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드르의 성모 발현지를 방문하니 하늘에서 비가 주룩주룩 왔다. 부활절 이후임에도 단체팀들이 노란, 주황 스카프를 목에 두르고 성당과 동굴, 지하성당을 찾았다. 1858년 14살의 소녀(벨라뎃다)가 밝게 빛나는 성모님을 동굴에서 만난 이후 바티칸의 정식 성모 발현지로 공인한 곳이란다.
궁금했다. 성모님이 왜 소녀에게 나타났을까? 무슨 뜻을 전하고자 그리하였을까? 하고 말이다. 성모님이 "나는 원죄 없이 태어난 자"라 말씀하며 이곳에 성당을 지으라는 메시지를 주었단다. 인간은 천지창조 이후 아담과 하와의 죄로부터 원죄를 갖고 태어나는 존재란다. 내 말이 아닌 성경의 말이다. 원죄가 없다 함은 하느님의 섭리에 의해 죄 없이 태어난 자를 의미할 터인데 진정 신은 차별적 존재인가 보다. 원하는 존재에게만 죄의 대물림을 단절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아담과 하와의 죄, 즉 조상의 죄가 자식의 죄 지음으로 연결되는 것이 합당한가? 하는 질문 말이다. 그러다 잠시 혹여 성모님의 말씀은 당신만 원죄 없이 태어난 자란 의미가 아닌 모든 인간은 원죄 없이 태어난 자라는 의미로 말한 것은 아닐까? 우리들의 죄의식을 벗겨주려 한 말은 아닐까 하는 생각 말이다.엄마의 마음이라면 "나는 원죄 없는 사람이야"가 아닌 "너희들도 원죄 없는 사람이니 죄를 짊어지고 살지 말고 나처럼 살아보렴" 한 말은 아닌가? 하는 쓸데없는 생각이 들었다. 빗속에서...
태어남에 어떤 죄가 개입될 수 있을까? 부모의 죄가 자식에게 이어진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합당한가? 비 오는 루드르에서 십자가의 길을 걸으며 죄를 생각지 않을 수없었다. 진정한 인간의 삶과 종교는 무엇일까? 죄의 대물림은 삼위일체 신성을 완성하기 위해 종교적 논리를 세우고 다지는 과정에서 만들어진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다. 비가 주룩주룩 오는 동안 루드르의 샘물을 물통에 담고, 동굴 속 샘물이 흐르는 곳의 동영상도 찍고, 고래뱃속 같은 지하 성당도 들어가며 진정 신은 원죄를 등에 짊어지고 사는 인간을 보며 흡족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장 피에 드 포르로 이동을 하며
생장은 푸른 목초지에 양과 소가 자유롭게 살고 있는 공기가 맑고 조용한 마을이었다. 프랑스의 이 작은 마을에서 순례자들은 출발을 하거나 하루 머물러서 마을곳곳에 작은 숙소들이 즐비했다. 순례자들을 스치며 산 중턱에서 평화롭게 풀을 뜯는 양과 소가 부러웠다. 양과 소의 태어남에도 죄가 개입될 수 있을까? 양과 소에게는 소중한 탄생과 순리에 따른 죽음만 있지 않겠는가? 순례자들의 등 뒤에는 몇천 년의 원죄가 덧입혀져 그것을 벗어던지고자 여기 모여있는 게 아닌지 했다. 그건 정말 신만이 알 일이다.
*순례자 사무실 방문 후 생장 도착 스탬프 받음
순례자 여권인 크레덴샬을 만들고 스탬프를 받았는데 그게 뭐라고 참 좋다. 도화지 같이 뻣뻣한 종이에 날마다 알베르게에서 스탬프를 받는 것이 하루의 중요한 마침 일과가 될 것이라는 사실이 좋았다. 단순한 삶에 들어섰음을 깨닫게 했다. 성장하는 것이 일이었던 어린아이처럼 하루 종일 걷고 도장 하나를 받는 것이 하루 일과의 전부가 되는 날.. 그런 35일이 시작되어서 좋았다.
* 블루투스 키보드
남편이 오후 시간 브런치에 글을 쓰라며 사준 블루투스 키보드
남편이 오전에 죽도록 걷고 오후에 사람들과 어울려 놀지 말고 브런치에 글을 올리라며 사준 블루투스 키보드!
순례길 오기 전 대략의 일정을 남편이 묻길래 늦어도 오후 3시경에는 숙소인 알베르게에 도착하여 밤 10시 30분경까지 쉬다 잠을 잔다고 하니 "그럼 글을 쓰면 되겠나" 했다. "핸드폰에 글을 쓰기는 힘들지 않겠나?" 했더니 바로 주문을 했다. 마을 돌아다니지 말고 글을 쓰란다.
난 글을 쉽게 못 쓴다. 쓰고 다시 보고 수정하고 놀려두었다 다시 쓴다. 시골 마을에서 놀려면 글 쓰는 방법이나 내용을 수정해야 할 판이다. 내용보다 그림이나 사진으로, 설명보다 짧은 표현으로 말이다. 그런데 그것도 쉽지 않을 수 있다. 내가 가는 곳은 스페인이다. 인터넷이 느린 곳이니 용량이 큰 사진이나 동영상은 한나절 걸릴 수도 있다. 그러니 사진 몇 장과 감상 몇 자로 하루하루를 정리해야 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