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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루시아 Nov 11. 2019

남편의 풍선 같은 입

목욕은 사랑의 대화 5


남편은 말이 없다. 집에서 밥을 먹던, 식당에서 밥을 먹던, 남편은 자리를 잡으면 핸드폰을 꺼내 시종일관 이것저것 읽는다. 스포츠, 정치 뉴스와 20개가 넘는 카페의 소식을 일처럼 챙겨본다.


그날도 그랬다.

겨울방학이라 전주 빙상장에 나들이하듯 남편의 스케이트 강습에 따라가 기분 좋게 스케이팅한 후 두부전골 식당을 들어갔다. 딸이 3학년 쇼트트렉을 시작하여 6학년이 되고, 아들이 유치원서부터 2학년이 될 때까지 긴 시간 빙상장을 드나들며 놀면 뭐하나 싶어 남편과 함께 스케이팅을 배웠었다. 온 가족이 쫄쫄이 트리코를 입고 함께 스케팅을 하는 재미가 추억이 되어, 그날 점심을 먹으러 가며 아이들과 대전 꿈돌이 동산 야외 스케이트 장에서 눈을 맞으며 온 가족이 스케이팅을 하던 때를 말해도 남편은 핸드폰만 보고 대꾸가 없었다.


식탁은 차려지고, 푸짐한 전골이 끓고, 넉넉한 찬을 먹는 시간 내내 남편은 핸드폰을 들고 혼자 온 사람인듯 밥을 먹었다. 맘이 상했다.  


주말에 온 딸에게 아빠 흉을 봤다. 딸이 “아빠! 그건 예의가 아니지, 왜 그랬어요?”, 남편은 “내가? 그랬다고?” 하며 내가 지어낸 얘기인양 눈을 동그랗게 뜨곤 애매하게 웃었다. 남편은 기억이 없는 척 하지만, 내가 돌아오는 차 안에서 “사람을 무시하는 수만 가지 방법 중 최고의 방법을 사용했어”라고 말했던 기억이 떠올랐을 게다. “이럴 거면 밥을 왜 같이 먹고, 이런 식의 밥을 먹으려면, 왜 같이 살며, 이런 소소한 일상의 예의를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이면 함께 살 가치가 없다”라고 말했었던 것을... 정말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내가 왜 이 남자랑 한 차를 타고 집에오나 싶었다. 남편은 펄쩍 뛰며, “오! 풍부한 상상력과 확대해석이?”하는 말로 상황을 얼버무리려 했다.


사람들은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말하지만 자신이 그 하나를 행하여 다른 이가 지적을 하면 지나친 ‘확대해석’이라 말한다. “우리가 말이 많이 필요하나? 잘 먹었고, 배부르고, 내가 당신 사랑하고 그럼 다 됐지”. 여하간 그날은 맘속에 냉기를 넘어 한기가 내렸다.


한기 서린 그날 밤 목욕을 하러 옷을 벗는데, 남편이 핸드폰으로 뭔가를 열심히 보다 부리나케 욕실 앞으로 뛰어와 옷을 벗었다. 내가 눈을 흘기며 밥 먹을 때도 말 한마디 없으면서 어딜 들어와? 하니 생글생글 웃으며, “아 역시 오늘 스케이팅을 해서 그런지 허벅지가 장난 아니네”라며 수다를 푼다. “밥은 알아서 먹어도, 등은 내가 밀어줘야지” 하며 웃는다. 화가 나서 남편의 등짝을 손으로 찰싹 치며 “나가셔!”했더니, “아이 시원하네, 마침 그곳이 가려웠는데”한다.


그날은 퉁탕거리듯 샤워를 했다. 샤워볼로 남편의 등이 빨갛게 되도록 박박 문지르고, 머리를 감다가 부러 남편의 가슴과 허벅지를 툭툭 쳤다. 남편은 슬금슬금 웃으며, 여기서 때리지 말고 침대에서 때리라는 둥, 오늘은 마음껏 맞아 주겠다는 둥 실없는 소리를 해 캑캑 기침이 날정도의 물세례를 받았다.


화가 나고, 언짢고, 우울하고, 존중과 사랑에 대한 의혹이 들어도 함께 샤워를 하면 감정이 씻겨 나간다. 그래서일까? 목욕탕 대화는 물처럼 흐른다. 벌거벗은 대화는 샤워기 물처럼 직선적이나 부드럽고, 솔직하나 찌르지 않고, 담백하나 풍부하여 상처 난 맘을 단박에 치유한다.


목욕은 사랑의 대화다. 말없는 남편도 목욕탕에선 헬륨을 가득 넣은 풍선 마냥 입이 가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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