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짓기 5: 내 집, 네 집, 우리 집, 누구 명의?
부모님 집은 계절이 뚜렷했다. 봄이면 온 구릉에 복숭아꽃, 사과꽃, 배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꽃구경 갈 일이 없었다. 아침부터 벌들이 하루 종일 윙윙 거렸다. 구릉 전체가 분홍빛, 흰빛 꽃무리와 함께 벌의 날갯짓 소리로 가득했다. '생명이 싹트는 소리'란 이런 거구나 싶었다. 여름이면 공기와 땅에 가득한 열기가 복숭아, 사과 단내와 어우러졌고, 가을이면 초저녁부터 우는 풀 벌레 소리가 별빛에 닿는 듯했다. 겨울이 되면 농부들은 낙엽들을 군데군데 모아 태웠었다. 마른 잎 타는 냄새와 뿌연 연기는 구릉을 낮게 매웠다. 앙상한 가지만 남은 과실나무에 함박눈이라도 오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사계절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던 이층 집은 아침마다 새롭고 저녁마다 새롭고 계절마다 새로웠다.
부모님 집엔 과실나무들이 사계절을 알렸었다. 뒤꼍 샘터 옆에 크게 자란 매실은 봄을 제일 먼저 알렸고, 샘 동쪽 담벼락에 심은 포도넝쿨은 여름이면 새콤한 포도를, 남서쪽 빨간 사과는 이른 여름을, 무럭무럭 자라 주렁주렁 맛나게 달린 체리는 한 여름을, 서북쪽 초록 사과는 초가을을, 남쪽과 서쪽 각각에 심어진 대추나무는 늦가을을, 서쪽에 심어진 감나무는 초겨울을, 탱자 울타리에 가득 달린 노란 탱자는 겨울이 왔음을 알렸다. 부모님은 늘 사시사철 과일 꽃을 보고 과일을 수확해 다섯 자녀에게 골고루 나눠줬었다. 마음의 풍요와 현실의 풍요를 함께하는 집은 좋은 공간이었다.
형제자매가 차례로 결혼하며 손자 손녀들이 늘어도 엄마의 사과밭에 지어진 이층 집은 손자 손녀들이 늘어도 품이 넉넉했다. 대가족이 모이면 부산하게 밥을 해 먹고 고기를 구워 먹고 정신 사납게 놀았다.
다행(집값이 크게 올랐다.)인지 불행(아름다운 전경이 사라졌다.)인지 그 많던 과수원은 점점 사라졌다. 도로를 따라, 아파트 단지를 따라 상가들이 즐비하게 들어섰다. 딸이 자랄 때만 해도 아이스크림 하나 사려면 한참을 걸어내려가야 했던 슈퍼는 아들을 낳고 아들이 뛰어다닐 때는 대문만 열면 코앞에 대형 슈퍼가 생겨 아버지와 아들은 시도 때도 없이 슈퍼에 들어가 온갖 아이스크림을 검정 봉지에 사들고 왔었다. 단 과자와 단 음료를 좋아했던 아들은 틈만 나면 할아버지 손을 잡아끌고 슈퍼로 갔다. 아버진 우리에겐 엄격했지만 외손녀, 외손자의 재롱엔 한여름 아이스깨끼 녹듯 맘이 녹아 얼굴 가득 미소를 짓곤 손자들과 검정봉투를 들고 다녔다.
주말에 친정에 들러 일주일 내내 직장생활로 지친 내가 한 두어 시간 퍼질러 자는 동안 아버지는 늘 아이들과 동네를 돌아다녔다. 아버지는 끝없는 질문에 얼마나 자상하게 설명하던지. 사람은 시간 속에서, 새로운 생명을 바라보면서 변하는 존재란 생각을 했다.
2016년 늦여름, 집 지을 업체를 선택한 후 계약서를 작성했다. 우리가 원하는 평수(약 50평/대지 120평)와 이미 그 회사에서 지었다는 집 스타일(경량식 목구조의 모던 스타일: 정면 부위에 큰 창이 길게 배치되는 스타일)을 알려주니 디자이너(건축설계사)가 며칠 후 집터를 방문할 것이라 했다.
일주일 후 디자이너와 택지를 함께 둘러보곤 설계 논의를 했다. 일단 우리가 원하는 구조는 차를 한대 넣는 주차공간을 만들고, 거실, 식당, 안방(드레스룸, 화장실), 딸방, 아들방, 서재를 넣는 구조를 주문했다. 여기에 더해 일층에 안방을 넣는 것과 이층에 안방을 넣는 구조를 계획하여 시안을 주면 좋겠다 했다. 안방을 일층에 넣는 것과 이층에 넣는 방안의 옵션을 주었는데 남편은 시종일관 안방은 이층에 넣겠다 했다. 사실 나는 이십여 년 안방에서 자전거를 타며 운동을 하던 터라 조그마한 운동실을 별도로 만들고 싶어 했는데 남편은 "그럴 필요 없다." 했다. "방 하나 만드는 공간이 얼마나 큰 비용인데." 했다. 남편은 소요비용에 집중했고 나는 실제 생활에 집중했다. 그것만 다르랴? 남편은 보온과 동선에 집중했고 나는 햇볕과 심미적 만족감에 집중했다.
남편은 최대한 동선이 심플한 구조로 집을 지어야 건축면적 대비 건축비가 합리적으로 들어감을 알고 있었고 나는 동선이 약간 복잡해도 느낌 있는 구조를 원했다. 몇 달 넘게 집 구조로 실랑이를 벌였다. 남편은 단순함이 최고의 미덕(심플 이즈 베이트: Simple is best)이란 생각이 확고했고 나는 동선이 조금 복잡해도 느낌 있는 집을 원했다. 남편은 군산 도시형 택지에서 차고를 만드는 것 자체가 무슨 의미인지 했다. 남편은 "결국은 다 길거리에 차를 세우는 데다가 혹여 집안에 주차를 했다가 인근 아파트 사람이나 주변 방문자가 정작 내 집 앞에 주차를 해버리면 도리어 오도 가도 못할 수 있으니 차를 넣을 필요가 없다."는 주장을 펼쳤다. 주차장을 없애기로 했다. 지금 생각하면 주변에 집이 많이 지어지면 주차공간으로 활용하고 지금처럼 집이 없을 때는 운동실로 사용해도 됐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나는 안방을 좀 넉넉한 크기로 만들고 안방 드레스 룸과 화장실이 여유 있게 구성되었으면 하였지만 남편은 적정 규격이 이미 머릿속에 있었다. 남편은 늘 말은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해~." 해놓고선 동선과 보온과 비용을 들이밀며 자신의 생각을 말했는데 말을 듣다 보면 다 옳은 말이기도 했다. 논의할수록 내가 살고 싶은 집의 그림에서 점점 멀어지는 집이 돼가고 있었다. 디자이너가 몇 번의 수정 디자인을 보내줬지만 남편은 이건 아니라며 동선을 운운했다.
디자인을 받은 후(첫 디자인은 2016년 10월 말에 보내주었는데 우리는 2017년 2월에도 계속 초기 설계를 확정 짓지 못하고 있었다.)네 달이 지나가고 있었다. 내가 그 당시 학교 보직을 맡고 있었고 중요한 정책연구과제 책임을 맡아 지필을 하고 있던 때여서 정신적으로 지친 상태였다. 집 설계 논의가 지지부진하던 어느 날 남편은 저녁 후 커피를 마시며 힘없이 말했다. "여보! 내가 생각해 보니 당신과 내가 함께 모은 소소한 재산은 다 당신 명의더라고. 그러니 지금 짓는 집은 내 명의로 하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해?" 했다. 내가 웃으며 "그러길래 오피스 살 때며 택지 명의 신고할 때 공동명의로 하자고 했더니 귀찮다고 다 내 이름으로 하라고 하고선~. 이제 와서 생각하니 허전한가 보네?" 했다. 남편은 "그러게~ 택지도 공동명의로 할걸 그랬어. 여하간 어떻게 생각해? 이 집 땅 명의는 당신 거니까 집은 내 명의로 하자. 어때?" 했다.
웃음이 났다. 내가 바쁘기도 했지만 남편과 상상하는 집의 그림이 다르니 남편이나 나나 사 개월 설계도를 보다 서서히 지쳐가고 있을 즈음이었다. 내가 "그럼 이 집은 당신이 원하는 대로 짓고 다음 집은 내 맘대로 하는 걸로 타협할까?" 했다. 남편은 "다음 집? 그래 그럼, 다음 집은 당신이 짓고 싶은 대로 지어~ 그럼 확정한 거다. 이 집은 내 명의로 내가 원하는 대로 짓는 걸로." 하며 남편은 너무 좋아했다. 결혼해 이십 년이 넘게 살다 자신 명의의 집을 짓는다니 너무 좋다며 얼굴이 싱글벙글했다. 남편은 복잡해 보이던 디자인을 다 버리고 자신이 원하는 디자인으로 집 설계를 부탁했다.
디자이너(설계사)가 제안한 초기 1안과 2 안중 나는 1안이 나쁘지 않다 여겼지만 남편은 지우개로 지우듯 싹 버리고 자신만의 심플 이즈 베스트(simple is best) 안을 만들었다. 뭐하러 복잡한 모양 집을 짓느냐는 것이다.
심플 이즈 베스트로 집 설계를 확정했다. 설계도를 보면 알다시피 일층 욕실과 이층 욕실은 같은 위치이고 일층에 이층을 올려 지붕 덮는 부분도 최소화했다. 앞 데크도 일자 구조로 단순함 그 자체였다. 너무 단순해서 나는 남편에게 "성냥갑 집, 깍두기 집"이라 했다. 남편은 시종일관 심플 이즈 베스트라며 자신이 21세기에 독일의 '바우하우스 정신을 계승한 것'이라 했다.
앞 데크도 쓸데없이 넓다며 줄이려는 것을 간신히 늘려 8평 남짓하게 만들었고 뒤꼍 공간도 살렸다. 안방과 서재의 데크 공간도 없애려는 걸 남기느라 정말 노력했다. 남편은 정말 심플하게 집 설계를 확정하며 내게 뒤꼍 공간이 넓으니 줄이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내가 도면을 보니 아닌 게 아니라 뒤꼍 공간이 제법 있어서 공간 활용을 하려면 하겠고 아니면 정말 필요 없는 공간이 될 판이었다. "내가 잘 쓸 수 있도록 하면 되겠지. 조그마한 샘도 만들고 불을 지피는 공간을 만들고 말이야." 하니 남편은 "그런 공간이 무슨 쓸데 있어?" 하며 날 타박했다. 그래도 난 그냥 그것만은 그대로 했으면 한다 하니 설계사가 중재를 했다. "공간은 어떻게 쓰느냐에 달렸는데, 사모님이 쓰실 아이디어가 있을 듯한데, 그냥 하시죠." 했다. 남편은 뒤꼍 공간을 싫어했다. 뭐하러 그런 공간을 만드느냐며 내게 눈을 흘겼지만 난 못 본 채 했다.
일층과 이층의 도면이 완성된 후 집 입체 도면을 완성하며 창 모양과 크기를 결정했다. 남편은 창이 많을수록 단열에 문제가 있다며 큰 창과 많은 창에 불만을 토로했다. 내가 빛이 드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가우디의 까사 바트요(Casa Batlló)에서 경험하지 않았냐고, 천장에 큰 창을 내겠다는 것도 아닌데 뭐 그리 창을 없애려 하는지 했다. 남편은 천장 창 얘기를 듣는 순간 바로 알아다며 크게 크게 창을 내보자 내 의견을 수용했다. 남편은 잘못하다간 천장에 창을 내겠다고 내가 우길 것 같았나 보다.
빨간색으로 표시된 창은 모두 내가 바득바득 우겨서 넣은 창들이고 창문의 크기는 넣을 수 있는 최대 넓이였다. 없던 창을 만들면 남편은 "그걸 왜?" 했고 있던 창도 "너무 크네. 줄이면 어떨까?" 했지만 보다 못한 디자이너가 내 손을 들어줬다. "창이 많으면 자재비도 더 들고 보온에 영향 있을 것이라 생각하시지만요. 건축주님! 군산은 추운 지역이 아닙니다. 군산은 평균기온이 대체로 높은 곳이라 창문도 비싼 것을 달지 않아도 되고 이중창으로 하지 않으셔도 되고요. 채광이 좋으면 겨울 보온에 유리하고 집이 환하니 나쁘지 않습니다. 사모님 건의대로 하셔도 무방할 것 같아요." 했다. 남편은 집의 큰 그림이 자신이 원하는 구조임으로 결국 창의 모양과 개수는 내게 양보했다.
삼 년 살아본 지금 남편은 창이 많아서, 겨울 내내 밝고 집이 따스해서 좋단다. 밤 당직을 하고 온 날 오후, 거실 소파에 누워선 시원하게 뚫린 창 덕분에 구름이 날고, 새가 날고, 비가 오고, 눈이 오는 것을 생각 없이 볼 수 있어서 좋단다. 창이 많아 추위를 그리 걱정하더니 반바지를 입고 여름 잠옷을 입고 다닌다. 하루 종일 빛을 받은 집은 좀처럼 실내온도가 떨어지지 않으니 말이다.
여하간 남편은 이 집이 자신 집이라는데 너무 만족한다. 감리에게 설계도를 넘기고 집을 짓겠다 공사일정을 일 개월 남긴 어느 날이었다. 아침에 출근했는데 카톡으로 점심을 학교 근처 식당에서 먹자 하며 할 말이 있단다. 점심에 만나니 남편은 "당신이 도장을 찍어 줘야 집을 짓는다네." 했다. 남편은 서류한 장을 내밀었다. "뭔 도장?" 하니 남편은 "당신 땅에 집을 짓는 거라 내 명의로 집을 지으려면 당신이 땅에 건물을 짓는 것을 허락해줘야 한다고..." 내가 웃으며 "그럼 내가 도장 안 찍으면 당신 명의 집은 못 짓는 거구나?" 했다. 남편이 웃으며 "그래서 도장 안 찍겠다는 거야?" 했다. 둘이 한 참 웃었다. '아 명의라는 것이 이리 중요하구나. 한순간에 모든 걸 물릴 수도 있는...'
내가 한 참 웃다가 남편에게 말했다. "다음 집은 땅 명의도, 설계도, 디자인도 내 맘대로 하고 싶은데, 동의해요?" 하니 남편이 "그럼 동의하지. 그래 이 집은 내 맘대로 설계했으니 다음 집은 당신 맘대로 해." 했다. 내가 "다음 집은 이 집 팔아서 질 거야. 한 십 년 살다가 말이야. 어때?" 하니 "그래그래, 그래야지. 이 집 팔아서 더 잘 지면 좋지." 했다. 남편의 대답에 도장을 시원하게 찍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