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간에 눕다 #14 : <단 하나의 눈송이> 사이토 마리코
그제 도서관에서 사이토 마리코의 시집 <단 하나의 눈송이>를 빌려왔다. 하얀 표지에 가득 쌓인 눈 위로 소리 없이 내리는 눈송이들이 가득한 이 시집을 한때 그토록 만나고 싶었다. 시집을 발견한 순간 아, 하고 감탄한 것이 분명 나 혼자 만은 아닐 것이다.
사이토 마리코의 시집은 <입국入國>이란 제목으로 1993년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가 절판되었다. 그 후 2018년 2월 13일 '봄날의책' 출판사를 통해 새 제목을 달고 재출간되었다. 나는 2010년 가을 즈음 사이토 마리코의 시를 처음 읽었다. 그녀의 시집을 꼭 읽고 싶었다. 최정례 시인의 글에서 보았을까. 시인 또한 그녀를 찾고 있었지만 수소문한 결과 그녀를 아는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는 글도 읽었다. 사이토 마리코는 1960년생 일본인이다. 역사학과 고고학을 공부하고 한일 학생 모임에서 한국어 공부를 하다가 1991년 한국으로 유학을 왔다. 이 시집은 그녀가 한국에 머무르는 1년 2개월 동안 서툰 외국어인 한국어로 쓴 시들을 엮은 것이다.
상처가 가장 맥박 치고
상처가 가장 살아 있다
상처가 가장 기다리고 있다
자기를 밟아주는 꿈이 오기를
이 나라에서 꽃은 속삭이지 않는다
이 나라에서 꽃은 외친다
그 외침 속에서
사람들의 모음母音은 한 덩어리 되고
자음子音은 산산이 흩어져 갔다
모음 덩어리는 한번 증발해
싸락눈이 되어 다시 내려온다 마치
고생 많아 버림받은 엄마의 비탄처럼
이 나라에서 꽃은 속삭이지 않고
딸들은 언제나 싸락눈을 맞으며
출발했다 언제나 멀리
흘음吃音의 벼락 맞아 떨리면서
- <입국> 사이토 마리코, 민음사 (1993)
그해 가을 <입국>을 읽고 싶어 찾아다녔다. 도서관, 헌책방, 중고도서 등을 오랫동안 알아보고 검색했다. 우연히 국립중앙도서관에 시집이 있음을 알고 다음날 찾아갔다. 1월 중순이었고, 밤새 폭설이 내려 길은 얼어붙었다. 처음 가는 동네였던 데다 풍경은 낯설고 몹시 추웠다. 아침 일찍 도착해 책을 신청하고 전광판에 번호가 뜨길 기다렸다가 시집을 받았다. 1993년 막 나온 모습 그대로, 아무도 읽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는 세월의 흔적이 비껴간 새 시집이었다. 다섯 시간 이상을 들여 가져 간 작은 학생 노트에 검은 볼펜으로 시들을 옮겨 적었다. '저작권법 제31조 및 복제 업무 규정에 의거 자료의 일부분만 복사 출력이 가능하다'는 도서관 이용 규칙도 있었지만, 그게 아니었더라도 기쁜 마음으로 손수 베껴썼을 것이다. 시간이 모자라 시집 뒷부분 해설은 복사했다. 지금 노트를 살펴보니 첫 장부터 끝장까지 나답지 않게 글씨가 가지런하다. 난 그런 사람이 아닌데 말이다. 사랑에 빠지면 누구나 그렇듯 미친 상태가 된다.
2년전 갑자기 망막이 떨어져 수술을 받기 위해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을 때, 12층 입원실에서 국립중앙도서관이 환히 보였다. 그때의 겨울이 떠올랐다. 마을버스에서 내려 목도리를 칭칭 감고 바쁘게 도서관 현관을 지나 회전문을 통과하고 시집을 신청하고 마치 사랑하는 이를 면회 간 것처럼 초조하게 나타나기만을 기다리던 생각이 났다. 그날 밤엔 내가 언제 다시 책을 읽을 수 있을까 의심하기도 했는데, 지금 이 시집을 만나고 보니 무척 기쁘다. 거의 10년 전에는 상상할 수 없어 보이지 않던 시인의 젊은 모습도, 시집을 내고 난 후의 그녀의 삶도 이제는 떠올릴 수가 있다(새로 출간된 시집의 뒤표지엔 시인의 사진이 있다). 천천히 옛 버전과 비교해보며 그녀가 고친 구절들도 살펴보고, 뒷부분에 추가된 시들도 옮겨 적어야겠다. 마지막에 옮길 시는 지금은 여러 문학작품에 인용되어 제법 알려진 '눈보라'다. 처음 '시'의 세계를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된 많은 원인들 중 이 시가 있다. 어느 계절에든 읽으면 천천히 눈송이가 내리기 시작한다. 나 역시 "아직도 같은 눈보라 속을 다니고 있다."
1
눈보라 속 저쪽에서 사람이 걸어온다. 저 사람 역시 지금 '눈보라 속 저쪽에서 사람이 걸어온다.' 하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무릎보다 높이 쌓인 눈. 사람이 가까스로 빠져나갈 만한 좁다란 길 양쪽에서 나와 그 사람은 서로 마주 보며 걸어가는 거다. 사람들은 언제 맞스치기 시작하는 것일까? 그것은 이미 시작됐는가? 하여튼 둘은 서로 다가간다. 지상에 단 둘이만 남겨져버린 것처럼 마침내 마주친 그 순간, 한 사람이 빠져나가는 동안 또 한 사람은 한편으로 몸을 비키며 멈추어 서서 길을 양보한다. 그때 둘이는 인사를 주고 받는다. 그것이 내 고향 설국의 오래된 습관이다.
"눈보라 속 저 멀리서 사람이 걸어온다." 그것을 인정했을 때부터 이미 맞스치기는 시작된 것이다. 누가 먼저 길을 양보하느냐는 그때가 와야 알 수가 있다.
나는 한때 그런 식으로 눈보라 속 멀리서 걸어오는 조선의 모습을 만났다.
아직도 같은 눈보라 속을 다니고 있다.
2
수업이 심심하게 느껴지는 겨울날 오후에는 옆자리 애랑 내기하며 놀았다. 그것은 이런 식으로 하는 내기이다. 먼저 창문 밖에서 풀풀 나는 눈송이 속에서 각자가 눈송이를 하나씩 뽑는다. 건너편 교실 저 창문 언저리에서 운명적으로 뽑힌 그 눈송이 하나만을 눈으로 줄곧 따라간다. 먼저 눈송이가 땅에 착지해버린 쪽이 지는 것이다. "정했어." 내가 낮은 소리로 말하자 "나도" 하고 그 애도 말한다. 그 애가 뽑은 눈송이가 어느 것인지 나는 도대체 모르지만 하여튼 제 것을 따라간다. 잠시 후 어느 쪽인가 말한다. "떨어졌어." "내가 이겼네." 또 하나가 말한다. 거짓말해도 절대로 들킬 수 없는데 서로 속일 생각 하나 없이 선생님 야단 맞을 때까지 열중했다. 놓치지 않도록. 딴 눈송이들과 헷갈리지 않도록 온 신경을 다 집중시키고 따라가야 한다.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
나는 한때 그런 식으로 사람을 만났다. 아직도 눈보라 속 여전히 그 눈송이는 지상에 안 닿아 있다.
- <단 하나의 눈송이> 사이토 마리코, 봄날의책 세계시인선2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