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꽃과 함께

by Soopsum숲섬


새벽이다.

강렬하게 밖에 나가서 뛰고 싶다.

동네를 한 바퀴 돌고 와야겠다.

포구까지는 뛰어서 6분이 걸린다.

잔잔한 바다 위로 벌써 해가 떠 있었다. 인디언 핑크 하늘과 스틸 블루의 바다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조합인데,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무척 행복해졌다. 전깃줄엔 날씬한 까치 두 마리가 몸을 단장하고, 하늘과 바람은 새롭다. 대문을 열고 나와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린 채 일터로 가는 삼춘들, 몇 명의 다이버들이 섬으로 가기 위해 시동 걸린 배에 산소통을 싣고 있었다. 포구에 걷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고, 빨간 등대 위로 커다란 황새(로 보이는) 한 마리가 천천히 선회한다. 유난히 고요한 낮은 바다를 보다가 돌아왔다. 숨차게 뛸 땐 모르지만, 혼자 걸어갈 땐 어김없이 누군가 뒤에서 쫓아오고 있다는 생각이 나를 쫓는다. 모두가 부러워할만한 빼어난 동네에 살면서, 나 혼자(봉봉이 없이) 이른 아침에 뛰어본 건 처음인가 보다.

스물세 살 자취생이던 어느 날, 그날따라 유난히 부지런하게 새벽밥을 지어먹고, 시험공부를 하기 위해 학교로 갔다. 6시가 조금 넘어서였는데, 가방을 메고 발걸음도 발랄하게 동네 주택가를 걸어가고 있었다. 다리를 건너는데 뒤에서 어렴풋이 들리던 발소리가 갑자기 뛰어오더니 거칠게 나를 붙들고 입을 틀어막았다. 나도 모르게 크고 긴 비명을 질렀는데 온 동네에 다 들릴만큼 큰 소리였다. 재빨리 눈을 굴려 둘러보았으나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조용히 하라며, 남자는 내 옆구리에 (마치 칼인 것처럼) 뭔가를 들이댔는데 다행히 그건 손가락 같았다. "뒤로 돌아, 빨리 뛰어."라고 했다. "제가 발목을 다쳐서 빨리 못 가요."라는 거짓말을 하며 질질 끌려갔다. 최대한 시간을 끌어보려고 했으나 속수무책이었다. 다리를 건너 두 번째 집을 지날 때 그 집 대문이 열리고 엄마와 딸이 목욕탕을 가기 위해 나오다가 나와 그 남자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남자는 갑자기 "가!" 하며 나를 놔주고 빠르게 사라졌다. 한참 동안 나는 담벼락에 겨우 붙어 서 있었다. 아는 사람이냐는 그들의 질문에 대답도 못하고 고개를 저었다. 그분들께서 나를 가까운 버스 정류장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날 도서관에 앉아서 친구를 기다리는 동안 뒤에서 다가오는 발소리가 무서워 견딜 수가 없었다. 친구들이 며칠 동안 나를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경찰서에 전화를 해보았으나, 따로 신변을 보호해줄 순 없다는 이야기만 들었다. 얼마 후 결국 방을 옮겼다. 집 근처에서 일어난 일이었기에 또 그런 일이 생길까 두려웠다. 그때부터였나 보다, 혼자 걸을 때 특히 밤길을 걸을 때, 내 감각의 절반 이상은 내 뒤를 향해 있는 것, 사람이 없으면 괜찮은데 누군가 나타나면 너무나 불안하고 두렵다는 것, 도를 아시냐고 말을 건네는 사람들이 나를 쫓아오지 못할 정도로 걸음이 빨라진 것은.

친구들과 이야기 나누다 보면 크고 작은 비슷한 경험들이 각자의 버전으로 다양도 하다. 리베카 솔닛의 《세상에 없는 나의 기억》(창비, 2022)에 나오는 작가의 크고 작은 경험들 역시 남의 일 같지 않다. "존재하는 것은 너무 위험한 일이었기에, 존재하지 않는 법을 익혔다."(78쪽)라는 문장을 보며 더 작아지고 싶고, 가끔은 사라지고 싶고, 최대한 눈에 띄지 않으려 애쓰며 살아왔던 날을 생각하게 된다. 지금까지는 늘 봉봉이와 함께 산책하거나 누군가 동행이 있었다. 나 혼자 특히 아침이나 새벽, 늦은 밤에는 자유롭게 나갈 생각조차 못했던 것 같다. 그 오래된 두려움을 깨고 밖으로 나서는 일. 남들에겐 별 일 아니겠지만, 내겐 늘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그 잠깐의 뜀박질이 날 새롭게, 변함없이 기운 나게 해 준다는 사실이 기쁘다.


"내 벌거벗은 가슴을 누르는 하얀 백합들. 나는 내게 상처를 주는 당신 안의 것에게 하얀 백합을 건넨다. 우리는 부족한 존재들이니까. 건네주지 않으면, 어떤 것들은 시들기 때문이다.."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274쪽)

꽃들이 우리가 갈 곳으로 인도합니다. 우리는 안내자로서 꽃들이 필요합니다. 꽃들은 너무나 덧없습니다. 그 꽃들이 우리를 기원으로, 우리가 명백하게 하나의 일족이 되는 그곳으로 우리를 다시 인도합니다. (275쪽)


- 《글쓰기 사다리의 세 칸》 엘렌 식수, 신해경 역. 밤의책


어느 시인은 시를 쓰는 일은 "꽃 한 송이를 친구에게 내미는 마음"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덧없고 연약하고 쉽게 시들어버리는 꽃들. 그 꽃은 오늘 피고 내가 가까이 다가가 바라보아도, 보지 않아도 죽어버리는 것. 꽃은 용기이기도 하고 부끄러움과 절망이자 우리 안에서 피어나는 모든 자연스러운 것들 아닐까? 난 코멘트가 좋다. 당신의 두려움과 상처와 슬픔에 공감하는 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내자는 말, 그 가느다란 수염뿌리 같은 한 마디가 공중을 건너가 당신에게 닿는 순간 우리는 꽃이 되고 서로를 향한 마음과 연대로 이어지는 거 아닐까. 너도 나도 꽃이 되는 순간을 몇 번이고 맞으며 자신만의 뿌리를 단단히 내리고 있는 중은 아닐까.

번역을 한 신해경 님은 이 책이 그냥 글쓰기 책이 아니라 '위대한' 글쓰기 책(280쪽)이라고 했다. 위대한 글을 쓸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지만 별꽃이나 꽃마리처럼 걸음을 멈추고 들여다보고 싶은 들꽃 같은 글은 써보고 싶다. 작아도 밟히지 않고 눈여겨 봐주는 존재가 있는 한 글을 쓸 이유는 충분하단 생각이 든다. 어려운 책이었지만, '모든 것은 꽃과 함께 끝난다'(268쪽)고 하니 봄처럼 환해지는 기쁨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