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어디쯤 여행하고 있니?
목발을 짚고 서점에 갔다. 깁스를 하지 않았다면 대만에 가 있을 시간이었다. 설렁설렁 대만 자유여행을 하겠다던 계획은 목발을 짚는 순간 날아갔다. 코로나19의 대단한 기세를 생각하면 집돌이로 들어앉은 게 잘된 일이다. 서점 가판대에 즐비한 책들을 보니 답답함이 가셨다. 목발을 짚고 책과 눈인사를 하던 순간 한 곳에 나란히 서있는 주제 사라마구 작품들을 보았다. 읽지 않은 작품이, 작년 '카인'을 읽고 그 전작을 찾다 실패했던 '코끼리의 여행'이 보였다.
16세기 포르투갈 왕실에 있던 인도코끼리가 오스트리아 대공에게 선물로 보내지는 실화 소설을 이제 만난 게다. 코끼리의 여행? 주제 사라마구가 왜 유작인 '카인'전에 이 소설을 썼을까?' 의문이 들었다. 그냥 재미로 쓰지 않았을 터인데, 궁금했다.
코끼리의 여행을 읽고 궁금증이 풀렸다. 왜 이 소재에 끌렸는지. 그는 이 소설을 통해 신과 존재와 인간에 대하여 말하고자 했다는 것을. 주제 사라마구 말처럼 코끼리의 여행은 독자에게 갈채를 받다가 독자에게 인생의 법칙처럼 망각(p78)될 유머 가득하고 익살스러운 얘기들임을. (많은 갈채를 받을 거고, 사람들이 거리에 몰려나오겠지요. 그러다 사람들은 잊어버릴 겁니다. 그게 인생의 법칙이죠. 승리와 망각. p78)
내용은 단순하다. 기독교 신자였던 지휘관이 기독교의 정수는 삼위일체라 하니 수브흐로(인도인이면서 세례를 받아 자칭 대체로 기독교 인이라 하는 코끼리 관리자)는 넷이라 말한다. 지휘관은 수브흐로가 기독교는 셋이 아니라 넷이라 말하니 경악을 금치 못한다. 수브흐로가 성부, 성자, 성령, 그다음에 "동정녀가 있지요." 하니(넷이라 주장하니) 지휘관은 수브흐로를 가네샤(부활한 아들 이름:힌두교 신인 시바의 아내 파르바티가 동정으로 아들을 만들었으나 시바의 분노로 아들 머리가 잘리자, 파르바티가 코끼리의 잘린 머리를 죽은 아들 가네샤에게 붙여 코끼리 얼굴을 갖게 된 이야기)에게 붙여진 코끼리처럼 머리가 잘려 죽임을 당할 것이라 경고했다. 그럼에도 수브흐로는 고개를 빳빳이 들고 말한다. 동정녀는 밤이나 낮이나 쉬지 않고 기도와 탄원을 듣는 존재이니 성삼위 다음인 네 번째를 차지할 권리가 있고, 예수는 동정녀의 아들로 죽은 후 사흘 만에 살아난 성자이니, 이는 힌두교의 가네샤에 해당한다고 말이다. 지휘관이 힌두교가 창조의 신 브라흐마와 보존의 신 비슈누와 파괴의 신 시바를 듣고는 기독교처럼 "삼위일체일세 그려"라 말할 때 코끼리 관리인 수브흐로는 힌두교의 가네샤가 예수와 같은 처지임을 말한다. 수브흐로는 파르바티(시바의 아내:파괴의 신 아내)가 동정녀와 같은 운명이었음을 천연스럽게 언급하며, 가네샤의 이야기를 예수, 즉, 그저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난 사람에 관한 동화와 비슷하지요(p82)."라 말한다.
참 절묘한 대비다. 신들로 넘쳐나는 힌두교와 성삼위 일체를 중심으로 삶는 기독교를, 이론적 토대가 아닌 신앙을 대비하여 동정녀의 위상을 높이고 부활한 예수를 코끼리 머리를 한 가네샤와 대비하는 것은 보통 강심장이 아니면 어렵지 않은가! 주제 사라마구의 작품이 불경스러운 작품으로 정평이 높았던 이유는 '동화'라 말하면서도 종교적 허울을 한껏 비트는데 주저함이 없었다는 데 있다. '카인과 예수복음'에서 그 진가를 발휘하지만 난 주제 사라마구가 신에게 있어서는 금세기에 한둘 나올까 말까 한 '다섯째 아이'지 않을까 한다.
신이 어찌 주제 사라마구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평생에 걸쳐 신에게 붓 화살을 날리던 무장된 다섯째 아이를 말이다. 그는 평생 붓을 들고 신의 '근처'를 맴돌다 신의 '다섯째 아이'로 굳건히 살다 신의 영역으로 돌아갔으니 그의 삶이 아름답지 않을 수 없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일은 주제 사라마구의 작품들을 읽으며 난 늘 그와 함께 '신의 근처'를 맴돌았고 그가 '다섯째 아이'가 되는 모습을 보며 최소한 나는 신의 다섯째 아이가 될 주제는 못된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여하간 주제 사라마구는 기독교와 힌두교의 핵심 뼈대인 삼위일체론(성부, 성자, 성령)과 세 신(브라흐마, 비슈누, 시바) 이야기를 불쑥 꺼내곤 바로 입을 닫았다. 왜 코끼리의 여행을, 생의 끝자락에서 이 작품을 썼는지 알겠다. 사라마구는 소재의 특수성도 있겠지만 바로 이 논제를, 인도인 코끼리 관리자 수브흐로와 기독교 지휘관의 대화를 통해 유작인 '카인'에 앞서, 즉, 신의 뒤통수를 치기 전에 기독교의 이론적 토대를 흔들고 싶어 했지 않나 싶다. 그러나 그는 늘 유머가 넘치는 작가였으니 대화 말미에는 "동화처럼 말이에요" 란 꼬리표를 달아 빠져나갈 구멍을 미리 마련해 놓는 센스를 발휘했다. 신이 미워할 수 없게 말이다.
인도 사람(힌두교를 태생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며 세례를 받은 수브흐로는 오스트리아 대공이 더딘 코끼리의 여행 일정(코끼리는 점심 후 충분한 휴식을 가져야 됨을 강조한 대목)에 불만을 토로하자 공손히 말한다.
제가 코끼리를 안다고 생각하는 만큼 코끼리를 아신다면, 어디든 인도코끼리가 있는 곳에는 인도가 존재한다는 것도 아실 것입니다. --- 그 인도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의 안에 늘 말짱하게 존재할 겁니다. p187
생물학적 존재와 지리학적 존재를 명료하게 정리하여 말하는 코끼리 관리자를 대공인들 무슨 수로 당해낼 수 있겠는가? 또한 인간으로부터 나온 권력은 자연의 존재에 머무르지 못함을 말이다. 주제 사라마구가 내게 말하는 듯하다. 어디든 네가 있는 곳에 너의 근원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내 안에 무슨 일이 있어도 늘 나의 부모와 조상이, 대한민국의 문화가 말짱하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코끼리 관리자인 프리츠(오스트리아 대공이 수브흐로에게 새로운 이름을 하사하였으니 프리츠였다.)는 눈 덮인 알프스 산을 넘으며 스스로 독백한다.
인간의 역사는 잃어버린 기회들의 긴 연속이라는 회의주의자들의 말은 정말 옳다. 다행히도 상상력의 가없는 아량 덕분에 우리는 결함을 지우고, 최대한 빈틈을 메우고, 고집스럽게 막다른 채로 남아 있으려 하는 막다른 골목에 통로를 뚫고, 자물쇠조차 달려본 적이 없는 문을 열 열쇠를 만들어낸다. p256
프리츠의 독백을 통해 주제 사라마구는 삶의 고단함을, 못 가진 자의 헛헛함을 끌어안으며, 인간은 막다른 골목의 통로를 뚫고, 자물쇠조차 달려본 적이 없는 문의 열쇠를 만드는 존재임을 가슴 먹먹하게 말하고 있다.
'눈먼 자들의 도시' 작가로 유명한 주제 사라마구는 평생 신을 생각한 사람임이 분명하다. 인간의 근원을 생각하는 사람 치고 신을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시작을 궁금해하는 사람, 끝을 궁금해하는 사람인 사라마구가 코끼리의 여행을 통해 내게 물었다.
너는 어디쯤 여행을 하고 있니?라고.. 인도에서 태어난 수브흐로가 인도코끼리와 함께, 인도에서 포르투갈을, 스페인과 북이탈리아를 거쳐, 눈 덮인 알프스 산맥을 넘어 오스트리아 빈을 여행했듯, 너는 어디쯤 여행을 하고 있는가? 하고 말이다. 그건 마치 힌두교의 지평에서 태어나 기독교의 한 복판에서 살아가는 코끼리 관리인 수브흐로가 인도코끼리를 보살피며 지리적, 종교적 여행을 하듯, 전통적 유교문화가 살아있는 한국에서 태어나 모태부터 기독교로 자라나 살고 있는 내가 어느 지점을 통과하며 살고 있냐고 묻는 듯하다. 아직 끝나지 않은 나의 여행에서 나는 어떤 막다른 골목의 통로를 뚫고, 어떤 열쇠를 찾아 문을 열 것인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