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로뇨에서 나헤라로 향하는 길 29.4km! 아침부터 비장했다. 20km를 간신히 걷던 나였다. 며칠 전 28km를 걸을 수 없을 것처럼 느꼈었는데 29.4km라니? 겁이 몰려왔다. 한 걸음을 그저 내디디는 것으로 시작되고 종국엔 그 한걸음으로 마감됨을 알면서도 그랬다. 생각의 무게와 발걸음의 무게가 다르다. 생각으론 30km도 한걸음에 내달릴 것 같지만 발걸음의 무게는 무겁고 고되다.
새벽부터 비가 왔다. 어스름한 새벽빛에 우비를 입고 길을 나선 일행은 처음엔 옹기종기 모여 걷다 삼십 분이 지나면 앞서는 사람과 뒤처지는 사람으로 긴 행렬이 이뤄진다. 앞을 바라보면 멀고 뒤를 돌아보면 가깝다. 마음의 거리는 언제나 앞이 멀고 뒤는 가까우니 지나쳐 온 길은 쉽고 다 가오고 길은 고통스럽다.발걸음 한 자국마다 고통이 스민다. 그러나 그것이 준비 안된 순례자인 나의 길이고 내가 짊어져야 할 일임을 알기에 발의 미안함을 마음으로 보상하며 걷는다.
두 시간마다 바에 들러 커피와 주스를 마실때 세계 각국에서 모여 온 순례자들과 가벼운 인사를 한다. 팜플로나로 들어갈 때 만난 거구의 독일인 스테판, 두 명의 건장한 남자와 함께 순례길에 나선 이태리 여인 사만다, 우리 모두가 친구라고 했던 프랑스 할아버지 알베르! 앞서거나 뒤처지지만 결국 카페에서 안부를 묻는다. 만나면 그저 반갑다. 너는 좀 어떠니? 하는 단순한 한마디에 그 모든 의미가 담겨있다. 잘 걷고 있구나! 마저 잘 걸으렴!
야트마한 구릉을 올라가다 도로 옆 철조망을 바라보니 수많은 순례자들이 매달아 놓은 나무십자가가 보였다. 처음엔 누가 이런 장난을 했지? 했다가 길을 따라 철조망에 얼기설기 꽂아놓은 수많은 십자가를 보며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들었다. 도대체 어떤 순례객들이 이곳에 멈춰 십자가를 매달고 갔을까? 궁금했다. 무엇을 남겨두고 싶어 주변의 나뭇가지를 찾아 철망 사이에 손을 넣어 십자가를 매달았을까? 어떤 마음으로 이리 하였을지...... 무엇을 내려놓고 싶었는지... 무엇을 소망하였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