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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숲섬 정은영 Jan 14. 2023

틈과 비움

  

  가끔 과부하가 걸리거나 번아웃이 올 때가 있다. 내 상태는 상당히 신경질적이고 예민하게 된다. 그래서인지 생각지 못한 엉뚱한 사고들이 (특히 집에) 생긴다. 예를 들어 변기가 막힌다거나, 보일러실에 문제가 생긴다거나, 멀쩡하던 컴퓨터가 고장난다거나, 오늘처럼 주방 쪽의 콘센트로 연결된 차단기가 내려간다거나 하는 일들 말이다.


  발단은, 첫째 고양이 미얀이가 아팠기 때문이다. 둘이서 장난을 쳤는지, 누구랑 싸웠는지 두 눈이 벌겋게 부어올라 병원에 다녀왔다. 처음엔 먹는 약 일주일 분과 안약 두 종류를 처방받았고 알러지 때문인가 싶어 다른 사료로 교체했다. 문제는 약을 먹이는 일도, 안약을 넣는 일도, 엘리자베스 칼라를 쓰는 일도 모두에게 쉽지 않다는 점이다. 자면서도 오물오물 먹는 꿈만 꾸는 미얀이에겐 먹는 일이 최고의 기쁨이다. 처음엔 좋아하는 고양이 츄르에 약을 타서 먹였는데 곧 쓴 맛이 나는 츄르 먹기를 거부했다. 작은 캡슐에 가루약을 넣어 밥 먹을 때 살짝 고개를 들고 얼른 목 안쪽에 집어넣었는데, 몇 번은 그냥 먹더니 곧 혀를 날름거려 약을 기어이 뱉어내고, 그러다 캡슐이 터지면 괴로워하며 먹은 걸 다 토하기도 했다. 안약을 넣을 땐 내가 뒤에서 꼭 끌어안은 채 목덜미를 사정없이 긁어주고 N이 식염수로 눈가를 닦아주고 안약을 넣는데 미얀이는 곧 N만 보면 주눅이 들어 슬금슬금 도망치게 되었다. 엘리자베스 칼라는 애들에게 어마어마한 스트레스다. 깔끔한 녀석이 몸을 닦지 못하고 맘껏 긁지 못하니까. 게다가 벽이나 문에 자꾸 부딪쳐 놀라고 당황한다. 그래서 열심히 긁어주고 닦아주며 위로해 줘야 한다. 첫 일주일이 지나고 다시 병원에 가서 열흘 치 약과 안연고를 받아왔을 무렵엔 칼라에 조금 익숙해지긴 했다.


   N을 슬금슬금 피해 다니던 미얀이는 그제 비 오는 밤, 밖에 나가더니 한참을 돌아오지 않았다. 너무 힘들어서 집 나간 거 아냐? 농담을 하면서도 진심으로 걱정이 되었다. 집 주변을 돌며 이름을 크게 불렀는데, 미얀이는 자기 이름을 들으면 백이면 백번 다 대답하기 때문이다. 나중에 보니 창고 옆 신발장 비닐 뒤로 들어가 조용히 숨어 있었나 보다. 자기 부르는 소릴 들으며 대답도 안 하고 가만히 있었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얼마나 싫고 힘들었으면.


  미얀이는 얼마 전부터 낮밤이 바뀌었다. 자다가 들리는 벅벅벅 칼라와 발톱이 부딪치는 소리와 문 긁는 소리에 N과 나는 자주 잠을 설쳤다. 어제는 새벽 1시부터 문을 긁으며 시끄럽게 굴어 아예 일어나 밥도 먹이고 미얀이와 한참을 같이 있었다. 가만 보니 미얀이 털도 거칠하고 눈밑이 시커멓다. 오래 만져주었다. 미안해, 아침저녁 두 번 약을 먹어야 하고, 하루 세 번 안약을 넣거나 바르고, 자기 전에 양치질도 해야 하고 얼마나 힘드니. 눈 아픈 거 보는 엄마도 힘들고, 너도 힘들고, 봉봉이와 모모는 우리가 너만 많이 본다고 생각하니까 힘들 테고. 미얀이가 빨리 나아야지, 건성으로 말고, 진심으로 눈을 들여다보며 말한다. 이렇게 말한 지 오래되었다는 걸 그제야 깨닫는다.


  오늘 아침에도 미얀이는 약을 먹은 후 먹은 걸 다 토해서 양탄자를 욕조에 담가뒀다. 식사 준비를 하다가 두꺼비집 차단기 하나가 갑자기 내려간 걸 보자, 그동안 안달이 나고 조급했던 마음이 툭 풀어진 듯 느긋해졌다. 그렇구나, 너무 무리했네. 기운인지 에너지인지 꽉 막힐 정도로. 우선 마음에 틈을 조금이라도 만들어둬야 한다. 바람과 햇빛이 들어오도록. 그리고 천천히 생각을 비워야겠지. 해가 날 때까지 바깥에서 휴대용 가스레인지를 쓰기로 한다. 옛날엔 아궁이에 불 때며 요리하기도 했으려고, 느긋하게 마음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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