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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숲섬 정은영 Jan 18. 2023

열린 괄호 안의 날들


  어려서 보던 사람의 몸은 드러낸 얼굴과 손과 팔, 다리뿐이었다. 나머지 부위는 언제나 옷 속에 가려져 있고, 옷을 입지 않은 몸은 백과사전 속 인체의 근육이나 기관을 소개하는 그림으로만 볼 수 있었다. 씻을 때 발견하는 엉덩이 같은 건 어쩐지 싫었다. 커서는 맨몸은 사랑을 나눌 때나 사용되는 것쯤으로 생각했다. 늘 먹어야 하고 씻어야 하고 누군가에 성적인 욕망을 일으키는 몸이 싫었고 정신이 훨씬 우월하리라는 편견을 가졌다. 나 자신의 몸에 대해서도 결코 좋아한 적이 없었지만, 두 손만큼은 좋아했다. 손이 하는 많은 일들 중에 글씨를 쓰고 손을 씻는 일을 할 땐 경건한 기분이 들어서였다. 잠시였지만 타이피스트가 되고 싶었던 적이 있다.


  30여 년 간 매일 사우나를 다니셨다는 몇몇 할머니들이 요즘 가장 자주 마주치고 인사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천천히 걸어와 옷을 벗는다. 의사한테 계속 일하면 죽는다는 진단을 받은 분, 발과 무릎이 좋지 않아 걷기가 힘든 분, 등 한복판에 목부터 허리 끝까지 거대한 수술자국을 가진 분, 유방암 수술을 하신 분, 무릎 수술하신 분들의 험한 골짜기 같은 몸이 드러난다. 몸은 신비롭다. 나이 든 여자들의 굴곡지고 잘리고 망가진 몸은 표정이 말해주지 않는 사연과 비밀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 같다. 사느라, 일하느라, 자식을 탄생시키고 키우느라 돌보지 못했을 그들의 몸은 사우나에 와서만큼은 가장 중요한 목적이자 존재의 이유가 된다. 타인을 위해 움직였던 몸을 뜨거운 물에 담그고, 쉬게 하고, 정화시키고, 물 마사지 하며 뭉친 근육을 풀고 제대로 움직일 수 있게 단련시키는 데에 각자가 전력을 다한다. 전사들과도 같은 그 모습을 바라보는 일은 수많은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스 신화 속의 신들의 모습은 저 존재들로부터 탄생했다는 사실, 그리고 수많은 시대와 나라의 작은 목욕탕에서 어제의 영광과 과오를 씻고, 내일을 준비하기 위해, 혹은 오롯이 지금에 몰두하며 몸을 씻었을 사람이란 존재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갖고 생각하게 된다. 나 역시 방치하다시피 했던 나의 몸을 이곳에서 매번 새롭게 발견한다. 일주일에 한 번 혹은 두 번일 뿐이지만, 사우나라는 장소가 언젠가부터 나만의 신전이 된 것처럼 느낀다.


  머리를 말리며 양쪽 귀밑머리의 뿌리 쪽이 흰색으로 변해 반짝이는 모습을 본다. 머릿속을 들추면 희끗희끗 제법 흰머리가 많다. 검은 머리는 더 이상 신기하지 않다. 정말 신비로운 것은 이제까지 검었던 머리가 하얀 머리가 되는 것이고, 피부가 거칠어지고 굵고 가는 주름이 생기는 것이다. 엄마 뱃속에서 아홉 달을 머물 때 태아 홀로 존재하던 어둡고 작은 세상에서 태어나기 위해 태어나길 기다리며 천천히 모든 것이 만들어졌을 때, 아이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오직 기대와 기다림 만을 가졌을 것이다. 태어나는 일은 서서히 낡아지고 주름지고 작아지며 죽음과 하루 씩 가까워지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 많은 노인들의 죽어가는 과정은 요양원으로 옮겨져 감춰지고 존재하지 않는 듯이 가려진다. 태어나 모두를 기쁘게 했던 탄생의 순간과 마지막 숨을 들이쉬거나 내쉬고는 더 이상 숨 쉬지 않게 될 어느 날 사이에 감사하게도 새로 주어진 오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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