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프레소! 한 모금될 듯 말듯한 커피를 처음 본 것은 2002년 2월 밀라노에서였다. 이태리 밀라노 패턴 학원 방문겸 남편과 처음 나간 유럽 여행에서 우린 생애 가장 강렬한 향과 맛을 내는 커피를 맛보았다. 커피를 마셨다고 해야 하나 그냥 한입 먹었다 해야 하나? 유럽의 2월은 춥고 낯설었다. 추위에 강한 나는 아침부터 밤까지 궁금한 것 천지여서 걷고 또 걷자 했고 남편은 해만 떨어지면 숙소에 들어가자 했다. 겨울 한기에 몸을 떨던 남편은 한인 민박집에 도착해 뜨거운 물에 달달한 믹스커피를 풀어 마시곤 몸과 맘을 쭈~욱 폈다.
밀라노의 겨울은 뼈가 시렸다. 온도가 낮아서라기보다 습기 가득한 찬기운 때문이었다. 패턴 전문 학원을 찾아 나선 길에 온몸이 움츠려든 남편을 보고 "커피 한잔 할까?" 하니, 남편은 "그럴까?" 하며 입맛을 다셨다. 세꼴리 학원 근처(그 당시 학원은 밀라노 중심이 아닌 외곽에 위치했고, 주택과 상가들이 마구 뒤섞여 있었다.) 작은 카페에 들어갔다. 문을 열고 들어선 우린 잠시 당황했다. 서너 평 될까 하는 긴 직사각형 공간에 좌석은 없고 높고 작은 둥근 테이블이 홀 중앙에 두어 개 있고 테이블엔 높다란 의자 두세 개가 뭉쳐 있어 높은 천장과 함께 모든 게 가로세로로 쭉쭉 늘어난 듯했다. 길쭉하고 좁은 공간은 따스함과 함께 알싸한 향과 설탕의 달달한 향이 농밀하게 가득 차 있었다.
사람들은 테이블을 중심으로 옹기종기 서 있었다. 앙증맞은 하얀 커피잔은 작은 테이블에 얘들 놀이 세트처럼 놓여있었다. 쿠키와 시럽이 가득 묻은 빵에서 뿜어 나오는 달달한 향과 진한 커피 향이 밀란(밀라노 사람) 사람들의 독특한 향과 어우러져 우리 둘은 떠 있는 섬 같았다. 덩치가 큰 남자들이 작은 빵을 두어 번 베어 먹고 손가락에 뭍은 빵가루와 시럽을 죠옥 쬬~옥 소리 나게 빨아먹곤 작디작은 커피잔을 들어 에스프레소를 한입에 톡 털어 넣곤 행복해했다. 쩝쩝 소리와 함께 그들은 "부오노! 부오노!"(buono, 나중에 알게 된 말이지만 좋다, 혹은 맛있다를 간단하게 말한 것인데 정말 맛나고 좋아 보이긴 했다.)를 외쳤다.
남편과 내가 에스프레소를 주문하여 맛을 보곤 호들갑을 떨었다. 나는 "와~ 사약이다. 사약. 엄청 진하네." 하며 눈을 찡긋했다. 남편은 조금 맛을 보곤 각설탕을 두 개 넣고 새끼손가락 크기의 스푼으로 젖고 나선 작은 커피잔의 바닥에 녹아있던 마지막 한 방울의 커피까지 톨톨 털어 마시곤 입맛을 다셨다. 그때 남편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싫은 것도 좋은 것도 아닌. 처음 마신 그 한 모금의 커피는 남편에게 새로운 세계를 소개했음이 분명했다. 한잔에 1유로(Euro)가 안 되는 금액을 내고 우리는 '참 싸고 좋다.' 했다.
밀라노를 걷다, 로마를 걷다, 다리가 아프면, 카페인이 필요하면, 카페에 들렀다. 덩치 큰 남자들이 곱실거리는 갈색머리를 휘날리며 빠른 걸음으로 걷다 카페에 바쁜 듯 들려 밤톨만한 작은 커피잔을 엄지와 검지로 살짝 들어 한 두어 번에 털어 넣듯 마시는 모습은 참 산뜻했다. 로마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남편과 잠시 쉴 곳을 찾아 들어간 동네 카페에선 눈썹 짙고 코가 오뚝한 성깔이 장난 아닐 것 같은 여자 둘이 카페에 쌩 들어와선 "두에 에스프레소 페르 파보레(due espresso per favore: 에스프레소 두 잔 부탁합니다.)" 하곤 동전지갑에서 2유로를 테이블에 올려놓고는 싸우듯 양손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앙칼진 목소리로 대화를 나눠 도회적이며 도발적인 이태리 여성의 모습이 인상 깊었다. 잘 차려입은 모양새라기보다 "나는 나야."라고 말하는 듯한 자신감이 좋았다. 그녀들은 커피가 나오자 각설탕 하나를 넣고 휘휘 젖고는 스탠딩 테이블에 서서 어깨에 가방을 둘러맨 채 몇 분 수다를 떨고 한입 톡 털어 커피를 마시고는 얼굴 한가득 웃음을 머금고 카페 주인에게 "아리베데리치(arrivederci: 안녕히 계셔요)"를 외치곤 통통 튀듯 나갔다. 몸매가 드러나는 청바지에 무릎까지 오는 긴 부츠를 신고 허리를 잘록하게 졸라맨 사파리형 겨울 재킷은 얼마나 강렬했는지! 커피숍이라면 제법 널찍한 공간에 둘이나 네 명이 여유롭게 앉아한 두어 시간 담소를 나누던 공간으로만 생각했던 우리에게 서서 작은 잔에 담긴 커피를 한입에 털어 넣고 짧은 수다와 함께 담소를 나누는 모습은 참 매력적이었다.
남편과 나는 에스프레소, 에스프레소 마끼아토를 마시며 '참 강렬하다.' 생각했다. 그 당시 남편과 나는 달달한 밀크커피에 길들여져 있었다. 남편은 유독 단것을 좋아했다. 달달한 엿과 달콤한 곶감, 단 약과를 좋아했고 아이스크림, 초콜릿, 사탕을 사랑했다. 단것이라면 사죽을 못쓰고 좋아했다. 살이 찌는 몸도 아니어 체중 걱정 없이 단것을 사랑하니 여름철에는 아이스바를 입에 달고, 한겨울엔 큰 아이스크림 통을 잡고 아들과 떠먹기 경쟁을 하니 달콤함을 사랑하는 남편을 누가 말리겠는가? 어떤 상황이던 남편은 아이스크림을 주면 눈을 반짝이며 게눈 감추듯 먹어치웠다. 그런 남편이, 그리 단것을 좋아하던 남편이 배낭여행 때 쓴 에스프레소를 마시곤 "허 참 특이한데. 좋네." 했다. 물론 설탕을 가득 넣었지만 밀크커피의 지방이 샤르르 감도는 단맛과는 다른 "쓴 단 맛이 좋다." 했다. 에스프레소는 단숨에 남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 강렬한 밀도가 쓴맛과 단맛의 담백한 어우러짐이, 그 농밀한 향과 걸쭉한 밀도가 남편의 혀끝을 휘감은 것이 분명했다.
2002년 밀라노 유학 시절 나는 2인용 모카포트(MOKA EXPRESS)로 에스프레소를 내려 마셨다. 처음 몇 번 설탕을 넣어 마시곤 후엔 그냥 마셨다. 강렬한 쓴맛은 자동으로 강렬한 단맛을 불러일으켜 입안의 잡 내음을 일시에 소멸시키고 정신을 바짝 나게 하는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힘든 유학생활에 에스프레소를 마시면 눈을 빛내며 함께 에스프레소를 마시던 남편이 소환됐고 그 쓴맛 속에 불러일으켜지는 단맛이 남편의 위로처럼 느껴졌었다. 유학생활 때 쓰던 모카포트를 갖고 집에 오니 남편이 에스프레소를 내려달라 했다. 가스불에 올려놓은 모카포트에서 커피를 내려 듬뿍 설탕을 넣어 마시던 에스프레소는 얼마나 쓰고 달콤하던지, 참 좋았다. 남편과 함께 내려 마시던 에스프레소는 써서, 알싸하게 퍼지는 향이, 지나간 그리움이 생각나 좋았다.
그 마끼나(machina, machine)는 내가 박사과정을 밟는 동안 남편이 불에 바싹 태워먹어 일 년 만에 분리수거통에 버려졌고 2004년 친정부모님을 모시고 유럽 배낭여행을 다녀오며 산 마끼나는 다시 일 년이 지나 남편이 홀라당 태워먹었다. 남편은 원래 커피를 좋아했다. 유럽 배낭여행 후 남편은 에스프레소를 사랑했다. 5개 정도의 마끼나가 집에 돌아와 가스레인지에서 모두 요절했다. 집을 태울까 무서워, 마끼나(고무 패킹)의 탄 냄새가 2주일도 넘게 집에 베어 "이제 에스프레소 마끼나는 안되니 전자식 머신을 사요." 했다. 남편은 기계값을 알아보더니 "비싸네. 됐어." 했다. 근검절약정신으로 무장된 남편의 입장에선 기계값이 너무 비쌌다. 지금이야 보급형 기계부터 고가까지 다양한 가격대로 머신이 포진되었지만 16년 전만 해도 참 비쌌다.
밀라노 유학 중 시간만 생기면 혼자 여러 나라를 여행했었다. 한인 민박을 이용하기도, 호텔을 이용하기도 그냥 저가 비행 티켓을 사 주변국을 돌아다녔다. 혼자 갔던 여행지에선 늘 '사랑하는 이들을 데리고 이곳에 다시 오리라.' 다짐했었다. 커피를 좋아하는 남편에게 '유럽의 다양한 커피를 맛보게 하리라.' 하고 말이다. 2006년 이후 여건이 허락되면 홀로 갔던 나라들을 남편과 얘들과 방문했다.
2008년 겨울 프랑스 카페에서 노을이 가득한 에펠탑을 보며 남편은 밀라노의 에스프레소를 소환했다. 나의 유학기간 학원 옆 작은 카페를 종종 들렸을 나를 생각하며 "에스프레소의 쓴맛은 그리움처럼 강했다."라고 말이다. 2009년 겨울 프라하의 밤거리를 돌아다니다 추워 덜덜 떠는 남편과 들어간 카페에서 위스키가 들어간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남편은 "쓰고, 달고, 목이 타들어 가는 것 같다. 확 풀리네. 좋다." 했다. 내가 "인생 이런 거지. 당신이 좋아하니 이제 술을 사야겠네. 커피에 타 먹게." 했다. 유독 추위에 약한 남편은 위스키 에스프레소를 마시곤 정말 좋아했다. 입에 닿는 순간 뭐랄까 불과 함께 들어온 쓴맛과 단맛은 목구멍이 타들어가듯 위스키의 열기와 합쳐져 가슴속에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듯하다나? 그때 남편의 솟은 어깨는 자연스레 제자리를 찾았고 추위로 얼었던 얼굴 근육은 미소로 가득 찼었다. 노란 카페 조명 속 남편은 행복을 불빛처럼 풀었었다. 그 카페의 에스프레소와 볼그레했던 남편의 얼굴은 잊을 수 없다. 2010년 강렬한 태양빛 아래 바르셀로나의 구엘 파크 카페의 에스프레소, 2011년 터키 이스탄불 밤거리의 커피가루가 버무려진 커피까지 혼자 다녔던 장소들을 하나하나 찾아 남편에게 선물처럼 맛과 향을 주었다.
남편이 커피를 직접 볶아 에스프레소를 뽑겠다 나선 것은 2010년 즈음부터였다. 주말 부부를 하던 때라 군산에 있다 금요일 오후 집에 들어서면 커피 향이 집에 가득했다. 프라이팬에 생두를 사서 흔들며 볶았는지 부엌에는 커피콩 껍질이 벗겨져 나뒹굴었다. 내가 "아 이건 아닌 듯한데? 껍질이 사방에 날리는데 이걸 꼭 이리해야 돼요? 볶은 커피콩을 사면 안 돼요?" 했다. 남편은 "잘 치운다고 치웠는데? 껍질이 아직도 있어?" 했다. 몇 달이 흘러 남편은 지나가는 말처럼 "이제 부엌에 껍질 날릴 일은 없을 거야." 했다. 토요일 오후 아들과 산책을 하자 하니 커피를 볶겠다며 아들과 둘이 나가라 해 "어디서 볶아?" 했더니 아파트 베란다를 가리켰다. 뭔 둥근 알루미늄 통이 부루스타 위에 올려져 있었다. 손잡이가 있는 통돌이를 살살 돌리며 굽겠다는 것이었다. 남편은 얼굴 가득 미소를 지었다. 그 귀여운 미소를 뭐라 해야 할까 싶었다. 큰 체구가 베란다에 쪼그리고 앉아 구멍이 송송 뚫린 원통(직경 15cm, 높이 25cm)을 돌린다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베란다에 커피콩 껍질이 수북이 날렸다. 그냥 잘 볶는 가게에서 사자 해도 남편은 "원두를 값싸게 사서 볶겠다." 했다. 그럼 멀쩡한 기계를 사라 해도 "그건 생각보다 비싸다."며 가장 원시적인 도구들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커피콩을 볶고 정성껏 커피를 내리고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맛이 생각보다 별로."라 했다. 내가 지나가듯 "좋은 생두를 사서 잘 볶아야 제맛이 나지요? 이거 싼 생두죠?" 하면 남편은 "아직 숙련되지 않아서 그래."라며 내 말을 잘랐다. 원두를 볶더니 에스프레소 기계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한국에는 아직 조작이 쉽고 편한 기계가 많지 않던 시절이었다. 생두를 사서 약 9년 넘게 볶더니 작년에 남편이 드디어 한마디 했다. "아무리 잘 볶아도 생두가 시원치 않으면 말짱 꽝이야. 원판 불변이더군!" 했다. 내가 "그니까~~ 요. 좋은 생두를 사야 한다니까요. 좋은 옷도 원단이 50은 먹어요." 하니 남편은 "맞아 맞아." 했다. 남편은 생두의 품질보단 볶는 기술과 정성에 비법이 숨어있다 생각했는가 보다. 참... 9년 만에 생두 품질의 중요성을 온전히 인정했다. 원두를 볶으며 에스프레소 기계들은 계속 업그레이드됐다.
미국 연수를 가며 남편은 기존 사용하던 커피 머신을 중고로 팔더니 미국에서 팝콘 통돌이로 열심히 커피콩을 볶으며 거금을 들여 에스프레소 머신을 샀다. 한국보다 40% 싼 금액으로 기계를 구매하게 됐으니 남편은 미국 연수기간 내내 행복해했다. 2014년 미국 연수 당시 남편은 사직을 하고 나를 따라 얘들과 왔으니 자칭 타칭 아빠 전업주부였다. 남편은 모닝커피를 내리고 우리들을 라이드 해주며 청소와 빨래를 하곤 이곳저곳 미시건 마운트 플레전트(Mount Pleasant) 시의 카페를 기웃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큰 딸이 대학 어학코스를 밟고, 아들이 공립중학교에 다니고, 내가 학교에서 마련해준 독립 연구실에 들어가 논문 작업과 책 작업을 하는 동안 남편은 커피를 볶고, 드넓은 링크장에서 단독 스케이팅을 하고, 시립도서관에서 영어판 만화를 빌려 읽고, 일주일에 하루 무료급식소에 봉사를 가서 설거지를 하곤 삼시세끼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지냈다. 2010년 프라이팬으로 시작한 커피콩 볶는 실력은 날로 쌓여 미국 팝콘 통돌이로 볶은 콩도 제법 훌륭한 맛의 에스프레소 맛을 냈다.
2017년 집을 짓고 나선 커피 세상이 됐다. 남편은 앞마당, 뒷마당 가릴 것 없이 야외에서 커피를 볶는다. 커피콩 껍질은 집을 짓지 않은 옆 땅의 잡초에 뿌려주니 청소고 정리고 할 것 없어 좋다 한다. 사방에 뿌려진 커피가루도 집 밖의 잡내를 없애주니 커피는 남편 사랑도 모자라 정원까지 영역을 확장했다. 내가 여름에도 그늘에서 커피를 볶고 겨울에도 춥지 않게 커피를 볶으라 뒤꼍에 전용 공간을 만들어 주니 남편은 세상 좋단다. 남편의 커피 볶는 실력은 도구를 떠나 일정 수준에 올랐다. 말이 없는 남편도 콩 볶는 동안엔 수다쟁이가 된다. 옆에 앉아 있으면 이팝이 무엇인지, 향이 어떤지, 좋은 콩이 무엇인지 저절로 말이 샘솟는다. 남편은 커피콩들이 변해가는 과정을 보며 수줍은 아낙 서방님 기다리듯 향과 맛을 설레어한다. 이 콩은 과연 어떤 맛과 향의 세계로 날 이끌까? 하고 말이다.
남편이 커피에 관심을 키우더니 어느 날 커피나무를 사서 키우겠다 했다. "열대지방에서 자라는 커피나무를 사서 어쩌려고 그러냐." 해도 키우고 싶어 안절부절못했다. 2년 전 들어온 커피나무는 내가 아끼는 화분에 심겨졌다. 그 이후로 커피나무는 겨우내 썬룸에서 내가 주는 물을 마시고 여름내 내손에 잡힌 호수의 보드라운 물 샤워를 받으며 고귀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커피나무도 남편의 사랑을 알고 있듯 자태가 꼿꼿하기 이를 데 없다. 그 나무에서 커피 알갱이 하나가 매달리는 순간 남편이 얼마나 행복할지 상상으로도 훤하다. 사진을 찍고, 인터넷 카페에 사진을 올리고, 몇 개의 열매가 달렸는지 개수를 세고, 익어가는 과정을 아침, 점심, 저녁으로 기록하며 커피사랑의 최고조 절정을 이룰 것을 말이다. 가관일 듯 하지만 어찌하겠는가? 늘 공짜로 커피를 얻어먹으니 남편이 사랑하는 커피나무에 물을 주는 수밖에... 여하간 커피나무의 생장은 내 일이 됐다.
남편은 요즘도 군산에서 유명한 커피숍(미곡 카페)에 들려 생두 구매 루트와 커피 트렌드를 귀동냥하며 커피사랑에 여념이 없다. 손님을 집에 초대한다 알리면 일주일 전부터 커피를 볶고 준비를 한다. 십여 명 넘는 손님이 와도 마다치 않고 커피를 내리고 에스프레소를 아메리카노를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낸다.
생두 박스는 일주일이 멀다 하고 현관 앞에 도착하니 우린 늘 새로운 곳의, 새로운 맛의 커피를 맛보며 변화무쌍한 커피의 세계에 빠지고 있다. 커피의 무엇이 남편을 매료시켰는지, 어떻게 하여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나는 그저 연유가 무엇인지 궁금할 뿐이다. 그냥 좋단다. 맛과 향이, 맛과 향을 내기 위한 커피 볶는 행위가 그냥 좋단다. 정말 궁금하다. 한잔의 커피 속에 담긴 향과 맛이 정말 좋아서 그럴까? 하고 말이다. 어느 때건 "커피 마실까?" 한마디면 남편은 졸다가도 벌떡 일어나 커피를 내린다. 아메리카노 먹을까? 하면 기계 워밍업을 위해 이층 안방에서 뛰어내려 가 전원을 켜고, 아포가토 먹을까? 하면 냉동고 아이스크림을 냉큼 커내선 달달한 커피를 내준다. 근검절약이 몸에 밴 남편이 "뭐 그리 비싼 커피잔을 사~!" 하며 구시렁거리더니 날마다 잔을 바꿔 커피를 내어준다. 맛은 그저 그런데 잔을 바꾸니 품격이 달라졌다나? 참내 깜찍해서 웃음이 나온다.
정작 재미난 사실은 남편은 미각과 후각이 단순해 미세한 단맛, 쓴맛, 신맛, 쓴맛을 불러오는 신맛, 단맛을 불러오는 신맛, 텁텁함을 불러오는 쓴맛, 달콤함을 불러오는 쌉쌀한 맛, 상쾌함을 불러오는 쌉쌀한 맛, 아린 맛, 그저 쌉쌀한 맛, 흙 맛, 흙 맛이 감도는 단맛, 비 온 후 땅 내음이 감도는 비린맛, 각종 과일맛, 단향, 사과향, 체리향, 가벼운 향, 무거운 향, 차분한 향, 들뜬 향 등을 잘 모른다는 사실이다. 미각과 후각이 예민한 나는 남편이 세계 각지에서 구매한 그 많은 커피들의 맛을 보며 인생 참 커피 같다 느끼는데 남편은 단순한 미각과 후각으로 열심히 커피를 볶고 내린다.
남편은 커피처럼 인생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유독 추위를 타는 남편이 열대의 열기 속에 알맹이를 채워 성장한 커피콩의 열정을 닮고 싶은 것은 아닐까? 고달프고 힘든 응급실의 쓴맛 같은 현실에 한입 톡 털어 세상이 그저 달콤하다 느끼고픈 애환(哀歡)이 숨이 있는 것은 아닐까?
장맛비가 오는 저녁 포모도르(토마토) 베이스 해산물 스파게티를 해준다 하니 남편은 입맛을 다시며 커피를 내린다. 유학 준비로 함께 간 밀라노의 그 작은 카페의 커피 향이 한달음에 달려오는 듯하다. 맛나게 스파게티를 먹고는 남편은 쌉쌀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좋다 한다. "왜 그렇게 커피를 좋아해? 왜?" 하고 물으니 "나도 몰라. 그냥 좋아." 하며 미소를 짓고 커피를 마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