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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가방과 리스본

행간에 눕다 #13 <페소아의 리스본> 페르난두 페소아

by Soopsum숲섬


친구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자주 쉬어 가며 해, 작은 심장에 무리가지 않게."

그전까지는 내가 작다는 실감을 하지 못했는데 나를 챙겨주는 그 한마디가 많은 것을 돌아보게 했다. 모든 게 큼직하고 에너지 넘치는 많은 사람들에 비해 쉽게 지치고 자주 주저앉게 되는 이유를 제대로 발견한 느낌이었다. 그렇지, 심장 마저 작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용량이 어쩌면 정해져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다.


한계를 정하지는 않되 몇 가지는 반드시 고려해야 했다. 이 컵과 접시가 지금의 나에게 꼭 맞는 용량인지. 이동할 때 가방이 너무 크거나 무겁지는 않은지. 사랑할 때, 일하고 운동할 때도 마찬가지인데 무엇에든 지나치게 몰두하고 나면, 생활을 할 에너지가 모자라거나 아예 없었다. 항상 플래너가 필요했다. 할 일에 앞서 덜 중요한 일들을 할 일 목록에서 지우고, 음식을 덜어내고, 무게를 덜어내고, 물건을 없애고, 마음의 부담을 덜어내는데 필요한 도구들을 사용해야 했다. 글쓰기는 그중 가장 도움이 되는 의식 같다. 제 아무리 크고 무거웠던 것이라도 쓰고 나면 미련 없이 가벼워진다. 모든 것을 측정하는 도구로 가장 훌륭한 것은 나의 몸이다. 내 한뼘 크기의 접시에 담은 음식의 양이 나에게 알맞다. 내 주먹만한 과일이면 충분하다. 아픈 눈이 감길 때가 자야만 하는 시간이다. 내 어깨가 감당할 수 있고 내 발이 갈 수 있는 곳까지가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의 범위이다.


작은 가방을 메고 여행을 다녀왔다. 칫솔, 스킨에센스, 텀블러, 안약들, 비타민과 상비약, 필통과 노트, 충전기, 손수건, 선글라스, 지갑. 나머지는 부모님 댁에 남기고 겹쳐 입고 칭칭 감았다. 가고 싶었던 여러 곳들 중 리스본 서점이 있었다(서점으로 찾아갔다가 휴무일과 겹쳐 벤치에 앉아있다가 돌아온 것이 지난봄이었다). 친구와 차를 마시는데 눈이 많이 온다고 엄마가 전화를 하셨다. 로비로 나가보니 기다렸던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이대로 집에 갈 수 없었다. 헤어지기 전 친구는 내게 많은 것을 주었다. 함께 가던 카페의 원두, 맛있는 베이글과 포카치아, 친구가 우리집에서 읽다가 가져간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과 지난여름 친구 집에 떨어뜨리고 왔던 《시는 내가 홀로 있는 방식》, 조말선 시집 《이해할 수 없는 점이 마음에 듭니다》. 가방에서 내가 꺼낸 건 커다란 쌀 뻥튀기 한 봉지였다. 농사지으신 쌀을 튀긴 거야, 했더니 오히려 귀한 거라며 좋아해 줘서 고마웠다.


홍대 입구 역에서 내렸다. 그 숙소에 꼭 하나 남아있던 저렴한 다락방은 작은 내가 허리를 굽혀야 할만큼 낮았다. 크고 동그란 창 곁에 매트리스가 깔려 있어 밤새 추울 것 같긴 했지만, 자리에 누워서도 눈 내리는 광경이 보였다. 숙소 현관에 우산이 놓여 있어 그때의 내 우산이네, 하며 썼다. 스무 살의 내가 처음 도착해서 가진 서울에 대해서, 사랑과 사람에 대해서, 삶에 대해서 가졌던 모든 환상이 이젠 괜찮아, 필요없어진 각질처럼 비듬처럼 떨어져 내리는 특별한 눈이었다. 서귀포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귀가 시리고 손이 아픈 감각 때문에 오돌오돌 떨면서도 마음이 무척 시원했다. 매번 이런 하늘 아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모든 것이 새롭고 부서지고 깨지고 넘치는!


네 시 반부터 일곱 시 반까지 리스본 서점에 머물렀다. 수많은 책들이 단정하게 꽂혀 자신의 이야기를 펼칠 시간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서점은 눈과 바람으로 한껏 흐려진 바닷가에 홀로 떠 있는 등대처럼 느껴졌다. 구석구석 세심하게 준비되고 꾸며진 서점을 보며 아직 만나지 못한 리스본 님을 느낄 수 있었다. 2층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내려와 서점으로 들어오는 리스본 님을 만났다. 그 말을 꼭 하고 싶어 전했다. 이곳이 있는 게 참으로 고맙다고. 어린애처럼 리스본 님의 책에 싸인도 받고 좋아했다. 그 짧은 만남에도 사랑에 대해, 책에 대해 지치지 않고 이야기하는 에너지 넘치는 모습이, 내겐 무척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늘 사랑이 많으신 분이지만, 새해엔 리스본 서점에 오직 사랑만이 가득하길! 더욱!!



"또다시 너를 보는구나

두려워하며 잃어버린 내 어린 시절의 도시

하지만 여기에서 살았고 여기에 돌아온 것은 나 자신인가?

여기에 계속해서 돌아오고 돌아왔던

여기에 또다시 돌아오고 또 돌아왔던 나 자신인가?"


- <돌아온 리스본> 중 알바루 드 캄푸스 (페소아의 異名)

- 리스본 서점에서 구입한《페소아의 리스본》 15쪽 재인용, 페르난두 페소아, 박소현 옮김. 안그라픽스 (2017)



다른 곳에 가기 위해 포르토와 리스본을 지나며 짧게 머문 적이 있다. 그땐 페소아를 몰랐다. 현지 사람을 만나지 못했고, 관광객처럼 시내만 봐서인지 못내 아쉬운 장소들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아프리카로 또 유럽으로 가기 위해 리스본을 지나쳤을 것이다. 다양한 인종들, 마음과 상황과 인식들이 모인 항구 도시와 그때의 사람들을 상징하는 곳이 내겐 리스본 서점의 서가처럼 느껴진다. 내가 묵은 다락방도 리스본 변두리의 어느 여인숙 같았다. 낯선 소음과 세차게 창을 흔드는 바람소리를 들으며, 미니 라디에이터를 켰다가 껐다가, 왼쪽 오른쪽 번갈아 누우며 잠을 청했다가 책을 읽다가 하며 밤을 보냈다. 창쪽은 서늘하고 라디에이터 쪽은 뜨거운, 오랜만에 느껴보는 여행자의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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