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같은 글쓰기> 아니 에르노
《단순한 열정》은 20년 전 책방에서 순전히 제목이 좋고 가벼워서 빌렸던 책이다. 일기를 그대로 출판한 것처럼 보이는 한 개인의 민망한 연애사로만 읽었던 것 같은데, 이제 그 책을 제대로 다시 읽어보고 싶다. 《칼 같은 글쓰기》 의 시작에서 아니 에르노는 "나는 진실과 정확성을 잃지 않으려는 자세로 임할 겁니다"(19쪽)라고 말한다. 이제야 칼을 들고 '가장 정확한 단어와 문장'과 '형식'을 찾아내기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글을 써왔을지 조금 엿보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이 쓰는 두 가지 유형의 글쓰기 중 내면일기와 비교해 "미리 계획하고 쓰는 텍스트(작업장)"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63쪽. 그와 반대로 작업장은, 아무리 두세 페이지에 걸친 짧은 글쓰기를 위한 것일지라도, 어떤 총체성에 대한 숙고 끝에 세워진 계획입니다. 이것은 내가 시도, 계획, 연구라는 용어로 생각하는 것이지, 결코 장르가 아닙니다. 이 작업장은 여러 갈래의 '추적해야 할 흔적' 혹은 탐험 방향을 갖고 있어요. (…) 이 문서철은 이미 작성되었지만 그 후 몇 달이 지나서야 하나의 독립된 텍스트로 완결하기로 결정될 조각들이 담겨 있었답니다. (…) 마치 자기장 안에 있는 것처럼 산만하고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던 모든 것이, 어느 한순간에 배치되면서 하나의 그림으로 그려지는 거예요.
문득 내가 지금껏 써온 대부분의 글들은 1인칭의 진술을 벗어나지 못하고 나의 심경을 표현하는 데 머물렀으며 결코 형식에 대한 고민이나 개인을 뛰어넘는 보편성에 대한 탐구가 전혀 없었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되었다. '순전히 거기-있음 이라는 현상에 대해 진술한다'는 느낌, '사적인' 경험, '미완'과 '수동성' 그저 '향유'(31쪽의 '내면일기' 내용)하는 데서 그친 개인적인 일기에 불과하다는 생각에 닿게 되었다. 아는 것만큼만 이해할 수 있었기에, 처음 읽은 <단순한 열정>이 개인적인 기록물로만 읽혔던 것도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58쪽. 브레히트의 문장에서처럼 "그는 타인들 속에서 생각하고, 타인들은 그 속에서 생각하곤 했다." 글쓰기의 최종 목적, 내가 열망하는 이상적인 글쓰기는 타인들, 작가들이 내 안에서 생각하고 느꼈듯, 내가 타인들 속에서 생각하고 느끼는 것입니다.
아니 에르노의 읽어본 작품들 중 <사건>이 가장 좋았다.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긴장을 놓지 않게 하고 날카롭고 사실적인 세계를 펼쳐 보였기 때문이다. 지금 임신한 스무살의 내가 되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게 되었고, 최선의 방법을 찾는 '나'가 되어 함께 그 시간을 겪은 것 같았다. 그 책 안에서 '생각하고 느끼는' 경험이 특별했고, 이런 느낌으로 읽은 책이 '온전히 내가 읽은 책'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니 에르노는 <사건>의 결말에서 "나는 내 삶 전체가 사람들의 삶과 생각 속에 완전히 용해되어 모두에게 이해 가능한 보편적인 무엇이 되었으면 좋겠다"(57쪽)고 말했는데 그녀의 의도는 읽는 나에게 충분히 전해진 것 같다. 나머지 책들의 어렵고 지루한 부분은 그저 글로 읽어지거나 읽어지지 않아 빠르게 넘기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세부 항목들마저 저자가 고심해서 쓴 꼭 필요한 장면이었으리란 사실을 읽는 동안 잊지 않으려 한다.
53쪽. "기억은 물질적인 구체성을 띤다"
55쪽. 추억에는 언제나 '경련을 일으키는' 세부 사항이 있습니다.
54쪽. 나는 '보고' '듣지' 않고는 글을 쓸 수 없어요. 내게 그것은 '다시 보기'이며 '다시 듣기'를 의미합니다. 그것을 '실제로 보고 있다고 착각할' 정도로 끊임없이 되새겨야만 해요. (…) 아무것도 없는 빈털터리의, 벌거벗은 상태의 감각이 도달하는 그 순간이 필요한 것이죠. 오직 그 순간을 맞은 후에야 단어들을 찾아야 할 필요를 느낍니다(서사나 세부적인 장면 묘사를 통해 장면, 세부 사항, 문장이 내게 환기시키는 감각을 '만들어내려고' 애씁니다). 감각이 글쓰기의 기준이며, 진실의 여부를 결정하는 기준입니다.
다른 작가들의 글보다 아니 에르노의 글에 독자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이유는 누구나 비슷하게 가지고 있는 소재들 - 어린 시절, 죄책감, 열등감, 부끄러움, 부모님과의 관계, 사랑, 고독, 정치적 사회적 계급의 문제와 갈등 등을 1인칭 화자를 써서 쉽게 풀어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빈 옷장>을 읽으며 어린 시절의 많은 기억이 떠오르며 무척 답답한 감정이 올라왔다. 어린 화자가 느끼는 사회적인 계급과 틀, 죄책감과 고립감이 생생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녀는 확실히 그녀의 경험을 보편적인 경험으로 만들어 읽는 이를 강렬하게 체험하게 하는 것 같다. 그녀는 '나'라는 이야기의 소재를 '나'라는 내시경(렌즈)을 통해 샅샅이 들여다보고, 결국 <세월>에서는 그동안 접사에 사용했던 나의 렌즈를 프랑스와 20세기라는 넓은 시공간으로 들이대 그 안에서 보이는 한 사람(여자)과 모두의 삶을 성공적으로 서술해낸다. 누구나 '나'의 경험을 갖고 있으며, '나'라는 존재를 통해서만 경험하고 그 이야기를 쓸 수 있기 때문에 누구나 쉽게 읽는 즉시 아니 에르노의 '나'가 될 수도 있는 것 같다.
올가 토카르추크는 과거에 작성된 텍스트나 소설을 쓸 때의 세부 사항에 대한 중요성에 대해 말하며 이야기에 잔뜩 뚫린 수많은 구멍과 파편을 발견해서 수정하고 채우는 과정을 '추정'(<다정한 서술자>(249~251))이라고 했다. 이토록 물 흐르듯 끊이지 않는 이야기의 흐름과 공간을 만들어내기 위해 1인칭 서술자를 가진 아니 에르노와 4인칭 서술자를 발명해 낸 올가 토카르추크의 노력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나의 글에 뭐가 부족한지를 절로 생각하게 된다. 좀 더 오래 응시하고 정확하게 보려 하고 적극적으로 질문하고 상상해 내는 일. 우리에게도 이야기와 추억과 이미지, 노래, 냄새와 사진들과 모국어가 있다. 그러나 내 안에서 "돌처럼 그것들이 느껴"지거나, "강바닥에 있는 돌을 꺼내는 일 (<진정한 장소>(89쪽))"처럼 생생하게 감각한 적은 없었다. "돌처럼 내 안의 그것들을 꺼내 새롭게 감각하고 경험하는" 글쓰기까진 어려울지라도, 그런 과정을 통해 세상의 모든 글이 쓰였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면, 작가들의 글을 읽으며 그들이 되어보고, 감각하고, 그들의 문장들을 실제로 체험한 듯 경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내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그것들을 우선 내 눈앞에 두는 것."(55쪽)이라는 아니 에르노의 말처럼 내 곁의 혹은 내 안의 무엇인가를 오래 들여다보는 일이 모든 이야기의 시작이 될 것이다.
99쪽. 사물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거기 이르렀는지 이야기하지 않고는 그것들에 대해 말하는 게 내게는 불가능해요. 모든 것ㅡ존재들, 나, 내 생각ㅡ이 내게는 역사처럼 느껴지고, 실제로 그렇습니다. 삶의 사건들을 통과하면서, 글쓰기에 관한 나의 관념 혹은 직관을 전복시켜 버린, 문학과 현실 사이의 일종의 정면 대질이라고 할 과정을 겪었습니다.
103, 104쪽. 이야기된 것과 자전적 '나'가 지니는 집단적 가치라는 표현에는 보편적인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나'의 집단적 가치, 텍스트가 제시하는 세계의 집단적 가치는 우리 각자의 의식이 삶 속에서 갖는 개별성의 한계나 경험의 유일성을 초월합니다. 이것은 독자에게 텍스트를 자기 것으로 만들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거나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의미합니다. 이것의 많은 부분은 독서함으로써 얻는 감동을 통해 이루어지지요. 다른 것들보다 더 정치적 성격을 띤 감동이 존재한다고 말하고 싶군요.
올가 토카르추크는 "인간이 자신의 고유한 언어를 잃고 집단의 언어가 사적인 언어를 모조리 집어삼키는 것보다 더 무서운 질병은 없다. 유일한 치료법은 문학이다" 라고 했다(<다정한 서술자> 105쪽).
'한 사람'이 답이다. 마음만 먹으면 우리는 특별한 '한 사람'을 언제든지 얼마든지 만날 수 있다. 한 사람의 이야기와 한 사람의 경험과 소통하고 교류하면서 우리는 세계와 나를 좀 더 깊이 이해해야 한다. 그 '한 사람'을 '기억하려는 시도'(글을 읽고 쓰기)(<진정한 장소>65쪽)를 계속해야 한다. 아니 에르노는 자기 자신을 제단 위에 바치는 의식을 치르듯 치열하게 글쓰기 하며, 오직 언어를 통해 '치유'하고 그 과정을 타인에게 전달하고자 한다.(79쪽) 그녀를 통해 그녀처럼 "사물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거기 이르렀는지 이야기"하길 즐기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과, 그 과정 자체를 '역사처럼 느끼"는 방식을 배우게 된다. 내가 막연히 생각하던 관념을 그녀는 이미 대부분 뒤집고 있다.
처음에는 '칼 같은 글쓰기'의 '칼'이 수술실의 정확하고 무자비한 칼, 필요 없는 부분을 아프게 도려내는 용도로써의 칼처럼 생각되었는데, 어쩌면 사지가 결박된 포로인 자기 자신을 향해, 아슬아슬하고 위험하지만 정확히 던져 묶인 밧줄을 풀고 해방시키는 의미의 칼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순간을 지켜보며 함께 숨죽이던 독자들도 함께 구원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아니 에르노는 독자로부터 끝내 사랑받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