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도매상인이었다.
박스로 포장된 책을 사고파는 사람. 출판사에서 일하던 경력으로 전국 서점을 다니며 도매로 책을 계약하고 판매하는 사람이었다.
우리 집엔 하늘색 셔터로 여닫는 차고 겸 창고가 있었다. 거긴 늘 번잡한 도시의 기차역처럼 새로 들어온 책과 팔려나갈 책들이 쌓여있었다. 집에 책을 팔러 온 외판원들은 집 문턱에 걸터앉아 잠시 숨 고르며 책장을 둘러보고는 별말 없이 돌아가곤 했다. 백과사전이나 세계 명작을 다 읽으면 아버지는 책을 박스에 넣고 다시 포장해서 팔았다.
일하러 가시며 아버지는 늘 50센티미터쯤 셔터를 열어두었다. 창고로 기어들어가 떠다니는 먼지와 오래된 책 냄새, 책마다 전혀 다른 종이의 감촉, 그리고 낯선 이야기의 세계로 곧잘 빠져들었다. 어느 날은 만화책방을 인수했는지 짝을 찾을 수 없는 만화책들이 창고를 가득 채운 때도 있었다. 한참 읽다가 끊어져 버린 이야기의 다음 스토리를 상상하며 다음 권을 찾고 싶어 안타까워했다. 어떤 책 속엔 외계에서 지구로 온 여주인공의 몸에 나비 무늬 얼룩이 있고, 그 종족을 찾아내 탄압하는 무리의 이야기가 있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분명 나도 외계에서 왔을 거라고, 누군가 나를 찾으러 와 말을 걸어도 난 놀라지 않을 거란 상상을 했다.
의학 백과사전을 읽으며 내가 걸리고 싶은 병을 골라보았다. 낚시에 대한 책이나 '피겨 네일'이라는 이상한 이름의 물건 박스들이 들어왔던 일도 기억난다. 손톱에 꽃무늬나 나비 무늬를 붙이는 스티커 상품이었는데, 아버지가 사 온 것들은 모두 유행을 너무 앞서 나갔는지 잘 팔렸던 것 같지는 않다. 동생과 나는 그 상품을 몇 개씩 까서 공책이나 연습장에 긁으며 놀았다. 새끼손톱용 꽃무늬가 작으면서도 가장 예뻤다. 그렇게 창고에 쌓여 있다가 어느 날 박스들은 다른 곳으로 떠났다.
낡은 타자기 한 대도 있었다. 한때 아버지의 사무실이 집에 있었기 때문에 이제는 사용하지 않고 남겨진 물건이다. 몇 년 후 이모가 내게 타자 치는 법을 알려줘 뛸 듯이 기뻤다. 처음으로 검은색 전화기가 놓였던 날이 기억난다. 2-2553번이던 전화번호도 기억난다. 수화기를 들면 뚜ㅡ하고 신호음이 들리던 전화기, 다이얼을 돌리면, 특히 0번을 선택해 돌리면 감겨있던 둥근 다이얼이 차분히 풀리던 그 소리가 좋아 숨죽여 듣던 기억이 난다. 0, 0, 0을 반복해서 돌리며 내가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한 장소로 전화가 걸리고 낯선 이가 전화를 받아 여보세요, 할 것 같아 가슴이 두근거렸다.
무서운 일도 많았다. 초등학생 때 전학을 네 번 다녔고, 4학년 때에는 처음 입학했던 학교로 되돌아갔다. 친구란 사귀면 금세 헤어져야 해 슬픔을 주는 존재였다. 3학년 두 번째 학교 마지막 날, 반 친구들 몇몇이 아이스크림을 사서 봉지째 내 손에 들려주던 기억이 난다. 미경이란 친구와는 헤어지고도 십 년이 넘게 편지를 주고받았다. 마음에 늘 그리움이 있었고, 외로웠다. 선생님들은 날 예뻐했으나 그 때문인지 또래 여자아이들과는 어울리지 못했다. 선생님들이 그렇게 만든 것만 같아 싫었다. 아이들이 계속 뭐라고 수군대는 기분이었다. 남동생과 의자 다리에 줄을 걸어놓고 고무줄을 했다. 상장을 나눠주면서 대답하는 목소리가 작다고 뺨을 때리던 고학년 선생님도 기억난다.
시골 학교라 간간이 사고가 있었다. 강변에서 아이들이 익사하는 사고, 정신지체아가 동네의 어린 여자 아일 죽인 사고, 누가 아는 척하지 않아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사계절 같은 옷을 입고 동네를 쏘다니던 미친 여자, 초등학생이 되기 전 처음 사귄 소꿉친구는 함께 도로를 건너다 대구 번호판을 단 승용차에 치여 급하게 병원으로 옮겨졌고, 이후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학교에는 같은 성을 가진 보육원 아이들이 많았는데, 한 번은 친구를 따라 놀러 갔다가 보육원의 수많은 아이들이 나를 구경하겠다며 몰려왔던 적이 있다. 소풍 갔던 초당 솔밭에서 어느 여자의 토막 시체가 발견되었다던 이야기, 자그마한 학교 도서실 책에 실감 나게 묘사되어있던 반공 도서 속 잔인한 전쟁 이야기, 우물에서 시체를 건져 올리던 희미한 흑백사진들, 생쌀을 먹고 배가 터져 죽었다던 사람들, 이승복 어린이에 대한 영화를 보고 기념관을 다녀와서 꿈을 꾸었다. 공산당이 쳐들어오는 꿈, 모두가 다 죽어버렸는데 나만 혼자 벌벌 떨며 죽은 척하던 꿈들. 중학생 때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멀리서 본 정면충돌로 일그러진 대형트럭, 운전석에 끼여있던 죽은 사람의 모습, 자전거를 타고 우리 옆을 지나간 남자가, 돌아보니 아랫도리에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은 걸 발견하고 친구와 둘이서 무서워하며 달려가던 기억들.
글쓰기에 대한 책 <계속 쓰기: 나의 단어로>를 읽으며 글쓰기에 대한 생각을 쓰고 싶었는데, 이번에도 나의 이야기는 나를 배반하고 제멋대로 흘러간다. '책'이란 게 사람이 쓰는 글로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늦게 알았다. 평범한 사람이 글을 쓰고 책을 내면서 작가가 된다는 사실을. 나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고, 너무나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에야 내가 쓰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겨우 이해하게 되었다.
내게도 마음이 아프던 때가 있었다. 그때의 불확실, 불안, 우울, 슬픔의 감정들이 지금의 나를 나답게 만든 요인이 되었다. 지난 시절의 감춰왔던 모든 기억이 글감이 되고 동력이 될 수 있음이 신기하다. 그래서인지 글쓰기가 힘들거나 어렵다는 생각보단, 쓰는 내가 대견하다, 로 생각이 바뀐 것 같다. 지속되는 즐거움이었으면 한다, 나의 글쓰기는. 쓰고 있다는 이 느낌이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였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