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붙여진 나무

주미의 결혼

by 정루시아

아들 얘기를 한 뒤 수연의 표정은 훨씬 밝아졌다.

오래 묵혀 둔 감정을 길 위에 풀어내서였고, 순례길은 수연을 천천히 품어주고 있었다.

걷기 훈련이 덜 된 수연도 점차 발걸음이 단단해졌다.


수연은 뜬금없이 주미에게 물었다.

“넌 신랑이랑 잘 지내지? 이렇게 묻는 내가 한심하지?”


주미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걷다 말없이 스틱으로 가로수를 가리켰다.

“수연아, 기억나? 수리아인(Zuriain)에서 팜플로나(Pamplona)로 들어갈 때, 가로수가 모양이 이상하다고 했잖아. 저기 저 마을 입구에도 또 있네. 네 방향의 나무 가지를 억지로 끌어다 서로 접붙여 놓은 가로수 말이야. 난 그걸 보자마자 잔인하단 생각을 했어. 엮이고 싶지 않은 나무도 있을 텐데 말이야.”


“나는 그냥 특이하게 관리했네, 정성 들였구나 했는데.

스페인 날씨가 얼마나 뜨겁냐.

이 가로수 길 밑으로 사람들이 걸으면 시원하겠구나 싶었는데~.”


수연이 바로 대답하자, 주미는 잠시 뜸을 들이다 말했다.


“수연아, 나는 내가 그 나무 같단 생각이 들었어.

다른 나무에 억지로 접붙여진 채 내 수액과 영양분을 주며 버티는 그런 나무.”


한 발 앞서 담담하게 걷는 주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수연은 이상하게 마음이 움찔했다.

그래도 수연은 천연덕스럽게 주미에게 농담을 건넸다.


“야, 접붙여진 나무 치곤 너~ 너무 잘 걷는 거 아니냐?

쉬지도 않고 죽도록 걷는데 지치지도 않고, 너무 한결 같잖아!”


주미는 그 말에 배를 잡고 수연을 보며 웃었다.


“수연아, 접붙여진 나무 치곤 잘 걷는다고? 나, 자르고 왔지.”


주미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둘은 깔깔대며 길을 걸었다


8일째, 로그로뇨(Logroño)에서 나헤라(Nájera)까지 29km를 걷는 길은 수연을 긴장시켰다. 물집도 가라앉고 발톱도 견딜 만했지만, 왼쪽 발등에 잔 통증이 있어 4km를 걷고 나면 길바닥에 주저앉아 5분은 신발을 벗고 발을 주물러야 했다.


주미는 결코 길을 재촉하지 않았다.

5분을 쉬면, 뒤따르던 수많은 순례자들이 “부엔 카미노”라며 한마디씩 인사하고 지나갔다.

어떤 친절한 외국인은 가던 길을 멈추고 다가와 “무슨 문제라도 있냐? 도움이 필요하냐?”고 물었다.


그럴 때마다 수연은 활짝 웃으며 문제없다는 스페인어를 상냥하게 했다.

“노 프로블레마, 그라시아스!”


퍼질러 앉아 발등을 주무르던 수연이 입을 열었다.

“생전 처음 보는 외국인도 길 가다 뭔 문제 있냐, 도와줄 게 있냐 물어보는데, 정작 부부가 되면 남이 될까 고민하는 사이가 되나 봐. 연애할 땐 장점만 보이더니, 결혼하니까 단점만 들춰 보게 되더라.”


“그런가?” 주미가 허한 미소를 머금고 먼 길을 바라보았다.


“허긴, 너는 얼마나 좋으니. 좋은 남편에, 애들도 똑 부러지고. 우리 다섯 중 현모양처는 너 하나잖아.”


주미는 말없이 길 너머의 아득한 곳을 바라보며 입을 다물고 있었다.

“어휴, 저 여유 좀 봐. 가진 자의 여유.” 수연은 주미를 향해 장난스레 눈을 흘겼다.


새벽녘엔 구름이 잔뜩 끼었는데, 오전 10시가 넘자 이내 비가 쏟아졌다. 길은 질척해졌고, 순례객들은 커다란 우비를 뒤집어쓴 채 소처럼 무겁게 걸었다. 길가 곳곳에 달팽이가 순례자의 발에 밟혀 진흙에 섞이고, 손가락 길이 만한 민달팽이도 길을 가로지르다 무심한 발에 짓눌려 나자빠져 있었다. 주미와 수연은 그런 작은 생명들이 다치지 않게 발을 조심조심 디뎠다.


생명이란, 불회귀성(不回歸性) 아닌가. 한 번 꺼진 불, 다시 피울 수 없는 삶!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생이란 얼마나 슬픈 일인가?

순례길의 무정한 발자국들 사이, 수많은 달팽이가 조용히 죽어가고 있었다.


주미가 길을 걷고 짓이겨지는 달팽이를 보며 말했다.

“난 저 달팽이 같았던 것 같아. 피할 수 있었는데, 조금 돌아갈 수도 있었는데. 그냥 밟혔거든. 무심하게.”


수연은 주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바로 이해하지 못한 채 주미를 바라보며 되물었다.

“뭔 소리야? 누가 널 밟았다는 거야?”


“아니, 사실 밟힌 건 아니지. 짓눌린 거지. 나 스스로를 말했어야 했는데, 내가 멍청했지. 말하지 않는데 누가 날 헤아려주겠어. 아무리 한 이불 덮고 자는 사이라도 입으로 정확히 말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게 부부 생활이란 걸, 뒤늦게야 깨달았어. 한창 젊었을 땐 왜 그리 입을 다물고 있었는지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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