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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숲섬 정은영 Jan 02. 2023

물들이기2

  1


  두어 시간 특강으로 '꽃누르미(압화)'를 배운 적이 있다. 꽃잎의 색과 모양이 그대로 스며드는 특수재질의 엽서 위에 꽃과 종이를 놓고 압력을 가해 누르면 꽃잎의 색상과 자태가 엽서에 그대로 남게 되는 신기한 활동이다. 어려서 흔히 하던 책 사이에 낙엽이나 꽃 넣어 말리기와도 비슷하다. 곧 사라질 순간을 오래 간직하고 싶은 적극적인 마음의 표현인 글쓰기와도 닮았다.

  한번 더 손톱을 자르면 가을부터 함께 했던 열 손가락 봉숭아 물이 사라진다. 덕분에 봉숭아 물들인 손을 참 오랜만에 본다며 시작된 어느 까페지기 님과의 대화도, 요 보세요! 하며 손 내밀어 자랑하기도 하던 수다의 시간도, 펑펑 눈 오는 서울에 남아 실컷 눈구경하며 리스본 서점에 들렀던 날도 좋았다. 손톱에 남은 꽃잎의 흔적이 보는 사람들까지 물들이고 설레게 한다. 이런 에너지 때문에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하는 건가. 설레는 마음이 먼저 동반되는 게 사랑이라면 새해에는 자주 가슴 두근거려야겠다. 다가오는 여름마다 물들이고 물들여야겠다.



  2


  육지에 간 지인의 집에 들러 고양이 밥을 주었다. 녀석이 보이지 않아 창밖으로 "고등어야!" 하고 부르니 에엥, 하며 나타나 다리에 얼굴을 비빈다. 이제 10살인 고등어는 구내염을 앓고 있어 침을 많이 흘린다. 딱딱한 사료를 잘못 씹으면 잇몸이 아파 앞발로 허공을 때리며 몇 번이고 진저리 친다. 그러다가 진정이 되면 다시 그릇으로 다가가 밥을 먹는다. 그 애 아픈 게 꼭 내 탓인 것만 같아 미안해지고 같이 얼굴이 찌푸려지고 그렇게 아파하면서도 거듭 먹으려고 시도하는 모습이 기특하기만 하다. 눈 맞추고 말 걸고 털도 빗겨주고 무엇보다 아주 많이 만져주고 왔다. 돌아오는데 밀림의 사자나 표범 같은 고양잇과 동물들 전체 중 저렇게 이가 아픈 동물들도 많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돈이 없어 아픈데도 참기만 하는 사람도 많다. 국가가 존재한다면 세금을 거둬서 해야 할 일은 정쟁과 전쟁이 아니라, 누구도 굶지 않고 안전한 집에 머물며, 누구라도 아프면 치료받을 수 있는 진정한 복지국가의 모습이어야 할 것이다. 재작년 고등어가 잇몸병에 걸린 것을 알고부터 봉봉이와 고양이들에게 자기 전 한번 양치질을 시키고 있다. 사는 동안 더는 아프지 말았으면, 괴롭지 않았으면, 몸을 가진 존재니 어쩔 수 없는 일인 줄 알면서도 몹시 마음이 아프다.



  3


  여섯 줄 일기를 쓰고 싶었는데, 처음 두 번은 성공하기도 했는데, 역시 난 말이 많다. 한 편의 글이 되기에 여섯 줄은 대부분 모자란다. 그래도 쓸데없는 접속사, 형용사, 부사들을 빼는데 도움이 된다. 여러 문장을 하나로 합치고, 필요 없는 부분을 삭제하고 이게 진짜 필요한 말인지 고민하게 된다. 예전엔 형식이란 게 영 쓸데없고 깨버리고 싶은 장애물 같더니, 이제 형식이 주는 아름다움이 뭔지 조금씩 알게 되는 것 같다. 되든 안되든 계속 시도해 보련다, 여섯 줄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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