여름방학에 하루 종일 공부를 하던 아들이 내게 너무 힘들게 살지 말란다. "그런가?" 하면서도 그 말에 참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올 초 대학을 합격한 아들이 집에서 쉬고 있을 때 나는 본격적으로 교재를 지필하고 있었다. 2D 패턴 프로그램으로 패턴을 제작하고, 3D 가상착의 프로그램으로 옷을 착의하고, 각 과정을 캡처하여 일러스트 파일로 옮기고, 일러스트에서 주요 부위 설명을 기입하고, 다시 파일을 이미지 파일로 저장하여, 워드 파일로 옮긴 후 과정을 설명하는 작업은 다양한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것인지라 보기만도, 하기만도 정신 사납다. 그런 작업만 이십여 년을 하던 터라 우리 집 아이들은 커다란 모니터 앞에 앉아 있는 나를 보면 지나가다 "엄마 좀 쉬세요. 힘들어요." 하곤 했다. 올 초도 아들은 이층에 올라와 "점심에 칼국수를 먹으러 가요" 하며 몇 분 내 옆에서 작업하는 것을 보더니 웃으며 말했었다.
"엄마. 키보드를 더 좋은 것으로 바꿔 드릴까요? 마우스는 제 것 쓰실래요?"
"왜 이것도 좋은데 뭐 이상해 보이니?"
"게임 전용 키보드와 마우스는 반응속도가 엄청 좋거든요. 원하시면 제 것을 써보시겠어요?"
"아니 됐어. 이것도 좋아. 아들밖에 없네. 엄마 챙겨주는 건"
"그럼 마우스 패드를 넓은 것으로 바꿔 드릴까요?
"그래 줄래? 그럼 마우스 패드를 바꿔주렴. 넓으면 좋겠네."
"너무 힘들게 살지 마세요. 엄마~~."
올 초 겨울에 뜨근한 칼국수를 먹으며 아들은 컴퓨터 작업 시 전용 의자의 중요성을 한참이나 설명하며 자세가 중요하다 했더랬다. 아들은 칼국수를 먹으면서도 방학이니 작업을 여유롭게 하면 좋겠다했었다.
올여름 아들이 미국에 싸갈 짐을 정리하다 이층으로 올라왔다. [나는 내 딸이 이기적으로 살기 바란다]의 마지막 원고를 살피고 있던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다 "엄마 제 의자 쓰실래요? 높이 조절이 되는 컴퓨터 전용 의자라 좋은데 갖다 드릴까요?" 했다. 내가 돋보기를 쓰고 있어 할머니처럼 눈을 치켜뜨며 아들을 쳐다보니 아들이 생긋 웃었다. "그 의자가 그리 좋니? 그럼 그래 보던지" 하니 아들이 "모니터도 크고 좋은데 쓰실래요? 키보드랑 마우스도 좋은데. 세팅해 드릴까요?" 했다. "너 짐 싸는 것도 바쁜데 됐다. 그냥 내버려 두면 엄마가 아빠랑 알아서 할게" 하니 아들이 "밝게 웃으며 그러세요. 그럼 의자만 갖다 놓고 세팅해 드릴게요" 했다. 아들이 의자를 가져다 세팅하고 앉아보라면서 이것저것 만져 주곤 점심은 시원한 콩국수를 먹으러 가자 했다. 콩국수를 먹으며 아들이 내게 "엄마! 나이를 생각하세요. 힘들게 살지 마세요. 나이에 맞게 일을 줄이셔야죠." 했다. 시원한 콩국수가 더 시원했다. 지나가며 건네는 한마디가 시원한 여름 계곡 바람 같다.
"너무 애쓰지 마세요. 힘들어요" 했던 아들이 시카고에서 얼마나 애쓰고 살고 있을지... 어쩌면 그리 애쓰며 살고 있지는 않을지 모르는 일이다. "힘들게 살지 마세요. 엄마!" 했던 말에 사실 아들은 '저는 힘들게 살고 싶지 않아요'란 의미를 담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타국에서 사는 게 한국보다는 나아 보여서 간 것인지, 미국식 교육과정이 자신에게 더 잘 맞는다 생각해서 간 것인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아들이 말한 엄마 너무 애쓰지 마세요. 힘들어요. 했던 말은 아들이 내게 해 준 말이지만 사실은 젊은 자신들이 듣고 싶은 말은 아닌지, 너무나도 과도하게 애쓰는 것이 당연하다 여기는 것을 거부하는 마음이 담긴 말은 아닌지 뒤돌아 보며 되짚어 본다.
아들! 너무 애쓰지 말아라!
성실하게 살아도 삶이 한 인간을 너무 힘들게 한다면 그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제도와 사회구조의 문제이니 말이다. 거대 사회 구조를 어찌 한 개인이 모두 감당하겠니? 너무 애쓰지 말고 성실히 선한 마음으로 살아라! 매 순간 최선을 다하고 투쟁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마음속에 독기를 품을 수도 있고, 저도 모르게 편을 가르고, 저도 모르게 자신이 가진 능력을 과신하고, 저도 모르게 경계를 가르며,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자신이 쟁취한 것이라 착각하며 사니 말이다.
아들 그냥 너는 성실하고 선한 마음으로 살기를 바란다.
자전거 2 2011년 10월 3일 월요일
이번 주 월요일은 개천절이다.
그래서 학교를 쉈다.
나와 엄마는 자전거를 타러 가기로 했다.
강변에서 새로운 길로 자전거를 타기로 했다.
우리는 홈플러스 쪽으로 향했다.
한국 발전연구소에서 길이 끝났다.
거기서 낚시를 하는 사람이 보였다.
하지만 물고기가 잡히지 않은 듯하다.
집에 돌아가서 밥을 먹었다.
날씨도 따스하고 시원해서 좋았다.
아들이 사 학년 때 쓴 일기다. 그날 낚시꾼에겐 물고기가 잡히지 않았지만 그날 잡히지 않은 물고기는 얼마나 큰 행운이었겠는지. 낚시꾼은 성실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운이 없던 날이지 싶다. 아들이 2011년 10월 3일 개천절에 나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나서 날씨도 따스하고 시원해서 좋았다 하니 다 지난 일기장의 네 마음이 지금 내 마음으로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