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간에 눕다 #14 : <에어리얼>과 <실비아 플라스의 드로잉집>
"길들인다는 게 뭐지?" 어린 왕자가 말했다.
"그건 너무 잘 잊혀지고 있는 거지. 그건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야." 여우가 말했다.
"관계를 맺는다고?"
"그래." 여우가 말했다. "넌 아직은 나에겐 수많은 다른 소년들과 다를 바 없는 한 소년에 지나지 않아. 그래서 난 너를 필요로 하지 않고. 너 역시 마찬가지 일거야. 난 너에겐 수많은 다른 여우와 똑같은 한 마리 여우에 지나지 않아. 하지만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나는 너에겐 이 세상에 오직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될 거야."
ㅡ《어린 왕자》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1943년작)
실비아 플라스의 시집《에얼리얼》과 조금 친해진 것 같다. 지난번 도서관에서 《실비아 플라스 드로잉집》(오현아 옮김, 마음산책 2014)을 빌려와 읽었다. 이번에도 그녀의 딸 프리다 휴스의 서문으로 시작하는 책이다(그녀의 남동생마저 2009년 세상을 떠났다) 실비아 플라스는 1956년 6월 시인 테드 휴스와 결혼하고 파리와 스페인 시골인 베니돔으로 신혼여행을 다녀왔다. 이 책은 여행하며 기록으로 남긴 여러 장의 드로잉과 여름과 가을에 실비아가 남편과 엄마에게 쓴 편지로 구성되어 있다.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마음이 참 편안해져.
기도를 해도 산책을 해도 얻을 수 없는 평온이야.
선線에 몰두하다 보면 모든 걸 잊게 돼."
ㅡ 《실비아 플라스 드로잉집》 21쪽
그림과 편지 속에는 이제 막 결혼한 신부, 서로에 대한 사랑과 예술에 대한 열정이 가득한 스물네 살 실비아 플라스의 치열한 사랑과 고백이 가득하다. 이 그림들을 보지 않았더라면 그녀를 오해할 뻔했다. "그제야 깨어나서 마을을 처음 본 것처럼", "모래 한 알에 깃든 '영원'이 내 눈에는 보여."라며 고백하는 실비아 플라스. 배신으로 고통받고 절망했으며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한 불행한 시인이 아니라, 사랑과 아름다움에 투신하고 그것으로 자신의 삶을 세우려 했던 열정적인 예술가로 그녀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이 느끼는 큰 기쁨, 환희와 전율의 폭만큼 고통, 슬픔, 좌절과 분노는 깊을 수밖에 없는 것 같다. 한 사람의 생을 들여다보는 일이 되어야 한다. 책을 읽는다는 건. 한 사람과 주변인들이 처하고 선택하고 애쓴 흔적을 만나면서 지금 나의 삶과 우리의 삶을 돌아보는 일이 되어야 하는 것 같다. 그제 리스본 서점 2층에서 나눴던 말들 중, 책을 꼭 읽어야만 할까, 책을 읽어야만 알 수 있을까,란 문장에 난 격하게 동의한다. 겉으로 보아선 알 수 없다. 인간의 내면을 (그나마, 단편적으로라도) 알 수 있는 방법은 글을 읽는 것뿐인 것 같다. 문장과 문장 사이에도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간극을 느낄 때가 많기에, 짐작하고 짚어보고 공감하며 나아가는 그 시간이 우리를 성장시킨다.
픽션의 세계에 대해 이전에는 그리 심각하게 생각해보지 않았았는데 《다정한 서술자》를 읽으며 생각이 바뀌었다. 불완전하고 모자란 경험을 가지고도 사람은 참으로 아름다운 신전 같은 세계를 완벽에 가깝게 만들어낸다. 시간을 들여 그 세계를 조금이라도 경험할 수 있다면 기쁠 것이다. 다만 어려운 책들은 손 닿는데 두고 자꾸 들쳐보고 읽어보며 친해지려 노력해야 할 것이다. 친해지려면 오래 걸린다. 그의 표현 방식, 문체에 익숙해지면, 또 그 사이에 그가 어떤 환경에서 자라고 어떤 사건을 겪어왔는지 알게 되면 우린 그를 예외 없이 사랑하게 된다. 관계를 맺고 서로를 길들이는 일과 같다. 시간이 오래 걸린 만큼 그의 세계를 깊이 이해할 가능성은 높아지고 그만큼 우리는 우리 자신과 세계를 깊이 들여다볼 힘을 갖게 된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인 듯 보인다.
자유롭게 되는 것, 어둠이 뭘 하겠어
먹어치울 열병이 없다면?
빛이 뭘 하겠어
찌를 눈이 없다면? 그가 뭘
하겠어, 하겠어, 하겠어, 내가 없다면."
ㅡ 시 <간수> 마지막 연《에어리얼 복원본》 실비아 플라스, 진은영 옮김, 엘리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