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춘희 여사
아빠는 가난했다. 어릴 때 남들만큼 공부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농사꾼이었던 할아버지는 땅을 빌리는 입장이었으니까. 아빠의 운명, 5남 1녀 중 차남은 모호한 순서였다. 형과 동생들에게 무조건적인 양보를 강요받았다. 아빠는 가족 안에서 어쩌지 못할 자신의 삶을 읽어냈고, 일찍 전기 기술을 배워 돈을 벌었다.
아빠는 무릎이 닳아빠진 바지를 입고서 선을 봤고 엄마를 만났다. 지금도 아빠 때문에 속을 썩는 엄마가 가끔씩 진심을 담아 이야기한다.
“네 아빠, 불쌍해서 내가 결혼해줬다!”
아빠는 돈을 버는 대로 저축을 했고 그 돈으로 집을 지었다. 집을 짓고 나서는 나를 포함한 삼남매를 위해 다시 저축을 했다. 아빠는 미처 끝내지 못한 학업에 대한 한을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다고 했다. 덕분에 나는 공부에 필요한 용품과 참고서를 살 때만큼은 부모님으로부터 부족함 없는 지원을 받았다. 하지만 용돈은 달랐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일주일 용돈으로 오백 원을 받았으니 말이다. 삼백 원짜리 과자 한 봉지를 사 먹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다행히 친구들 생일 선물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하면 엄마가 나대신 시장에서 물건을 사다줬다. 물고기가 그려진 보라색 지갑, 샛노란 장갑, 가짜 진주 목걸이 등등.
그때부터 나에게는 혹시 모를 비상 상황을 대비해 돈을 모으는 습관이 생겼다. 하지만 아빠의 지나친 절약 정신을 닮아서인지 나를 위해 돈을 쓴 적이 거의 없었다. 친구들이 햄버거를 먹으러 가자고 하면 핑계를 대며 빠져나왔고, 좋아하는 연예인 사진도 변심한 친구를 구슬려 얻고는 했다. 차곡차곡 모은 돈으로 엄마의 생신 선물을 사거나, 언니와 오빠의 ‘계략’에 넘어가 모은 돈을 모두 빼앗기는 날이면 나는 다시 빈 저금통을 채워야했다. 세뱃돈을 받으면 무조건 엄마한테 맡기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린 내가 감히 툭 던졌던, ‘살림에 보태 써’, 정도의 의미 같다.
대학교 1학년, 아빠의 강요 아닌 강요로 여름방학 동안 해수욕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두 달 꼬박 살을 태워가면서 일을 하고 받은 돈은 130만 원 남짓이었다. 아빠와 엄마는 그 돈으로 ‘딤채 김치냉장고’를 냉큼 들였다. 내게 남은 거라고는 양말 덕에 덜 타서 유독 도드라져 보이는 발목이 전부였다. 돈에 대해, 그리고 나만을 위한, 나의 특별한 소비에 대해 별다른 생각이 없었기에 그래도 되고,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돈에 대한 나의 생각을 바꾸는 계기가 있었다. ‘오냐오냐 주문’에 길들여졌던 오빠는 인터넷 도박에 빠졌다. 곧 집안 살림이 거덜 났고, 나 역시 그런 집안 사정에 휘말렸다. 그것은 내가 원치 않는 지출이었다. 공황장애를 얻을 정도로 고생해서 받은 월급 중 기본적인 생활비를 제하고 모두 부모님께 보냈다. 하지만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돈과 함께 내 인생도 낭비되는 것 같았다. 나는 안 되겠다 싶어서 2년 만기 적금을 들었다. 달마다 5만원 씩 부어 2년 후에는 어디든 훌쩍 떠날 참이었다. 나는 돈을 아끼고 모으기 위해 더 부지런해졌고, 이를 악물고 살았다. 그런데 생이 계획대로 될 리가 있나.
나는 올해 아흔을 앞둔 할머니와 통화를 하면서 계획했던 여행을 포기했다. 안경 없이 ‘교차로’를 읽고, 그 누구와도 거리낌 없이 대화하실 만큼 정정하셨던 할머니의 건강이 예전 같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할머니는 내 귀가 따가울 정도로 큰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그것도 일방적으로. 아무래도 내 목소리가 잘 안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엄마한테 물었다. “할머니 보청기 안 해드려?” 답은 간단했다. “할머니가 보청기 싫으시대.”
나는 할머니의 숨은 뜻을 알아차렸다. 적금 만기가 도래하자마자 할머니가 계신 시골로 내려갔다. 지금은 착한 딸보다 착한 손녀가 되고 싶었다. 할아버지의 마지막이 될지 모르고, 다음 주 병문안 가겠다는 기약 없는 약속만 거듭했던 나의 다짐도 지키고 싶었다.
아빠보다 더 지독했다던 할머니의 절약정신을 나는 겪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랬던 할머니가(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할머니는 ‘위뜸’ 꼭대기에, 우리 가족은 ‘중간 뜸’에 살고 있다.) 한번은 시장에 가서 빈 병을 팔고 올 건데 나에게 먹고 싶은 게 없냐고 물었다. 나는 츄파춥스 사탕이 먹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시장에서 돌아온 할머니는 내 손에 츄파춥스 사탕 세 개를 꼭 쥐어주었다. “아가, 언니 오빠도 주지 말고 너만 먹어.”라는 당부와 함께. 나는 감히 츄파춥스를 탐내지 못하는 언니와 오빠 앞에서 참 얄밉게, 맛있는 시간을 보냈다.
내 기억 속에서 나를 울리는 할머니의 소비는 여러 번 더 있었다. 대학생이 된 나는 엄마로부터 식량을 조달받았다. 엄마가 나에게 택배를 보낸다고 하면 할머니는 새벽부터 찾아와 문을 두드리며 비닐봉지를 두고 가셨다. 그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안에는 호박, 상추, 방울토마토, 고추, 깻잎 등 할머니의 정성이 묵직하게 담겨 있었다. 참치 캔도 더러 있었다. 그런데 어찌 할머니의, 소리가 사라진 세상을 두고만 볼 수 있겠는가.
나는 내 인생 최고의 소비를 위해 할머니를 모시고 보청기를 맞추러 갔다. 할머니는 끝까지 손사래를 치며 오빠 빚 갚는데 도움을 주라고 했다. 하지만 그때만큼은 죽어도 할머니의 뜻대로 하기 싫었다. 할머니는 청각 검사를 받고 보청기를 맞춤했다. 물론 만기 적금을 탈탈 털고도 모자라 신용카드를 긁어야 했다. 내가 주체적으로 결정한, 최대의 소비, 최고의 소비였다. 할머니의 보청기 적응은 할머니와 엄마에게 맡겨 두고 떠났다. 나는 엄마의 복잡한 표정을 모른 척 했다. 내 멋대로 해석하자면 엄마의 표정은 ‘적금이 있었니?’ 혹은 ‘엄마한테 상의 한 번만 하지.’ 정도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하지만 며칠 후 엄마는 나름의 ‘쿨한’ 반응을 보였다.
“잘했다!”
할머니는 보청기 착용 시간을 점점 늘리고 있다 했다. 며칠 후 할머니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나는 일부러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할머니.” 할머니가 아주 살짝 짜증을 냈다. “크게 말혀!”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할머니가 내 목소리를 다시 듣고 있다니. 할머니는 나한테 고마움을 전했다. “손녀 잘 둬서 보청기도 끼고. 근데 비싸서 어쩌냐.” 나는 할머니가 미안해하지 않도록, 개뿔 아무 것도 없으면서 짐짓 있는 척을 했다. “할머니! 보청기 안 비싸! 나 그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어! 말만해!”
할머니는 하루 중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보청기 덕을 톡톡히 본다고 했다. 4-5년이 지나면 보청기를 새것으로 교체해야 하는데, 보나마나 할머니는 그 기한을 훌쩍 넘겨 알뜰하게 보청기를 쓰고 있을 것이다. 손녀가 해준 보청기라고 무척 소중하게 다루신다는 이야기를 이후로도 몇 번이나 들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돈의 가치를 넘어서는 소비의 요정 우리 할머니.
나는 지금도 오빠의 실수로 생겨난 빚을 갚느라 노년의 안락함을 다 포기한 부모님에 대한 보조, 회사를 다니다 문득 환멸을 느껴 도피처로 택한 대학원의 학자금을 상환하느라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한때 ‘금수저’ 집안이 아닌 것을 속으로 탓한 적이 있으나, 금수저 집안이었으면 오빠의 최악의 소비를 더 부추겼을 뿐이라고 자위했다. 나는 다시 적금을 붓고 있다. 한 달에 이십만 원, 3년 만기다. 나는 내 인생 통틀어 두 번째, 최고의 소비를 위해 준비하고 있다. 마흔 전, 홀로 유럽 여행을 떠나기 위해서 말이다. 이제 2년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