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간에 눕다#10 <물질적 삶> 마르그리트 뒤라스
“글을 쓸 때 작용하는 본능 같은 것이 있다. 쓰게 될 것은 어둠 속에 이미 있다. 쓰기는 우리 바깥에, 시제들이 뒤섞인 상태로 있다. 쓰다와 썼다 사이, 썼다와 또 써야 한다 사이. 어떤 상태인지 알다와 모르다 사이, 완전한 의미에서 출발하기, 의미에 잠기기와 무의미까지 다가가기 사이.”
“당신 앞에 삶과 죽음 사이에 있는, 전적으로 당신에게 달린 검은 덩어리가 놓여 있다. (...) 그것이 나보다 앞서, 모든 것에 앞서 있었다.”
ㅡ [물질적 삶] 마르그리트 뒤라스, 윤진 옮김. 민음사 (2019) <검은 덩어리> 중 37~38쪽.
여행이나 이동 중에 선택한 책은 필연적으로 일기나 수첩이 된다. 적당히 가볍고 여백 많은 시집이나 작은 문고판 책은 움직일 때 읽고 싶어 아껴두게 된다. 선택된 책은 볼 때마다 출발을 기대하게 하는 여행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우리에게 여행할 때의 자아가 따로 있는 것일까. 지난 여행에서 이어지는 기억과 정서, 아련한 정취가 있다. 책을 펼치면 시간은, 아쉬움을 품은 채 빠져나오던 터미널이나 공항의 마지막 기억으로부터, 지금 출발하기 위해 막 들어선 공항으로까지의 공백을 훌쩍 뛰어넘는다. 멈춰있던 거대한 여행 시계는 초침 소리를 내며 다시 작동된다. 어느 여름, 체리가 맛있었던 작은 마을 산 중턱에서 특별한 시계를 본 적이 있다. 동네 어디에서나 모두에게 공평하게 잘 보이는 희고 거대한 벽시계였다. 결코 멈추지 않을 그 시계로부터 나의 여행 시간은 멈춤없이 흐르고 있다고 굳게 믿는다.
모든 여행은 일생에 단 한 번뿐인 긴 여행의 일부인지도 모른다. 다만 내가 있는 이곳이 ’완전한 의미에서의 출발‘과 도착 사이인지, 일상의 꿈과 무의식 사이인지, 쓰기와 읽기 사이 어디쯤인지는 알 수 없을 정도로 모호하다. 어디 멀리 떠나온 것 같지만 어제는 살짝 비행기 멀미까지 하며 김포공항에 내려 부모님 댁으로 왔다. 예외 없이 나를 여행자로 만들어주는 것은 역시 작은 한 권의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