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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루시아 Nov 07. 2021

가을 소풍

느린 여행, 느린 시간

가을이다. 가을이면 일단 대청소를 해야 하건만 하기 싫다. 하늘이 높고 좋으니 마냥 나가 놀고만 싶다. "하늘 좋다"라고 한숨 섞인 탄성을 내니 남편이 "우리도 어디 놀러 갈까?" 했다. 


"어디? 정말? 가자~~ 아무 데나 가자." 

"그럼 제주도나 가볼까? 군산공항에 오전 비행기가 생겼다던데."


그냥 던진 말에 남편이 이리 빨리 대답하다니.. 군산에 제주도 가는 오전 비행기가 있다니. 내가 세상 돌아가는걸 너무 몰랐나? 사람들이 제주도에 떼 지어 몰려간다고는 하지만 군산에서 오전 비행기가 있다니. 국외여행이 막혀버려 국내 여행객을 위한 항공편 개편이 있었나 보다. 남편이 밝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럼 표 끊는다."

 

10월 둘째 주에 하늘 좋다 했는데 셋째 주말로 예약을 했단다. 동작이 초스피드다. 그런데 남편이 코로나 백신 부스트 샷을 여행 가기 이틀 전에 맞았다. 여행 전날 열이 났다. 몇 년 만에 가는 제주도 여행인데 여차하면 가을소풍이 날아가겠구나 싶었다. 하늘 좋은 가을날 소풍이 통으로 날아갈 판이었다. 놀러 갈 맘에 남편을 살뜰히 챙겼다. 어쩌겠는가! 열이 내려야 비행기를 타니 말이다. 


"아니 여행 가자 날 잡아놓고 부스터 샷을 맞으면 어쩌시나?~~" 내가 이것저것 군것질 거리를 챙기며 구시렁대니 남편이 "부스터 샷은 일정 조율이 어려워. 정해진 기간 내에 맞아야 하니 방법이 없었어" 한다. "아 그래요. 알았어요. 자요. 그냥 푹 자. 눈뜨지 말고 주욱~~ 자요~" 참 사람 맘이 요사스러워서 남편 건강을 챙기는 것인지 놀러 갈 일정이 틀어질까 노심초사하는 것인지. 땅콩을 굽고, 탱글 거리는 포도를 씻어 침대 옆 협탁에 놓아두며 절로 웃음이 난다. 


춥지도 않은데 방에 불을 넣고 긴팔 옷을 꺼내 남편에게 입혔다. 혹 한기라도 들면 큰일 날 터이니... 협탁에 늘 대기 중인 타이레놀을 꺼내 물 잔에 물을 따라 남편 턱밑에 냅다 들이밀었다. "약 먹어요" 하니 남편이 "아까 먹었어. 안 먹어도 돼" 하며 머리를 말미잘처럼 흔들었다. 내가 "아냐. 두세 알 먹는 사람도 있다는데 더 먹지?" 하니 남편이 한심스러운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뭐 좋은 거라고 약을 콩알처럼 먹어. 지금은 됐어." 했다. 늦은 저녁 혹여 몰라 다시 약을 디밀었고 남편은 못 이기는 척 약을 먹었다. 내가 감기 기운이 있다 하면 언제나 타이레놀이나 아스피린을 턱밑에 들이대던 남편이었다. 가을 소풍에 개수가 문제겠는가.


여행 전날 밤 족욕기를 틀어 미리 예열한 후 남편에게 발을 넣고 20분 있으라 하니 남편이 "당신 덕에 한기가 풀린다나?" 내가 한 것도 없이 거저 덕담을 듣는다. 그러곤 남편은 땀을 흘리며 잠을 잤다. 이마와 목 뒤를 손으로 자주 쓰다듬어 열을 체크했다. 땀이 얼마나 나는지. 열기가 어떤지 말이다. 새벽에 얼굴을 쓰다듬으니 열기가 가셨다. 여행을 가겠구나 싶었다. 다행이다. 가을 소풍이 성큼 다가왔다. 모닝커피와 콩 두유를 챙겨 남편을 깨우니 방긋 웃는다.  


남편과 즐거운 마음으로 군산공항을 가니 주차할  곳이 없었다. 차를 인근 주차장에 가져가니 주인장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다. 이렇게 사람이 많다니... 우리 부부 같은 사람도 움직이니 사람 맘이 다 똑같은가 보다. 비행기가 꽉 찼다.  

바람 많고 돌 많은 제주도를 그냥 실컷 쏘다녔다. 목적도 없이 그냥 돌아다녔다. 지나가다 배고프면 밥 사 먹고 지나가다 걷고 싶으면 차를 세워 걷고... 자꾸 무얼 계획하면 다툼이, 짜증이, 조바심이 찾아오니 말이다. 좋은 공간에 있으니 그냥 내버려 두듯 있었다.

한치 빵이란다. 너무 맛있어서 두 번이나 사 먹었으니.. 치즈가 주욱 늘어나는 게 정말 창의적인 빵이다. 
해안에서 커피 한 잔..

한 해가 다르게 새롭게 뭔가가 생기는 제주도를 사오 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하니 길을 가다 보면 낯선 박물관, 정원, 카페, 식당이 수두룩했다. 가볼 엄두도, 가고 싶은 마음도 없었지만 낯선 그 박물관, 정원, 카페들이 과연 어떤 모습으로 채워졌는지 호기심만 키웠다.  


목적의식 없는 여행의 백미는 편안함이다. 뭐 하려 작당하지 않았기에 의무도 책임도 없다. 군산으로 돌아오는 날 비행시간이 6시간은 남아 있어 제주도를 빙 돌아볼까 했더니 남편이 백신 후유증이라며 운전하기 싫다 했다.


주유상태를 보니 처음 차량을 빌릴 때보다 160km가 오버돼 있어 내가 빙긋 웃었다. "여보 운전은 내가 할게. 그냥 차에서 자다 깨다 하셔. 그럼. 내가 적당한 식당을 찾아 세우고 공항으로 살살 갈게. 그냥 자. 난 드라이브를 하고 싶으니 말이야." 남편은 그러던가 말던가 하라며 눈을 감고 앉았다. 아침 10시부터 오후 2시까지 서쪽에 위치한 호텔에서 섭지코지로, 섭지코지에서 제주공항으로 운전했다. 제주도 삼분의 일을 돌았다. 너무 좋았다. 여행지이니 쌩쌩 달릴 일도 없이 풍광을 보며 차가 막히든지 말든지 살랑살랑 다녔다. 언제 다시 제주도에서 이리 쏘다닐지.... 참 좋은 추억이다. 


렌터카를 반납하며 남편이 활짝 웃었다. 아침부터 공항에 도착할 때까지 남편이 졸다 깨다 반복하며 푹 쉬기도 했거니와 정확하게 정해진 시간에 차량을 반납하고 기름을 조금 넣으라는 내 말을 우겨 넉넉히 넣은 것이 조금은 아까웠는데 그걸 정확하게 감안하여 드라이브한 것이 흡족했나 보다. 느긋하게 제주의 낯선 곳을 돌아다니니 좋았다. 한 번도 달려본 적 없던 길을 운전한 것도, 새 곤새 곤 잘 자는 남편을 태우고 풍광 좋은 제주의 길을 달린 것도 모두 좋았다. 


가을 소풍! 느린 여행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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