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일이다. 날 좋은 토요일 오후. 남편이 호수를 뛰자고 꼬셨다. 뭐 대단한 꼬임이라고 거절하겠나? 대단한 정성이 드는 것도 아니고 돈이 드는 것도 아니니....
은파 호수를 10분 정도 뛰었을까? 숨이 턱턱 막힌다. 내가 왜 뛰고 있나? 남편이 살살 옆에서 페이스를 유지해 주고 있지만 마스크에 모인 수분이 내 숨을 삼킬 것 같다. 내 한 몸 들어 올려 앞으로 나가는 이 단순한 일이 이리 힘들다니! 느그적 느그적, 어기적 어기적 걷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나의 뜀박질이라고 해야 살짝 발끝을 밀어 올려 한 40센티미터 앞으로 다른 발을 내딛는 것인데... 빨리 걷는 것과 별 차이도 크지 않은 속도인데... 빨리 걷기나 진배없는 느린 뛰기인데 너무 힘들다.
오만가지 생각이 든다. 그냥 걷는다고 할 걸. 호수 놀이터에 비치된 자전거나 타자할 걸. 집에서 TV나 보며 백팔배를 하자 할 걸. 뛰다 말게 레깅스가 아니라 등산바지를 입고 올 걸 등. 날이 좋으면 남편은 호수를 한 바퀴 돌곤 볼 빨간 모습으로 집 현관문에 들어선다. 볼 빨간 모습은 늙으나 젊으나 싱그럽다. 그래서였을까? 남편이 뛰고 오면 "담에 나도 같이 갈게" 하곤 했다. 그런데 가을 들어서 남편이 같이 뛰자 했지만 꾀가 났다. 계절로만 가을이 찾아오나? 내 몸과 마음에도 가을이 찾아왔다. 낙엽을 떨구는 나무처럼 말이다. 못 이기는 척 레깅스를 입고 나섰는데 아니나 다를까 20분 전 내 결심이 후회막급이다. 어쩌겠는가? 뛰기 시작했으니.... 마음을 앙다물었다.
올여름 땡볕에도 서너번 호수를 달렸는데 늦가을 낙엽진 호수를 달리니 맘이 다르다. 바닥에 온갖 낙엽이 뒹굴고 뾰족한 잔돌이 낙엽 옷을 뚫고 빼족하다. 패딩을 입은 남녀노소가 마스크를 쓰고 햇살 좋은 호숫가를 느긋하게 걷는 모습이 잔잔했다. 그들은 멀리서 평화롭게 오다가 스치듯 부드럽게 다가와 내 숨과 함께 거칠게 떠나갔다. 뜀박질은 인생 같다. 멀리서 보면 단순한 동작이지만 옆에서 지켜보면 빠르고 정작 내가 뛰면 죽을 지경이니 말이다. 동일한 동작과 속도도 누가, 언제, 어디서, 하느냐에 따라 느낌도 감정도 태도도 달라지니.... 뜀박질처럼 인생은 그냥 바라보면 늘 멀고 뿌연하다. 내게 닥치지 않은 일은 자연 멀고, 남이 행하는 일은 태연하고, 내 발등을 덮은 일에는 정작 허둥지둥이니 뜀박질은 인생 같다. 별것 아닌 것도 해보지 않으면 알지 못하는 게 삶이다.
지난 8월, 9월에도 달렸던 길이다. 팔월 이 길은 뜨거운 공기와 땅 내음, 나무 내음이 한가득이었다. 열기로 들끓던 대지와 나무가 토해내는 숨이 뜨거웠다. 그 속을 뛰는 내내 힘들었다. 뜨거운 여름이, 계절의 젊음이 내게는 사치 같았다. 그런데 같은 길을 가을에 달리니 딱 맞춤이다. 늦가을 낙엽들이 뿜어내는 쓸쓸한 내음이 차갑지만 좋았다. 낯설지만 낯설지 않은 추억과 기억들이 달려왔다. 어릴 적 달리던 기억과 나의 사랑스러운 두 아이들이 달리던 모습이 뛰어왔다.
나는 뛰는 게 좋았다. 엄마 심부름을 갈 때도, 친구 집을 놀러 갈 때도 콩알처럼 뛰어다녔다.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사물들이, 바람을 가르고 지나가는 것이 좋았다. 고정된 사물이 나와 함께 출렁이는 것이 좋았다. 나를 움직여 고정된 사물이 변화된처럼 보이게 하는 것. 내겐 놀이였지 싶다. 내가 뛰던 모습과 딸이 총총 달리던 모습, 아들이 강종 강종 뛰던 모습이 남편의 발소리와 겹쳤다. 호수에 반짝이는 가을 햇살과 함께 우리 가족이 함께 뛰었다. 딸이 성큼성큼 긴 다리로 뛰고, 두 주먹을 움켜쥐고 누나를 쫓아가던 아들이 내 눈앞에서 뛰듯 다가왔다. 다시는 볼 수 없는 지난 추억이 잠시 내 뜀박질로 들어와 지나갔다.
남편은 4km를 지난 지점에서 이제 1km로만 뛰면 된다 일러줬다. 자주 뛰어야 몸이 익숙해지는데 가끔 와서 뛰는 나로선 이 길이 언제 끝날까 싶다. 주차장에 세워둔 차를 보니 뛰던 다리는 멈추고 멈췄던 마음이 차로 달렸다. 머리가 핑 돌고 목이 말랐다. '참내 무슨 대단한 일을 한 게라고. 운동한답시고 5km 뛰고선 마라톤 풀코스를 뛴 것처럼 기쁘다니...' 남편이 땀을 뚝뚝 흘리며 물병을 줬다. 남편의 새빨간 두 볼에 땀방울이 흘렀다.
"아니~~ 잘 뛰네. 내가 당신 따라갔네. 오늘은 32분에 달렸네. 너무 빨리 뛰었어."
"아이고 힘들어. 심장이 아프다. 이러다 죽는 거 아냐?"
내가 차 시트를 눕히며 심장이 아프다니 남편이 맥을 잡고는 "심장이 땡글땡글 잘 뛴다"하며 웃는다.
"잘 뛰네.. 맥이 딱 좋아. 자 이제 집에 가서 쉬자. 오늘 할 일 다 했다."
"아니 당신은 안 힘들어? 생각해보니 당신과 뛰다 죽으면 나만 손해인데. 사망보험은 내 것만 들어놔서.."
"그러니까 당신 오래 살라고 내가 이렇게 러닝 메이트 하는 거 아니야."
"이거 나 죽이려고 이 추위에 데리고 나온 것 아냐? 수상하네."
"그러게 왜 그리 빨리 뛰어. 살살 뛰지. 나는 죽어봐야 당신 득 되는 것 하나 없을 텐데. 나 죽이려고 그랬어? 살살 뛰어."
"그러게. 당신은 죽어도 보험금 하나 없으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려야 하는데.... 그럼 나는?"
"당신은 내가 책임지고 살리지... 봐봐~ 건강을 책임지려고 이렇게 데리고 나와 뛰잖아. 이렇게만 지내면 돼~."
"믿어도 돼?"
"믿어봐. 왜 그래? 당신 답지 않게. 대범하게 날 믿어~."
눕혔던 차 시트를 바로잡고 내가 남편을 째려봤다. 보험은 나만 들어있다. 각자 경제생활을 하지만 남편은 자기 죽으면 남은 사람은 알아서 살라며 자신 보험은 들지 않았으되 내 보험만 들어놨다. 남편은 보험 얘기만 하면 내게 말한다. "내 인생 최대 보험은 당신이야" 참 달콤한 말이지만 정말 믿어도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