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십자가

짐을 내려놓고

by 정루시아

주미는 언덕길을 오르며 능선 아래 도로 쪽으로 순례객이 떨어지지 않도록 쳐놓은 긴 철망을 바라봤다.

오래된 철망에 나무 십자가가 촘촘히 매달려 있었다.


지나가던 순례자들이 주변의 나뭇가지나 풀가지를 대충 뜯어내 철망에 얼기설기 꽂아놓은 것이었는데, 그 수가 셀 수 없이 많았다.

긴 철망을 따라 크고 작은 십자가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고, 주미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는 걸 느꼈다. 순간, 자신이 철망에 매달린 십자가처럼 느껴졌다.


주미는 철망에 걸린 수많은 십자가를 보며 이상하게도 마음의 위로를 받았다.

이 녹슨 철망에 짐을 내려놓고 지나갔을 수많은 '주미들'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길을 멈춘 주미는 나뭇가지를 찾았다.

수연도 덩달아 가지를 주워 왔다.

둘은 빈자리를 찾아 나뭇가지를 십자가 모양으로 꿰었다.


주미가 녹슨 철망에 십자가를 꽂고 다시 길을 걸을 때,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안했다.


하루하루 메말라가던 과거의 주미는 철망에 남겨지고, 알맹이만 남은 주미가 새롭게 길을 걷는 듯했다.

주미는 스스로의 과거를 그 철망에 걸고, 다시는 되돌아보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주미와 수연은 언제나 알베르게에 늦게 도착했다.

발이 빠른 일행은 일찌감치 알베르게에 도착해 이층 침대의 아래 자리를 차지했고, 주미와 수연은 느긋하게 도착해 이층에서 짐을 풀었다.


대략 오후 1시에서 2시 사이 도착하면 둘은 간단히 샤워를 하고, 인근 레스토랑이나 알베르게 식당에서 순례자 점심을 먹었다. 12~13유로에 전식, 본식, 후식이 나오는 순례자 식사는 양도 넉넉했고, 포도주와 물이 기본으로 제공돼서 술을 좋아하는 순례자들에게는 인기 있는 코스였다. 주미는 술을 즐기지 않았고, 수연은 와인을 좋아했지만 발이 불편해 마시지 않았다.


순례길 첫 일주일 동안은 발이 아픈 수연이 알베르게 정원에 앉아 발 마사지를 했지만, 둘째 주부터는 수연도 주미와 함께 슈퍼에 가기 시작했다. 물, 간단한 과일, 요플레, 사탕 등을 샀다. 모자를 쓰고 선크림도 바르지 않은 채, 노브라에 티셔츠와 반바지를 입고 슬리퍼를 끌며 시장을 보는 재미는 참 단출하고 소박했다.


누구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고 각자 산 물건과 간식을 품에 안고 알베르게로 돌아오는 시간은 단순한 사람 살이가 무엇인지 실감하게 했다.


수연은 슈퍼에서 돌아올 때면 몸을 뒤뚱거리듯 걸었다.

물집 잡힌 발에 실리는 체중을 견디기 힘들어 몸을 뒤틀었고, 그럴 때마다 스스로를 ‘순례길 좀비’라 불렀다. 족저근막염까지 생겨 고통이 일상이었지만, 새벽이 되면 수연은 스틱을 쥐고 씩씩하게 길을 나섰다.


대도시 부르고스(Burgos)를 지나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Carrion de los Condes)에서 만시야 데 라스 물라스(Mansilla de las Mulas)로 향하는 약 80km 구간은, 인솔팀장의 말처럼 수연의 눈에도 볼 것이 없는 지루한 길이었다.


3일 내내 주미는 일정한 속도로 걸었고, 수연은 "이 길이 저 길 같고, 저 길이 이 길 같다."며 투정을 부렸다. 수연의 마음 같아선 버스나 택시라도 타고 싶었다.


카페에서 쉴 때마다 수연은 “택시 탈까?” 하고 주미에게 묻곤 했다. 그럴 때마다 주미는 알 수 없는 미소만 지었다.


주미는 베테랑답게 묵묵히 길을 걸었다. 지루한 길을 걸으며 수연에게 조용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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