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 아니 에르노
아래는《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아니 에르노, 김선희. 열림원 (2021))에서 발췌한 문장들.
이제는 모든 것이 뒤바뀌었다.
어머니가 나의 어린 딸이 된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어머니가 될 수는 없다. 5쪽.
나는 어머니가 전에 쓰기 시작했던 편지 한 장을 발견했다. '사랑하는 폴레트,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았어 Je ne Suis Pas Sortie De Ma Nuit'라고 적혀 있었다. 어머니는 이젠 글마저도 쓸 수 없게 되었다. 이 편지의 글들은 마치 전혀 다른 여자가 써놓은 것 같았다. 어머니가 이 편지를 쓴 것은 바로 한 달 전의 일이었다. 15쪽.
어머니는 일시적으로 제정신이 들자 "난 죽을 때까지 이곳에 있을 테다"라고 말한 후 "난 네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다했다. 그런데 그 때문에 너는 한층 더 불행했을 거다"라고 말했다. 26쪽.
죄책감을 간직한 채 살아간다는 건 생명이 멈추어 버린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나의 삶이 고통과 최잭감으로 소멸되는 이치와 같은 것이다. '어머니'는 곧 '나'임을 실감한다. 57쪽.
하지만 난 어머니에게 충분한 도움이 되지 못했다. 결국 어머니는 혼자 힘으로 자신의 밤을 헤치고 나갔던 것이다. 103쪽.
어머니는 이 꽃장식을 가리키면서 "저건 아니의 원피스야"라고 말했다. 오직 나 하나만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로비의 벽지를 보니 불현듯 1950년쯤 이브토의 카페에서 보았던 벽지가 생각났다. 마치 나의 어린 시절 이후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한 기분이었다. 전 생애란 한갓 인생의 다양한 정경이 첩첩이 포개진 하나의 축적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과, 생의 노래가 축적된 것에 불과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131쪽.
어쩌면 난 이렇게 나의 고통을 이야기하고 기록하여 진술함으로써 내부에 존재할 수 있는 모든 고통의 뿌리를 끌어내어 고갈시켜버리고 지쳐버린 고통이 더 이상 작용하지 못하게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글쓰기와 함께 고통을 상쇄시켜가고자 했던 것 같다. 이전에 적어놓았던 메모들을 다시 읽어내려갈 수가 없다. 너무도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148쪽.
오랫동안 이 일기를 결코 발표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아마도 나의 어머니 그리고 나의 어머니의 관계가 소설 <어떤 여자>에서 내가 접근하려 했던 단 하나의 이미지, 단 하나의 본성으로 남아 있길 바랐기 때문일 것이다. (…) 내게는 이 일기 속의 글들을 공개한다는 것이 나의 글쓰기 통일성을 위협하는 계기가 될까봐 위험천만하게 느껴진다. 169쪽.
치매에 걸리기 전 본래 모습의 어머니를 꿈에서 자주 뵌다. 어머니는 마음속엔 살아 있지만 실제론 죽었다. 나는 잠에서 깰 때마다 잠시 동안 어머니가 죽었으면서도 동시에 이중 형상으로 실제로 살아 있음을 확신한다. 마치 죽음의 강을 두 번 건넌 그리스 신화의 인물들처럼. 171쪽. ㅡ 작가의 말 中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를 읽었다. 내면일기로 출판된 것이라길래 도서관에 있던 이 책을 빌렸는데, 읽고 나니 어머니의 이야기를 다룬 《한 여자》도 읽고 싶다. 표지에는 '아니 에르노 장편소설'이라고 적혀있다. 이미 사건의 내용도 결말도 알고 있는 일기 형식의 이 기록이 과연 소설이 될 수 있을까. 생각해 보면 우리가 치매 노인에게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지리라는 것을 직간접적인 경험으로 알고 있듯이, 모든 소설들이 죽음이 결정되어 있는 삶의 다양한 모습을 그린다는 점에서 소설의 범주에 충분히 들어갈 수 있겠단 생각을 해보았다. 그곳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다를 뿐이지 인생에서 겪는 고통을 지켜보는 일은 공감과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어머니의 시간이 곧 자신의 맞을 미래의 모습이며, 어머니가 곧 나임을 줄기차게 확인하는 일기의 문장들이 문득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작년 올해 주변의 정말 많은 어른들과 지인들의 부모님이 돌아가셨다. 문득 알츠하이머라는 병은 우리가 지금 아무렇지 않게 누리고 있는 모든 일들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적이라는 사실을 냉정하게 깨닫게 하려는 자연의 방식인지도 모른단 생각이 든다. 아니 에르노의 작품을 그만 읽고 싶은데, 쉽지 않다. 이 책 때문인지 계속 울컥 울고 싶은 마음이 올라온다.