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째 하고 싶은 것
“언니, 어제 언니 다녔던 그 회사 국정감사 나와서 털리는 거 봤어?”
나의 첫 직장에서 후배였고, 대학에서도 친하게 지냈던 후배가 오랜만에 연락을 해왔다. 안 그래도 지난밤, 10시간이 넘는 분량의 그 국정감사 영상을 꽤나 집중해서 보았던 탓에 생각은 뒤죽박죽이었고 마음은 싱숭생숭했기에 꿈자리까지 사나웠던 밤이었다.
오랜만에 온 후배의 연락에 “나는 언제쯤 그 시절을 떠올렸을 때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라고 답장을 보냈다.
나는 언제쯤 내가 벗어나고 싶었던 세계에서 진정으로 자유로운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 시간들을 유쾌하게 받아들이고 나 스스로 당당하고 겸허하게 추억할 수 있는 날이, 오기는 할까?
첫 직장에서의 10년, 그 경력을 바탕으로 이직한 회사에서의 1년. 총 11년
나는 아직도 훌훌 털어내지 못한 그 과거의 11년의 경력에 머물러 있었다. 같은 전공을 마치고 취업한 친구들과 나는 직업의 이름은 같았으나 그 직업에서 나의 업계는 유독 특별했다. 자주 매스컴에 등장하고,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뉴스에 전달될 내용도 많은 분야였으며,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는 미해결 숙제처럼 남아 있는 분야라 가끔은 사회적 이슈로 등장하기도 했다.
그런 일이었기에 더 보람 있고 자부심을 갖게 하기도 했지만, 그런 일이라서 부담스러웠고 버거웠으며, 벗어나고 싶었다. 무한한 책임감 앞에서 나는 결국 11년 만에 기권한 셈이다. ‘할 만큼 했다’, ‘버틸 만큼 버텨봤다’, ‘해볼 수 있는 경험의 최대치를 겪어봤다’라는 나름의 합리화를 끝내고 나는 이 업계에서 떠날 결심을 했다.
영영 돌아오지 않겠다고 마침표를 찍은 뒤에는 아예 전공을 바꾸려 전혀 다른 분야의 대학원까지 진학했으며 졸업도 마쳤다. 그리고 나는 이제 새로운 출발선 앞에서 과거에 일들은 고이 묻어두고 힘차게 다시 뛰어가면 될 일이다.
“언니, 거기 그만두길 정말 잘했다. 그치? 거기 계속 다녔으면, 으휴... 진짜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
누구보다 나의 그 11년의 시간을 잘 알고 있는 후배가 보내온 답장이었다. 그래, 후배의 말이 맞다. 나는 그냥 그렇게 여기면 되었다. 그 국정감사 영상을 보고는 그저 ‘내가 저기서 계속 일했다면, 진짜 또 회사에서 며칠밤을 꼴딱 새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느라 점심도 저녁도 못 챙겨 먹고 남몰래 울며 일하고 있었겠다’ 하면서 그만두길 천만다행이라고만 여기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못했다. 우연히 내 눈앞에 나타나 결국 나를 또다시 혼란스럽게 했던 그 국정감사 영상을 보면서 ‘버티지 못했던 나’, ‘도망치듯 퇴사를 결정한 나’로 여전히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나는 그 11년의 역사를 보내며, 어떠한 힘든 상황에서도 버티는 것, 견뎌내는 것이 나의 최고의 능력이라 여기며 자랑삼다. 그러나 결국 기권을 결정하면서 나에게 생긴 그 포기의 사건, 실패의 서사에 대해 인정하기가 어려웠다. 어떻게 하면 내가 그 상황을 지혜롭게 헤쳐나갔을 수 있었을까, 달라지게 할 수 있었을까에 대해서 줄곧 고민했지만 늘 답을 찾지는 못했다. 결국 나는 그리 잘 버티지도, 견뎌내지도 못했으며, 커리어의 원점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이 허무했다.
그렇게 허무한 마음을 다독이며 새로운 출발선 앞에 서기로 작정하고 아득바득 새로운 것을 배우고, 새로운 환경을 탐험하며 새로운 관계를 맺어가며 또 다른 세상을 맞이하기 위한 나름의 노력을 다하다 보니 그 시간들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고, 과거의 허무한 기억쯤은 별것 아니라 여겼는데, 나는 과거의 기사들과 또 국정감사 영상 앞에서 다시금 어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부정출발을 한 번하고는 다시 출발선 앞에선 육상선수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출발을 앞둔 지금 이 순간에는 더는 실수하지 않아야 한다. 더 잘 해내야 한다. 더 견디고 버텨내야 한다. 무엇이든 같은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된다.
여러 가지 마음들이, 생각들이 복잡하게 흘러갔다. 자신의 흑역사를 훌훌 털어내는 일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대부분의 일들은 잊어버리든 잃어버리든 시간이 해결해 준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 흑역사의 시간을 털어내는 일은 제법 많은 시간이 필요한가 보다. 그리고 내 안에 새로운 성공의 사건들이 다시금 차곡차곡 쌓여야 더욱 단단히 묻히는 모양이다.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 믿으며 애써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쿨한 사람들처럼 잊어야 할 것은 잊고, 무시해야 할 것들은 적당히 무시하며, 그렇게 살아가고 싶다.
30대 중반의 나는 무척이나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무엇이든 견뎌내고 나답게 소화할 수 있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삶에서 커다란 터닝포인트가 된 몇 가지 사건들 앞에선 나는 무척이나 약하고 깨어지기 쉬운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강한 것은 결국 언젠가는 깨어지는구나. 자그마한 균열들이 하나씩 생기고 나면 결국 언젠가는 깨어지기 마련이구나. 그리고 한 번 깨어진 것을 다시 붙이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배운다.
새로운 시작을 앞두고 깨어지는 나를 자주 발견하게 되었다. 깨어진 것을 다시금 단단히 붙여보고 싶지만 이조차 쉽지가 않다. 늘 강하기만 한 것은 능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몸소 배웠기에 새로이 시작하고 싶은 나는 유연해지고 싶다. 흔들리고 휘청이더라도 유연하고 부드럽게 다시 일어나는 사람이고 싶다.
□열 번째 버킷리스트
'강한 나'도 '깨어진 나'도 결국은 '나'라는 사실을 인정하자. 받아들이자. 그다음에 유연해지도록 도전해 보자. 노력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