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너는 시간을 조금 벌었니?

by 정루시아

하루 참 길다. 깁스한 다리로는 청소도, 밥도, 정원관리도, 데스크 탑에서의 컴퓨터 작업도 모두 어렵다. 그저 낮은 거실 테이블에 노트북을 켜고 앉아 수업자료 PPT를 고치거나, 인터넷 뉴스를 찾아보거나, 메일을 확인하고, 브런치 글을 읽고 쓰면서 두 세평을 맴돈다. 다리를 펴고 작업하다 발목이 아프면 긴 소파에 올라 부어오른 발을 쿠션에 올리고 책을 읽는다. 책을 읽다 눈이 아프면 소파에 누워 하늘을 본다. 운이 좋으면 천고가 높은 거실 윗창에서 여행 가는 철새들을 만나기도 한다. 철새들의 여행을, 철새의 노동을, 철새의 시간을 멍하니 본다. 그들이 부럽다. 책으로 둘러싸여, 멍하니 하늘을 보다 거실을 맴돌며 '시간 참 더디다' 생각한다.


저녁나절, 창가에 어둠이 내리면 목발을 짚고 불을 켜며 생각한다. '오늘 뭐했나? 아니, 어제 뭐했나? 그제는?' 딱히 떠오르는 게 없다. 시간이 갔다.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웜홀을 관통하듯 순식간에 갔다. 가버렸다, 시간이. 내 주변의 모든 사물이 머무르고, 나 또한 한 곳에 머무르니, 내 몸은 그 긴 시간을 견딘다 생각했지만, 나의 뇌는 머무름을 통째로 날려 버렸다.


이러면 시간이 멈춘 것일까? 시간이 흐르지 않은 것일까? 아님 시간이 호로록 지나가 버린 것인가? 아니 아예 시간이 없는 것일까? 참 묘하다.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는 책을 읽었으되 답이 없고 판단이 서지 않는다.


4년 전 지천명(知天命)이라는 나이 오십을 넘기며 하늘의 명을 헤아리기보단 시간이 아까웠다. 날마다 아까웠다. 저자 말처럼 사물과 사건의 차이는 '사물'은 시간 속에서 계속 존재하고, '사건'은 한정된 지속 기간을 갖는(p106) 것이라니 내가 시간을 아까워하는 게 당연했다. 사물인 인간이 사건을 포함하다 결국 죽는 존재니 말이다.


작년, 24살에 "결혼한다"는 딸에게, 몇 년 더 있다 하지 않으렴 하던 나의 말이 생각났다. 참 대책 없는 말이었구나! 현재의 사랑을, 지금의 행복을, 딸의 선택을 부모의 조언이라는 어쭙잖은 걱정으로 미루려 했다는 사실이 말이다. 무슨 권리로 딸의 사랑과 시간을 늦출 수 있겠는가 말이다. 시간을 줄 수 없는 내가, 신이 허락한 인간의 시간을, 내 두려움에, 조바심에 미루라 하다니. 소파에 누워 푸른 겨울 하늘을 보다 창피함이 달려왔다. 창피한 노릇이지만 두어 번 말하고 딸의 시간을, 선택을, 사랑을 존중해 주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매일 수많은 사람들이 죽는데도 살아 있는 자들은 자신들이 불멸의 존재인 것처럼 산다. 유디스티라 p209


물리학자인 카를로 로벨리는 유디스티라의 명언을 가져와 인간 존재의 유한성을 말하며, 고통의 시간(p196)을 거쳐 휴식의 시간(p216)에 놓이는 인간을 끌어안고 있다. 그의 포용력이, 존재에 대한 통찰이, 불교와 기독교적 융합이 좋았다.


2019년 11월 이 책을 읽고 '많이 움직이면 많이 움직일수록 시간은 더 천천히 흐른다(p47).'는 구절이 "인상 깊다." 남편에게 말하니, 남편은 장난꾸러기 같은 얼굴로 말했었다. "그럼 오늘 많이 움직여서 시간을 좀 더디 보내봐?" 하고 말이다. 조그만 손으로 남편의 등짝을 찰싹 소리 나게 때린 기억이 난다.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는 책이 우리에게 와서 순간의 웃음을 만들어 주었다.


이 책을 정리하다 보니, 알겠다. 많이 움직일 수 없는 나는, 사물인 듯 사건처럼 잠시 머무르는 나는, 유한한 나의 시간을 아주 천천히 보내고 싶어 함을 말이다. 쾌속정처럼 지나가 버리는 시간을 할 수 있다면 더디고 천천히 가게 하고 싶음을.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던지, 흐른다던지, 상대적이던지, 문제는 시간이 아닌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어떤 삶을 선택하여 사는 가이다. 행복한 삶은 시간을 쟁취하게 만들고, 불행한 삶은 시간을 소멸시킨다는 것을.


코로나19가 심각 국면에 처해, 심각 단계로 격상됐다. 보충학습이 사라진 고3 아들이 행복한 얼굴로 집에 왔다. 아들에게 부여된 일주일의 시간을 어찌 쓸까 궁금하다.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최선일까? 행복하게 쉬는 게 최선일까? 인생 좀 살아본 나는 안다. 누구에게나 힘든 동굴의 시간, 달리기의 시간을 말이다. 그러나 고3 아들이 행복했으면 한다. 내가 아는 삶이, 내가 산 선택이 늘 최선이라, 시간을 쟁취한 삶이라 누가 판별하겠는가? 나는 나일뿐이었고, 나의 선택이었을 뿐이다.


최면을 걸고 일주일을 살겠다 작심한다. 아들의 시간을 조급해하고, 아들의 시간을 내 시간처럼 선택하지 않겠음을. 다만, 나의 시간을 묻기로 했다. 너는 행복하니? 그래서 너는 시간을 조금 벌었니? 하고 말이다.



KakaoTalk_20200223_105830552.jpg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코끼리의 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