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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자’와 ‘다정한 서술자’ 사이

행간에 눕다 #12 <다정한 서술자> 올가 토카르추크

by Soopsum숲섬


어린 시절 무엇과도 헤어지는 일이 두렵고 싫었다. 2주에 한 번씩 집에 오는 아버지와 헤어지는 게 싫어 다리에 매달려 울던 기억이 난다. 이사 다닐 때마다 필연적으로 헤어져야 하는 친구들, 장소들이 있었고 마음을 주었다가 잃게 되는 모든 것은 아프거나 슬펐다. 집에 왔을 때 아무도 없으면 엄마나 동생이 어쩌면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울었다. 책 속의 슬픈 이들은 나이가 없었다. 오직 슬픔만이 같이 슬펐다. 그땐 수도꼭지를 열고 깨끗한 물을 흘려보내는 일에도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을 느꼈다. 나는 이 물을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이다,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1986년 어느 날 뉴스에서 76년마다 한번 지구를 찾아온다는(실은 그저 지구 가까이 오는 것일 뿐인) 헬리 혜성의 영상을 보았다. 이제 금방 너란 별을 알게 되었는데 너는 내일 이후부터 나와 끝없이 멀어지게 된다니. 그 후로 지구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끝없이 우주를 달리는 별 하나를 생각했다. 지금도 밝은 하늘에서 선명하게 퍼지는 비행기구름을 보면 열두 살에 본 헬리 혜성 생각이 먼저 난다. 어디쯤을 달리고 있을까, 그때의 별은.


따져보니 어느새 삼사 년만 더 달리면 헬리혜성은 방향을 틀어 지구를 향해 달려오게 된다. 신기한 일이다. 커다란 돌 하나가 우주를 달리는 동안 나는 이유를 알지 못하는 슬픔과 두려움에서 제법 벗어났다. 맑은 물을 버리는 일엔 여전히 주저하지만 나를 떠난 물이 구름이 되고 다시 비가 내릴 것이란 사실에 익숙하다. 지금의 슬픔도 방향을 바꿔 다른 감정이나 사건으로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여질 거란 사실을 알고 있다. 생각해보니 언제나 이유를 알고 싶었던 것 같다. 왜 죽나 사람은. 왜 슬픈가. 왜 나는 또 당신은 이렇게 생겼나. 나와 다른 당신은 어떤 이유로 그리 슬픈가. 그 이유와 원인을 찾는 일, 과정을 돌아보는 일이 내 짧지 않은 삶의 이력인 것 같다.



“프로이트의 글쓰기 방식은 내가 즐겨 쓰던 방식과 확연히 달랐다. (...) 나는 프로이트가 예측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재빨리 깨달았다. (...) 이래도 되는 거야? 저렇게나 동떨어진 것들을 어떻게 하나로 엮을 수 있었지? 단어의 발자취를 파고들고, 반쯤 잊힌 신화 속으로 들어가고, 우리 정신에 나타나는 이미지를 들여다보는군? 이처럼 괴상하고 유별난 시각들을 허용해도 되는 걸까? 부질없고 중요하지 않은 것들에 이토록 깊은 의미를 부여하다니?

(...) 세상에는 숨겨진 것, 감춰진 것, 불분명한 것 등 훨씬 많은 것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것들은 시시각각 다른 관점으로 끝없이 해석될 수 있었다. (...) 내가 설득당한 건 그의 방법론이었다. ”


ㅡ <다정한 서술자> 올가 토카르추크, 최성은 옮김. 민음사 (2022) 131쪽




<소금에 담근 손가락, 즉 내 간략한 독서 이력에 관하여>에는 지금의 토카르추크를 만든 화려한 독서이력이 펼쳐지는데 내가 흥미를 가진 건 마지막 부분의 프로이트에 대한 단락이다. 심리학 전공인 그녀가 프로이트의 저서를 읽으며 자신은 프로이트를 ‘소설가’로 생각한다는 견해, 자신과 다른 글쓰기 방식에 놀라는 내용이 있어 자세히 읽었다. “프로이트를 읽은 뒤부터 내게는 당연한 것이 없어졌다.” (132쪽)라고 말한 것처럼 내게도 그런 충격을 준 책들이 몇 권 있는데 그중 강력했던 책이 바로 올가 토카르추크의 <방랑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시집 중에는 유계영의 <이런 얘기는 좀 어지러운가>가 있다. 난 완전히 다른 이 두 책을 완전히 같은 방식으로 읽었다)


<방랑자들>은 몹시 두꺼운 책이고 어려워 보이는 책이었다. (올가 토카르추크라는 이름 때문일까? 2018년 노벨상 수상 작가인 그녀의 책을 앞에 두고 어렵다고 느끼는 건 모두 비슷한 것 같다) 읽는 동안 연필을 내려놓지 않고 한 챕터마다 가장 중요한 한 두 문장을 골랐다. 못 고를 땐 여러 번 다시 읽었다. 그래도 안되면 서너 문장을 골라 썼다. 특히 조각난 단편으로 이루어진 <방랑자들>은 중첩되는 장면들이 많아서 이런 방식으로 읽기가 큰 도움이 되었다. 정리가 안되면 앞으로 돌아가 다시 읽었다. 이해가 되든 안되든 나름대로 해석해가며 읽었고 모르면 모르는 대로 읽었다. 중간마다 읽기를 멈추고 소제목 아래에 정리해둔 주요 문장들을 앞에서부터 읽어보았는데 놀랍게도 그 두꺼운 분량이 조금씩 소화되는 기분이 들었다. 덩달아 책의 구조를 파악할 수 있었다. 이야기의 구성과 장치, 조각글의 순서, 각 제목의 이유와 작가가 꼭 전하고 싶었던 말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그녀가 던지는 질문들이 내게 남는다는 사실이다. <다정한 서술자>에도 생생한 질문들이 남아있어 독자는 작가의 호기심과 탐구심 가득한 과정과 흔적을 놓치지 않고 따라갈 수 있다. 순전히 <방랑자들>이 두껍고 어려워 보였기 때문에 발견하게 된 수확 같다.


(앞에서 소개한 유계영의 시집도 같은 방식으로 읽었다. 아무리 읽어도 이해가 되지 않아 딱 한두 줄의 행을 골라 각 부의 시작 여백에 제목과 함께 순서대로 적었다. 한편 씩 시를 읽을 때마다 시집 제목과 나눠진 소제목과 각 작품의 제목을 살피며 읽었다. 신기하게도 한 줄씩 모아놓은 문장들이 새로운 시가 되었고 한 권의 시집이 한 편의 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모든 내용을 압축한 것이 제목이란 사실을 알게 되고 시인이 하려는 이야기가 그제야 선명하게 들린다. 각각의 시와 한 권의 시집은 독특한 하나의 구조와 흐름을 가진다. 누구도 살 수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아주 작은 집처럼. 특이한 구조만 가진 쓸모없는 아름다운 공간이 시인지도 모르겠다. 시를 읽을 때 그 구조, 구성을 놓치면 시인이 애써 준비한 아름다움의 절반 이상을 느낄 수 없는 것 같다. 그 공간을 알아차리고 그 안에 들어가 서성이는 경험이 꼭 필요하고 우리는 자신이 좋아하는 시인의 시집을 읽으며 너무나 태연하게 이미 그 경험을 수도 없이 해오고 있다)



“그것은 고요한 독서 혁명이었다. 그 무렵 읽은 작가들이 내게 진정한 독서의 기적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 준 것 같았다. 그들은 의식적인 언어 사용, 기호나 맥락, 은유의 유희를 통해 나로 하여금 나를 둘러싼 세계의 다층적이고 복잡하며 의미심장한 구조를 끈질기게 탐구하도록 만들었고, 모호하고 다의적인 이미지의 구불구불한 계단을 오르내릴 수 있는 길을 닦아 주었다.“(130쪽)


”나는 우리가 새로운 이야기, 새로운 개념, 새로운 단어들을 만들 권리를 스스로에게 부여하기 바란다.” (40쪽)



요즘 몹시 폴란드에 가보고 싶다. (그제는 뒤라스를 읽으며 프랑스 시골에 가고 싶다고 생각했으니까 습관적인 바람이다) <방랑자들>을 읽는 동안 코로나가 세계로 퍼져나갔고 다음 해부터 오른쪽 눈이 아팠다. 그래도 느리지만 열심히 책을 읽었다. 그래서일까. 언제나 새로운 곳으로 떠나기를 간절히 바라던 내 안의 ‘방랑자’는 지금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다정한 서술자’의 책을 읽는다. 특히 <다정한 서술자>의 표지에 있는 올가 토카르추크의 사진을 보며 이분은 도서관의 요정인가 생각해보기도 하고 40대 중반까지 고수했다는 아주 짧은 머리 스타일을 한 올가의 젊은 시절을 상상해보기도 한다. 그 짧은 머리로 프로이트를 읽고 소설을 쓰고 동물권을 외치고 강연을 하고 낯선 땅으로 여행을 했을 것이다.


특히 올해 사람들과 같이 읽은 모든 글쓰기 책과의 만남은 참으로 귀하다. 올가는 “우리가 길을 떠나면 의미와 개념, 편견 및 습관적 사고의 바다가 우리와 함께 출렁이게 된다.(48쪽)” 고 말했는데 나의 문우들은 책을 펼치며 오늘도 새롭게 출렁일 것이다. 이런 선물을 매일 받아도 될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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