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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루시아 Nov 02. 2019

남편의 등

목욕은 사랑의 대화 4


얘들이 콩나물처럼 자랄 때, 부모 역할과 직장생활, 끝없이 밀려오는 일들로 주말에나 남편과 여유 있는 목욕을 했다. 토요일 밤 한가득 욕조에 물을 받으면, 아이들은 안방 침대에서 통통 뛰며 놀다가도 우릴 위해 그림책과 털인형을 가슴에 안고 자러 갔다. 라벤더 향이 글뭉글 수증기처럼 일고 욕조속 거품숨 쉬듯 부풀어 오르면 작은 목욕탕은 수많은 얘기로 가득 찼다. 아이들 얘기, 부모님 얘기, 직장 얘기, 정치 얘기, 책 얘기 등 이야기는 거품처럼 넘치고 물처럼 흘렀다.


두 아이 목욕 친구인 노란 오리, 거북 가족이 자취를 감추고, 두 아이의 돌고래 같은 웃음소리와 첨벙이던 물소리는 아이들 콧잔등에 내려앉은 하얀 거품처럼 사라졌다. 동화 같은 목욕은 지나갔고, 목욕 친구들은 목욕용품으로, 욕조속 거품은 다 사라졌다. 이제 남편과 나는 밥을 먹고, 산책을 하듯, 그저 등을 밀어주는 담백한 목욕을 한다.


 신혼초 굽지도 좁지도 않은 20대 남편 등에는 세 개의 도톰한 붉은 점이 있었다.  30대 후반이었을 무렵 그의 등에 작은 점이 생기더니, 40에 들어서면서 무슨 19세기 점묘파 화가의 작품이라도 될성싶게 점들이 번졌다. 너무 많아져, 이제 좀 빼야 하지 않냐 해도 그는 무심했다. 등은 보는 사람이 타자이니 무슨 대수겠는가?


사십 대 후반 둘 다 지친 어느 날 무심히 남편 등을 닦으며 등판에 자리 잡은 그 점들이 혹 고단함의 응어리가 아닌가 싶었다. 새싹 같은 딸과 아들이 봄처럼 성장하던 시기, 애들의 넓어지는 등을 씻기며 너무 행복하고 뿌듯해 남편 등의 소리를, 점들의 옹골진 외침을 외면하여 왔음을.


당직을 하고 충혈된 눈으로 집에 들어와 샤워를 하고 침대에 앉아있는 남편 등은 많은 얘기를 풀어놓았다. 평소보다 더 굽고 쳐진 등을 보며,  “지난밤은 별일 없었어요?” 물으면, 피곤한 목소리로 짧은 얘기를 펼친다. 교통사고 환자, 심근경색 환자, 노환으로 고통받다 사망하여 오신 어르신, 자살한 중년 남자, 물놀이에 익사한 잠자는 듯한 어린이 등 다른 색의 사고와 죽음이 펼쳐졌다. 다양한 생과 사를 보고 집으로 오는 그의 등은 소리 없이 말한다.  젊은 사람의 죽음은 아깝고, 나이 든 사람의 죽음은 슬프고, 아이들의 죽음은 알 수 없는 분노가 인다고. 목욕은, 등을 닦아주는 그 별거 아닌 행위는, 아깝고, 슬프고, 분노가 이는 그조차 모르는 보이지 않는 소리들을 날마다 하얀 거품과 보드라운 물로 닦아주는 것임을 아이들이 자란 후 알았다.


 24년 함께 목욕을 하다 보니, 늘 처음이고, 늘 도전받는, 날마다의 하루 끝에, 우린 서로 등을 밀어주며 서로 위로하였음을 깨닫는다.


 부부는 나조차 모르는 등에 맺힌 외로움과 슬픔을 닦아주는 사이!  닦여지지 않는 등, 수많은 이야기가 외면되는 등은 사랑의 부재이거나 외로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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