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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루시아 Nov 23. 2019

사랑에 필요한 가장 작은 공간

목욕은 사랑의 대화 6


대학에서 일을 하다 보면 특정 사안을 갖고 1박 2일 연수를 하는 경우가 있다. 대학 현안 발표나 토의가 끝나면 저녁시간은 식사와 가벼운 술을 곁들인 담소의 시간을 갖는데, 공교롭게도 20여 명의 연수 인원 중 일박을 하는 여성은 나뿐이었다.  


식후 수련원 회의실에 마른안주와 술, 음료가 정갈하게 놓여있었다. 교수님과 과장님 몇 분의 건배사가 있고 탁자에 마주 앉은 교직원은 가벼운 목소리로 살아가는 얘기들이 오갔다. 모처럼 집을 나와 동료들과 술을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자리는 대학시절 잔디밭에서 술을 마시듯 편안했다. 이제 막 첫아이 아빠가 된 30대 직원은 “아이 키우기가 이렇게 힘든 줄 몰랐다”하고, 초등학교 자녀를 둔 40대 팀장은 “애 엄마는 애들밖에 모른다”하고, 육아의 기억을 한참 더듬던 50 후반 과장님은 “너무 바빠 자식들이 어찌 자랐는지 기억이 없다”하고, 환갑이 넘은 교수님은 “그냥 사는 거지, 각자”하며 술잔을 비웠다. 그저 사는 얘기들이, 동조 어린 작은 탄식과 맞장구가 오갔다.


 아침을 먹고 출근하는지, 저녁은 가족과 함께 하는지, 여행을 같이 가는지, 주말을 함께 보내는지, 기념일은 챙기는지, 각방을 쓰는지, 개와 고양이에 순위가 밀리는지, 통장은 누가 관리하는지, 청소와 설거지는 어찌하는지 등등, 소소하지만 무슨 지표를 체크하듯 말을 주고 받았다. 코골이가 심해서, 아내 몸이 너무 약해서, 충분한 숙면을 위해서, 아이들에게 자리를 뺏겨서 각방을 쓰며, 취미와 취향이 달라, 아이가 어리고, 애들이 중고등학생 이어 여행이 어렵고, 학원비와 주택담보 대출비로 돈 버는 기계처럼 지낸다는, 이유는 가지각색이지만 결혼생활의 불만들이 테트리스 블록 떨어지듯 토막처럼 나와 차곡차곡 쌓였다.


농담과 토로를 한동안 듣고 있는데, 평소 친분 있던 앞에 앉은 30대 젊은 직원이, 내게 “어떠세요?” 묻길래, “결혼해서 지금까지 남편과 목욕을 함께 해 저도 힘들었지만 잘 견뎠다고나 할까요?” 했다.


아주 잠시 동안 내가 앉은 테이블은 정적이 흘렀다. 모두 눈이 동그래지고 말을 잇지 못했다. 내가 너무 솔직해서 놀란 것인지, 20년 넘게 함께 목욕을 한다는 사실이 놀라운 것인지는 아직도 모른다. 그들이 무슨 상상을 하였는지는 모르나, 질문한 직원분이 “부럽습니다” 하고,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한 40대 직원은 "아직까지 가족끼리 목욕을 하세요? 전 기억이 통~"하며 머리를 흔들고, 50대를 막 바라보는 교수님 한 분이 “아이 뭘 지금까지 목욕을 하고 그래요! 남사스럽게!”하며 붉어진 얼굴로 눈을 흘기고,  이제 막 60대를 넘긴 옆 테이블 교수님이 “이상한 소리가 들리네!” 했다.


“등도 밀고 좋잖아요! 등 맡기려 결혼한 것 아닌가요?” 하니, 누구도 대답이 없었다. 물론 모든 분들은 아니었겠지만, 차마 ‘나도 하는데’라고 나서지 않았겠지만 말이다.  


그분들이나 나나 방이 많아지면 숨을 공간이 많아짐을, 외면하고 외면받을 공간이 많아짐을 미쳐 생각지 못한 게 아닌가 한다. 공간이 커질수록, 챙겨야 할 것이 많아질수록, 부부가 서로의 삶을 장악하려면, 욕실을 공유해야 함을 너무 쉽게 잊어버린 게 아닌가 한다. 욕실은 집의 가장 작은 공간이나 가장 넓은 확장성을 갖는 공간이며, 집의 그 어떤 공간보다 큰 유일무이한 공간임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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