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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숲섬 정은영 Jan 25. 2023

눈의 기억


  종일 펑펑 눈이 쏟아졌다. 공항에는 400편가량의 항공기 전체가 결항되어 3만여 명의 발이 묶여 있다는데, 눈을 보면 나는 철없이 좋기만 하다. 문득 학습지 교사를 하던 겨울 생각이 난다.  없는 신입교사에게 처음으로 주어졌다던 동네 거대한 성북동은  도로를 사이에 두고 동쪽은 넓고 가파른 오르막, 서쪽은 무난한 평지였다. 서쪽에 위치한 어느 남매의 집은 처음 가서 출구를 찾아 나오지 못할 정도로 컸다. 동쪽 꼭대기는 올라가면 숨이  몇번이고 쉬었다 가야  정도로 계단이 고 높았. 이곳에는  떨어진 거리의 언덕 위에 민우와 채린이네 집이 있었다.   엄마가 없었고 할머니와 일하시는 분이 돌봐주셨는데  녀석들이 일주일 내내 나를 기다리던 기억이 난다. 엄청난 눈이 쏟아지던 , 민우네 집에 가는데 다니는 사람도 없었지만, 길도 없어져 갑자기 폭설 쏟아지는 깊은 숲을 헤매는 장면이 연출되었다. 길로 보이는 쪽을 짐작해 찾아가다가 언덕에서 두번이나 미끄러져 구르기도 했다. 무척 늦게 도착했는데, 실내가 너무나 아늑해 잠이 오던 기억, 민우가 엉덩이춤을 추며 선생님 왔다고 좋아하던 기억이 난다. 일을 그만두던 마지막 , 채린이는 왜인지 나에게 삐친  같았는데, 풀어줄 다음이라는 시간이 없어 한동안 계속 생각이 났다. 아이들과 헤어지는 일이 힘들어 한동안 길을 걸을  주머니 속에서 손가락을 빳빳이 세우고   없이 움직이며 다니던 기억도 난다. 갑작스러운 눈을 보자, 나를 기다렸던 작은 존재들이 떠오른다. 이제 나보다도  어른이 되었겠다.


  편안한 아파트로 수업을 나가는 요일도 있었지만, 이전 선생님이 너무 좋아서였는지 엄마들은 담합이라도 한 듯 오랫동안 냉담했다. 수업이 펑크 나면 추울 땐 늘 편의점에 들러 컵라면을 먹으며 몸을 덥히고 여름엔 웨딩홀 로비나 맥도날드에 자주 가 있었다. 하루종일 무거운 교재를 들고 밤늦도록 걸어다녀서 그때부터 밥을 머슴처럼 수북하게 담아 먹고, 머리만 닿으면 잠을 잘 수 있게 되었다. 처음으로 해본 몸으로 하는 일이었고, 지금 생각하니 그 일이 내게 준 것이 참 많다. 서울에 갈 때마다 문득 성북동에 가보고 싶다. 동쪽 위에서 바라본 풍경도 서쪽에서 바라본 맞은 편의 풍경도 늘 평화로웠다. 그건 엄마들도 아이들도 내게 다정했기 때문일 것이다. 놀 것이 없어 늘 선생님을 기다리던 아이들, 주는 것이 냉수 한 잔일 뿐 이라도, 그 동네를 고향처럼 느껴지게 한 것은 그들의 웃음과 따뜻한 말들이었다. 한 번은 부동산에 들러 두 사람이 살만한 집을 보여달라고 했더니 언덕에 있는 낡은 ㅁ자 한옥을 보여주었다. 마당이 있고,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는 집이라 좋았지만, 겨울에 몹시 추울 것 같아 그만두었는데 그런 곳에 살았다면, 줄넘기라도 하며 살게 되었을까. 일할 땐 가장 힘들고 고되다고 생각했는데 성북동 생각만 하면 이렇게 감정도 기억도 생생한 게 이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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