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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살인가 열 살이던 크리스마스 이브에 동생과 나는 산타의 선물 박스를 만들었다. 빈 내복 박스에 넣은 것은 문구점에서 산, 잘 구부러지는 철사에 반짝이를 붙여 만든 초록, 빨강 크리스마스 장식 두 개, 새 모나미 153 검정 볼펜 두 개, 우리가 그린 내용은 없는 그림카드 한 장이었다. 이전에 살던 마을에서는 교회를 제외하면 크리스마스의 흔적을 전혀 볼 수 없었지만, 그해 이사한 강릉의 학교 앞 문구점에서 다양한 크리스마스 증거품들을 발견하자, TV에만 존재하는 크리스마스가 우리 집에도 찾아와 주길 기대했던 것 같다. 우리는 부모님 방 앞에 조용히 내복 박스를 내려놓고 선물을 발견하면 아빠 엄마는 우리 집에도 처음으로 산타가 왔다 갔으니 깜짝 놀랄 거라고 상상하며 잠들었다. 아침에 보니 방문이 활짝 열린 채 박스는 벽과 문 틈에 세로로 끼어있었다. 아무도 모르게 박스를 집어 들고 나는 방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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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2022년 송년음악회에 갔다. 오후부터 차분한 눈이 계속 내려 N과 함께 버스를 탔다. 바르셀로나에서 돌아오던 때 새벽 세 시 버스 타고 공항 가던 생각이 난다. 그날 비 왔었지, 정말 아쉽고 서운했는데. 전날 바르셀로나 음악당에서 기타 공연을 보고 싶었지만 고민만 하다가 가지 않았다. 그때가 아니면 결코 만날 수 없는 것들. 그러나 오늘 새로운 눈이 내리고 제주에선 처음으로 음악회를 보러 갔다. 서귀포 합창단의 목소리도 제주도립 서귀포 관악단의 연주도 생기있고 훌륭했다. 점잖아 보이지만 디즈니 캐릭터처럼 은근히 춤추며 지휘하던 이동호 지휘자를 보고 N은 내일부터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놓고 지휘 연습을 해봐야겠단다.
그 두 공연 사이에 생각지도 못한 특별한 공연이 있었는데 제주 발달 장애인들의 오케스트라 "하음"이었다. 초등학생부터 성인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악기를 들고 나와 제자리에 앉았다. 옆을 둘러 보고 잠시 다리를 흔들고, 그러다가 지휘가 시작되자 모두가 몰입하며 음악을 만들어 내는 장면. 그건 평소 듣던 음악과 다르게 어딘지 모르게 답답하기도 하고 투박하기도 한 소리였다. 많은 부분이 생략되고 틀리기도 하고 어긋나는 모든 것이 제대로 느껴지는, 세상 어디서도 들어본 적 없는 놀라운 음악이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지휘자의 뒷모습은 세계 어느 지휘자 못지않게 진지하고도 반듯했다. 그 모습을 보는데 왜 그리 눈물이 났을까. 다음 곡을 준비하며 악보를 찾는데 시간이 소요되기도 한다고 성민우 지휘자는 양해를 구했다. 자꾸만 흩어지려는 열망을 가진 저이들의 몸과 마음을 사로잡아 하나의 음악으로 만들어내기 위한 노력과 시간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들은 모차르트의 <세레나데 13번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무지크'>(K.525) 1악장을 연주하고 이어 <아름다운 세상>을 연주했다. 나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니었나 보다. 박수소리는 뜨겁고 사람들은 환호했다. 나중에 준비된 공연이 끝나고 그들은 빨간 산타모자를 쓰고 다시 등장해 서귀포 관악단원들 사이 사이로 걸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바깥엔 눈이 내리고 그렇게 모두가 함께 캐럴을 노래하고 함께 듣는 페스티벌, 오랜만에 보는 아름다운 세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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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많이 쌓인 환승 버스정류장 앞에 호두과자를 팔고 있었다. 내게서 천 원을 가져간 N은 잠시 후 호두과자를 사 들고 와 말했다. 호두과자가 3천 원이래서 2천 원 밖에 없으니 그만큼만 주면 안 되겠냐 물어보니 안된대. 뒤에 줄 서 있던 청년이 나한테 갑자기 천원을 주는 거야. 아냐, 나 5만 원짜리 내면 되거든, 그랬더니 아니에요. 저 천 원짜리 많아요, 이거 쓰세요. 하더란다. 그 친구에게 호두과자 덜어주고 왔어, 하며 N은 반밖에 안 든 호두과자 봉지를 웃으며 흔든다. 결국 오지 않는 버스를 포기하고 택시를 타고 돌아왔다. 호두과자는 봉봉이를 봐준 친구에게 주었다. "따뜻하다" 하며 맛있게 잘도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