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다섯 소녀

다시 만난 늙은 소녀들

by 정루시아

토요일 아침, 주미는 호수길을 두 시간 가까이 걷고 난 뒤 약속 장소로 향했다. 모두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궁금했다. 주미는 삐쩍 마른 몸을 최대한 감추기 위해 펑퍼짐한 울 바지에 넉넉한 코트를 걸치고, 목엔 풍성한 실크 스카프를 둘렀다.


혜화역 근처, 프랑스 가정식 요리 전문점은 아담하고 정갈한 분위기였다. 식당에 도착하니, 숙이를 제외한 친구들은 이미 도착해 있었다. 룸 한켠엔 두툼한 패딩과 울 코트가 가지런히 옷걸이에 걸려 있었고, 먼저 온 세명의 늙은 소녀들이 수다를 떨고 있었다.


수연이 연보라 울 원피스를 입고 화사하게 웃으며 주미를 가볍게 안았다. 그녀에게서 좋은 향수 냄새가 났다. 톡 쏘면서도 잔향이 오래 남아, 길을 지나가다 문득 돌아보게 만들 법한 향이었다. 덕희는 테 없는 안경을 쓰고 환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단정한 감청색 울 정장 바지에 아이보리 블라우스를 입은 모습은 오랜 직장 생활의 흔적이 느껴지는 전형적인 커리어 우먼 같았다. 덕희가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야~~~. 세상에! 너를 보다니. 웬일이야? 정말 반갑다.”


덕희는 살집이 약간 붙었지만, 작은 체구와 총명한 동그란 눈동자는 그대로였다. 중·고등학교 시절, 덕희는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다. 가난한 집 맏딸이었던 덕희는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농협에 취직했고, 몇년 전엔 마포 농협 지점장으로 일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덕희 엄마는 성당 레지오 모임에서 그 사실을 자랑하느라 입이 마를 지경이라 했었다.


‘고등학교만 나온 덕희도 지점장을 하는데, 대학까지 나온 네가 집안일만 하고 있으니…’ 엄마는 늘 말끝을 흐렸다. 주미 부모는 완고했다. 대학 졸업 후 어설픈 직장 잡느니, 성실한 남편을 만나 안정된 삶을 꾸리는 게 낫다고 했다. 주미는 그 말을 따랐다. 인생이란 선후를 알 수 없지만 현실은 늘 자신의 몫이다.


‘버는 돈이 얼마 된다고, 괜히 흠만 남는다’는 엄마의 시선이 늘 주미를 따라다녔다. 그 때문일까? 가난한 집 맏딸이던 덕희가 지점장이 되었다는 소식에, 주미 엄마도 부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올드미스인 성미가 쨍쨍한 목소리로 주미를 보자 벌떡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대학병원 간호사로 일하다 지방 병원으로 자리를 옮긴 성미는 언뜻 보면 마흔 중반 같았다. 짙은 남색 원피스에 커트 머리, 여전히 날씬하고 생기 넘치는 모습이었다. 잘록한 허리 아래 플레어 스커트는 종아리 중반까지 내려왔고, 7cm쯤 되는 블랙펄 힐은 세련됐다. 짙은 남보라 벨벳 원피스 덕분에 피부는 유난히 환해 보였다. 작은 까르띠에 목걸이와 귀걸이가 목과 귀에서 은은하게 빛났다. 제법 키가 큰 성미가 힐을 신고 일어서자, 주미는 자신이 한참 작아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성미는 다가와 주미를 덥석 안고 두 팔에 한껏 힘을 줬다. 순간 주미는 당황스러웠다.


“아유, 정말 오래간만이다. 오늘에 서야 우리 다 모이는 거야? 숙이만 오면 되지? 우리가 너희 집 밥을 얼마나 축냈냐? 맨날 너희 집 안채에서 고구마며 옥수수 먹던 때가 생각나.”


성미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하자, 수연이 맞장구 쳤다.


“맞아, 맞아. 우리가 그렇게 떠들어도 주미 엄마는 한 번도 화를 안 내고~. ‘왔냐?’ 하시고, 꼭 뭐라도 챙겨 주시고. 그랬잖아.”


친구들을 보니 세월이 실감 났다. 보일 듯 말 듯한 흰머리, 화장 속에 숨겨진 주름,
옷을 잘 입어도 가려지지 않는 나잇살…. 감출 수 없는 쉰다섯살의 그림자였다.

서로 물을 마시며 수선스럽게 안부를 묻고 있을 때, 숙이가 도착했다. 단발머리에 테 없는 안경을 쓴 숙이는 제법 몸이 불어 있었다. 원래 마른 체형은 아니었지만, 뚱뚱하지도 않았던 숙이는 세월이 그대로 몸에 내려앉아 있었다.


회색 바지에 짙은 쥐색 목폴라, 남색 반 코트를 걸친 숙이는 더 커 보이는 동그란 눈으로 주미를 바라보며 입을 크게 벌려 웃었다.


“오랜만이다, 주미야! 너 죽지 않았구나? 잘 살고 있었지? 야~~~. 정말 반갑다!”


부산스럽지 않은데도, 큰 눈엔 반가움이 가득했다. 숙이는 주미의 손을 잡고 한참을 서 있다가, 눈시울을 붉혔다.


“나도 반가워. 잘 지내지?”


주미가 말을 건네자, 숙이는 고개를 떨구고 의자를 당겨 앉았다.


“나, 요즘 주책이야. 사춘기 소녀도 아닌데… 불쑥불쑥 눈물이 나~. 고마워, 주미야. 이렇게 얼굴 보게 돼서. 정말 좋다.”


친구들이 너나없이 말들을 쏟았다.


“넌 어떻게 지내?”
“남편이랑 애들은 잘 있고?”
“남편이랑 사이 좋고?”
“너야 천상 현모양처지~”

“너가 어디 살더라? 처음 살던 그 동네던가?”

“아니 우리 몇년만이니? 10년인가? 13년이가?”

“아이고 우리 나이에 언제 만난게 뭐 중요해. 지금 함께 있는게 중요하지.”

“야~~~. 주미 말 좀하자.”


아이들 이야기, 남편 직장 이야기, 부모님 이야기, 형제자매 이야기…. 얘기꽃이 끊이지 않았다.

수연이 주미 옆에 앉아, 주미손에 손을 언고 포근하게 말했다.


“너는 천생 여자라 잘 살 줄 알았지. 그런데 왜 이렇게 말랐니?
우린 살쪄서 고민인데.”


“내가 좀 마르긴 했지. 그냥 살이 빠져. 체질인가 봐. 그래서 요즘은 자주 걸어. 애들도 다 나갔으니까… 나가서 걷는 게 일이야. 성곽길도 걷고, 지리산 둘레길도 걷고, 제주도 올레 길도 걷고… 그냥 길을 걸어.”


수연이 주미의 손을 꼭 잡더니, 다른 손으로 그 손을 와락 감싸 안았다.


“그래? 주미야! 그럼 나랑 산티아고 가자.

올해 연구년이라 뭐 할까 고민하고 있었거든. 혼자 가긴 좀 망설여졌는데, 같이 가자!”


수연은 산티아고에 대해 줄줄 꿰고 있었다. 주미가 가겠다고 말한 적도 없는데, 마치 이미 함께 가기로 한 사람처럼 들떴다. 주미는 당황한 얼굴로 수연을 바라봤다.


“나도… 언젠가는 산티아고에 가보고 싶다고는 생각은 했지만~.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말도 안되고, 해외에 혼자서는 나가 본 적이 없는데.”


그러자 수연이 바짝 다가와 주미의 어깨를 툭 감싸며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


“그런 거라면 걱정 마. 내가 다 알아서 할 게. 넌 그냥 내 옆에서 같이 걷기만 해. 친구야! 우리 가서 걷자. 딱 30일, 한번 해보자.”


모임이 끝난 뒤, 수연은 순례길 일정을 정리해 보내고, 사전 모임도 신청했다. 엉겁결에, 주미는 수연의 거침 없는 추진력과 행동력에 이끌려 산티아고 순례길에 합류하게 되었다.


그렇게, 주미의 산티아고 순례길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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